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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얼굴, 꼴이….”
준한은 기가 막혀 말을 잊지 못하며 현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흘긋, 그를 확인한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료부터 넘겨 보여 줬다.
“자. 오명환 거래 내역. 이게 다야. 백 퍼센트 현금 거래에, 워낙 보안에 철저하신 분이시라 사진이나 음성 녹음 자료 그런 것도 없고. 그래도 선배가 상세 리스트 쥐고 있다는 거 알면 지금처럼 막무가내로는 못 굴겠지.”
준한이 지금 맡은 일에 퍽 유리한 쪽으로 작용하게 될 자료였다. 대체 매번 이런 자료들을 어디서 이리 손쉽게 구하고 내미는 건지, 그는 그저 그 정보력에 혀를 내두를 따름이었다.
“너 또 일부러 맞고 있었지.”
그러나 없어서 못 구했던 자료를 눈앞에 두고도 준한의 시선은 오로지 현서의 얼굴에 가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수임료가 높은 대신 위험하고 거친 사건들만 골라 가며 맡은 필연적 결과였다.
“살해 협박을 당한 것도 아니고 납치를 당한 것도 아니고 칼 휘두르고 난동 부린 것도 아닌데 뭐. 겨우 뺨 몇 대 정도야 얼마든지 내 드려야지. 맞을 짓을 했는데.”
“너 이러다 진짜 큰일 난다.”
“죽기밖에 더 해.”
“그럼 맞을 짓을 하지 말든지.”
준한은 싫었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악착같이 발버둥 치며 사는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싫었다.
세상 나쁜 년인 척, 무심한 척, 상처받지 않는 척하며 위험하고 손가락질받는 일만 골라 하는 게 못마땅했다. 있는 대로 발톱을 세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기 힘들었다. 여리고 순한 속이 얼마나 곪아 터졌을지 가늠조차 안 됐다. 그럼에도, 도와주겠다며 어쭙잖은 동정심에 손이라도 내밀었다간 영 도망쳐 아예 숨어 버릴까 봐 그럴 수조차 없었다. 누구보다 차현서를 잘 아니까.
“누구 말대로 맞으면서 흥분하는 타입인가 보지, 내가.”
“뭐?”
현서는 헛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었다.
“걱정 마. 이젠 이런 일도 더 없을 것 같으니까.”
“무슨 소리야?”
“개인적으로 사건 의뢰받는 거 안 하려고.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게 바빠서.”
퍽 다행인 소리에도, 준한은 어쩐지 반갑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골드스톤에 발을 들인 게 여전히 불안했다. 특히나 현서를 스카우트했다는 본부장, 라이언 서에 대해선 더 예감이 좋질 않았고.
“일 많이 힘든가 보네. 차현서 입에서 바쁘단 소리가 다 나오는 걸 보면.”
“어쩌겠어. 작정하고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겠다고 준 돈 다 받았는데.”
퉁퉁 부은 뺨으로 너스레를 떠는 그녀를 보며 핏, 웃음을 터뜨렸다. 안타깝고 답답한데, 그게 또 귀여워서. 워낙 미친 소리라, 입 밖에도 못 내뱉을 그의 진심이었다.
“저녁은. 먹었냐?”
현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준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우동 당긴다.”
***
근처 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씩을 먹고 나왔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봐야 한다는 현서의 말에 준한은 소화도 시킬 겸 회사 앞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나란히 걸었다. 시선은 오롯이 그녀에게로 맞춰졌다.
“아버님 일은, 잘 진행 중이고?”
현서는 양손을 코트 주머니 속에 푹 찔러 넣은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불행으로 말미암아 15년 넘게 고통받아 온 사람의 얼굴치고는, 퍽 평온하고도 담담한 얼굴이었다.
“뭐라셔?”
“뭐라긴. 그냥 또 미안하다지.”
습관처럼 또, 애끓었을 속을 열심히 감추고 있었다. 그게 나름의 방어 기제이고 생존 본능이라는 걸 알지만, 서운함과 미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한 번쯤 제게는 편안히 진심을 토로해도 좋으련만. 바라보는 준한의 눈빛에 애잔이 그득했다.
“당신 말론 손도 못 잡아 주고 나 혼자 결혼식장 들여보낼 생각할 때가 제일 괴로웠다는데, 이젠 결혼식장 들어갈 일도 없게 됐지, 뭐.”
작은 입술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실은 나, 조인호 그 여자랑 같이 있는 거 몇 번 봤어.”
대뜸 들려온 조인호 이야기에 현서가 고개를 돌려 준한을 응시했다. 타박, 구두 끝이 멈췄다.
그 여자. 조인호와 곧 결혼을 한다는 안성태 의원의 딸.
일부러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했었다. 현서를 위해서. 어차피 사랑해서 하는 결혼도 아니거니와 그러잖아도 복잡한 그녀의 인생에 그런 찬물까지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다고 제게 기회가 주어질 리도 만무했거니와,
준한은 현서를 잘 알았다. 저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자신의 그것과 전혀 다른 종류라는 것 또한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진창이든 지옥이든, 그녀 스스로가 선택한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 곁에 있어 주면 그뿐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게 제 역할이라 여겼다.
