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13화 (13/115)

♬(13)

“어디 가냐고요.”

무감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으나 아무 대답도 나오질 않았다. 이성과 달리 제멋대로 울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입술 속 여린 살만 질근거렸을 뿐. 쏟아지는 시선에 온몸이 다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하릴없이, 눈망울에 고여 있던 물방울이 후드득 아래로 떨어져 낙하했다. 저를 내려다보던 남자의 눈썹이 슬몃 들썩였다.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잡힌 손목을 빼내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되레 그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의 열린 문 안으로 몸이 끌려갔다.

쿵, 문이 닫히고 사각의 공간에 단둘이 갇혔다. 서정혁은 말없이 주차장이 있는 지하층 버튼을 꾹 눌렀다. 따져 묻듯 그를 올려다봤다.

“왜요. 회사 밖으로 도망치는 중이었던 거 아니에요?”

그가 되물었다. 할 말을 잃었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아파요? 그만 씹죠. 안 그래도 다 터졌는데.”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톡톡, 가리키며 물었다. 현서는 고개를 돌려 금속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부을 대로 부어올라 시뻘게진 뺨과 눈물로 얼룩진 눈가. 엉망으로 터진 입술. 최악이었다.

거울 속에서 다시 눈이 마주쳤다. 집요한 시선이 원망스레 따라붙었다. 그는 계속, 관찰하듯 저를 보고 있었던 거였다. 재밌어서? 우스워서? 도대체 왜.

땡, 하는 소리가 구원처럼 들려왔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다시 그에게 끌려나갔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 건지 계속 그에게 손목을 잡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놔 달란 의도로 뿌리치며 팔을 흔들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멈췄을 땐 이미 그의 세단 조수석 문이 제 앞에서 활짝 열리고 있었다.

“타요.”

그가 열린 문 안으로 턱짓을 했다. 세게 쥐였던 손목이 홧홧했다. 고집이라도 부리듯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참고로 나 두 번씩 말하게 하는 거 질색인데.”

장승처럼 버티고 선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빛이 서늘했다.

“자꾸 질색하게 하네, 차현서 씨가.”

“…….”

“도와준 사람 성의를 봐서 탑시다, 좀. 어?”

우연히 한 번 편 좀 들어줬다고 생색이라도 내는 건가 뭔가. 냉랭한 얼굴이 협박하듯 말하는데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자꾸 덧없는 눈물이 왈칵댔다. 정말이지 이상한 남자.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시선을 피해 조수석에 올랐다. 그제야 그도 문을 닫고 차 앞을 돌아 제 옆, 운전석 자리에 몸을 싣는다. 그는 말없이 곧장 액셀러레이터를 눌러 밟았다. 차는 금세 도로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어딜 가는 거냐 물을 정신도 없었다. 그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어두운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창밖 풍경 대신 볼썽사납기 그지없는 제 얼굴이 고스란히 비쳐 더 심란해졌다.

“도와주실 필요 없으셨는데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아니었음. 언제까지 맞고 있으려고 했는데요.”

무미건조한 답이 툭 돌아왔다. 저도 모르게 그를 돌아봤다. 전방만 응시한 채 핸들을 쥔 그의 옆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질 않았다.

“열심히 맞아 줘도 그 여자 분 다 안 풀리고, 당신 용서 못 받습니다. 모르는 거 아니잖아. 다 알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하지?”

신호가 걸린 횡단보도 앞에서, 그가 고개를 돌려 흘긋 눈을 맞춰 왔다. 그 얼굴이 왜 그렇게 어리석게 굴었냐 타박이라도 하는 듯해서 목이 까끌해졌다.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왜 자신을 기어코 이 차에 태우려 했는지. 도망치는 걸 도와주겠다던 말은 완벽히 거짓이었다. 그의 목적은 되레 퇴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도망칠 생각 말고, 네 속을 완벽히 까 보이라고. 아무래도 이게 완벽한 굴종을 강요하는 그만의 방식인 듯싶었다.

“아. 혹시 늘 이런 식으로 죄책감 덜고, 당위성 부여하고, 자위하고. 그랬나?”

또 들켰다.

“생각보다 미련하고 이기적이네. 맞으면서 흥분하는 타입이 아니고서야.”

“…본부장님.”