“근데 왜 말 안 해 줬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조인호한테 여자 있는 거.”
“…….”
“알고도 계속 진행하려던 거 아니었어?”
준한의 말에 현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곤 체념하듯 고개를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준한의 말이 맞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눈 가린 채 아웅 하려 했던 건 저였다. 결국 터져야 할 게 터진 것뿐이었다. 애당초 모르는 척 묻고 감춘다고 끝날 일은 아니었던 거고.
“그러게. 혹시나 나같이 박복한 인생에도 볕들 날 있을까 했었는데. 괜히 헛꿈 꾸다 뒤통수 맞았네. 살던 대로나 살걸.”
“자책하지 마. 전부 다 그 새끼 탓이지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선배뿐일걸.”
자조하듯 읊조리는 얼굴 위로 제법 밝은 조도의 불빛이 쏟아졌다. 8차선 대로 한복판의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 출입 인도에서부터 로비까지 이어지는 밝은 조명 덕이었다. 속 시끄러운 얘기나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들어가 볼게.”
현서가 흘긋, 고개를 들며 무덤덤히 말했다. 준한의 아쉬움은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하는 얼굴이었다.
“앞으론 이런 거 구해다 주지 마. 네 일이나 해.”
준한은 그녀에게 받은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으름장을 놨다.
“나 아니면 융통성 없는 김준한 변호사님 밥 빌어먹을까 봐 그러지. 그나마 내가 옆에서 챙겨 줘야 거기 대표 눈치라도 덜 볼 테니까.”
준한은 픽 웃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적성에도 안 맞는 변호사 노릇, 그것도 돈만 좇느라 더럽고 환멸 나는 사건만 넘쳐나는 청송에서 버티는 게 그에겐 꽤 쉽지 않은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이게 다 차현서, 제 탓인 줄은 모르고.
“가만 보면 날 되게 바보 취급하는 경향이 있어, 넌.”
“바보지. 난 선배가 굳이 이 안 어울리는 자리에 비집고 들어와 앉은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는데. 그냥 아버지나 형 따라서 판사 임용을 받든지, 아님 차라리 어머님 밑에 들어가서 검사를 하든가 하지. 나처럼 돈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성적도 실력도 충분한 사람이 편한 길 놔두고 당최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니까.”
“어이구, 고마워라. 몰랐네, 차현서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줄은?”
준한은 손을 뻗어 현서의 머리칼을 기특하단 듯 쓰다듬었다. 능청스러운 그의 대꾸에 현서 또한 피싯,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며 머리칼을 넘기는데 불현 서늘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정혁이었다. 그가 긴 다리를 뻗어 제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혁에게로 고정된 현서의 시선을 따라, 준한 또한 그를 바라봤다. 훤칠을 넘어 기골이 장대하게까지 느껴지는 피지컬의 남자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잔머리 하나 없이 쓸어넘긴 이마 아래, 짙은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남자의 표정이 서늘했다.
“퇴근하는 길이에요? 아. 다시 출근 중인 건가.”
“잠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식사하고 돌아왔습니다.”
살짝 묵례를 하며 짧게 답한 현서의 눈동자가 또르르, 그를 피했다. 준한과 현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는 정혁의 눈초리가 퍽 따가운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준한이 결국 먼저 정적을 깼다.
“청송에서 근무하는 변호사 김준한이라고 합니다. 현서 대학 선뱁니다.”
대 놓고 탐색하듯 훑는 그의 시선이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각종 혼돈에 잠시 잊고 있었다. 얼마나 오만하고 안하무인인 남자인지를.
“네. 반갑습니다. 서정혁입니다.”
반갑다는 말이 이토록 안 반갑게 들릴 수도 있는가. 이상한 긴장감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두 분 용건 끝났으면 차현서 팀장님은 나랑 좀 나가죠.”
그 말 한마디가 준한에겐 이제 그만 꺼지라는 위압처럼 들려왔다.
“어디, 가시던 길이세요?”
“김경욱 사장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차 변호사님도 동행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김경욱이라면 은성제약 채권단 중에서도 두 번째로 높은 지분율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 회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아무래도 끝까지 말썽을 피우겠다 싶은 인사였는데. 대체 또 어떻게 구워삶은 건가.
현서는 동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비뚜름, 준한을 향해 턱 끝을 까딱인 그가 앞장서 발걸음을 옮겼다. 현서는 준한에게 슬몃 눈인사를 건네곤 곧장 남자의 뒤를 따랐다.
달카닥, 비서가 열어 주는 뒷좌석 문 안으로 그녀가 먼저 들어가고 곧이어 서정혁이 긴 다리를 뻗었다. 나란히 차를 타고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준한의 잇새에서 불안한 한숨이 길게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