“이건 뭐, 나보다 더하잖아.”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롱을 해 왔다.

“자존심도 없고. 양심도 없고.”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후려갈기고 있었다.

나쁜 새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알 만하단 듯 고개를 까딱인 그가 다시 액셀을 밟았다. 파란 불이었다.

마음이 울멍해서, 더는 가만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속을 들추고 들쑤시는 그가 정말 싫었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업무입니다.”

“개인적으로 해결 못 하고 일 키운 게 누군데.”

“네. 죄송합니다. 회사까지 찾아오게 만든 건 분명 제 실수지만, 본부장님한테 이런 모욕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모욕으로 느끼긴 하고요.”

빈정거림이었다. 실낱같던 인내심이, 억눌렀던 감정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충분히 괴롭고 고달픈 마음에 왜 자꾸 불쏘시개를 놓는 건가.

“도대체.”

왜.

“왜 이러세요, 저한테?”

명백한 항의였다.

다리 위 갓길에 차가 멈췄다. 차창 너머, 주홍빛 조명에 비친 한강 물이 넘실댔다. 달카닥, 먼저 차에서 내린 그가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소 마른 뺨이 더 홀쭉하게 패고, 뿌연 연기가 어두운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곁에 다가선 저를 바라보는 그 얼굴조차 그림 같았다. 재수 없게도.

“JK랑 거래 끊죠.”

그가 대뜸 말했다.

“계약서에 겸직 금지 조항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내가 주는 돈이 부족해서는 아닐 테고. 그 양아치 같은 인간들한테 무슨 대단한 의리가 있어선 더더욱 아닐 건데.”

짙은 눈동자가 제 속을 샅샅이 훑듯 번득거렸다. 긴 손가락 사이, 담뱃대를 끼운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뭐. 약점이라도 잡혔나, 그 여자한테?”

“대답해야 하나요.”

그가 핏 웃는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저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물어보는 게 분명했다. 제 유일한 약점이 아버지라는 것도, 양재숙에게 그 약점을 쥐였다는 것도. 다 알면서 능청을 떠는 거였다.

그녀의 얼굴에 뚫어질 듯 시선을 고정시킨 그가 다시 필터를 깊게 빨았다. 연기를 내뿜는 입술이 느긋이 움직거렸다.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변호사. 의뢰인이 살인자든 강간범이든 뭐든 수임료만 넉넉히 챙겨 제 주머니만 불리면 그만인 여자. 피해자들 찾아가 합의 협박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증거 인멸, 증인 은닉, 범인 은닉, 위증 교사, 모해, 각종 로비까지. 의뢰인이 원하는 거면 눈 하나 깜짝 않고 범죄 행위도 서슴지 않는 대단하신 분.”

“…….”

“돈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

“…….”

“인간쓰레기.”

“…….”

“법으로 사람 죽이는 살인자.”

“…….”

“뭐. 더 읊어요?”

할 말을 잃었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인정하지 않을 방법도 없는 객관적 평판이었음에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아서.

“당신이 쓴 가면이잖아. 그 가면 씌운 게 양재숙이고.”

예상대로였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남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아닌 척 위선을 떨고 있었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얼마나 같잖았을까. 초라함에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왜 이러냐고. 내가, 차현서 씨한테.”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가 제게 눈동자를 맞춰 왔다. 그 눈빛에 포박이라도 당한 듯 몸이 굳었다.

“난 누가 내 거 건드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다른 인간이랑 내 거 공유하는 것도 용납 못 하고.”

퍽 그다운 이유였다.

“그래서 내가 비싼 값 치르고 차현서 씨 산 건데. 모르겠어요?”

그의 입매가 느른히 말려 올라갔다. 고압적인 남자의 목소리에 도시의 소음도 우웅우웅 이명처럼 들렸다. 궁지에 몰려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자신이 완벽히 항복을 선언해야만 이 숨 막히는 위압이 끝난단 뜻이기도 했다.

“네.”

꾹,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쥐었다.

“잘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목 끝까지 치솟는 감정을 억눌러, 말끝이 갈라져 나왔다.

“JK 쪽이랑은 이번 건만 마무리 짓고 나면 정리하겠습니다.”

“내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괜찮습니다. 50억이나 해결해 주셨는데, 더 징징대면 제가 너무 자존심도, 양심도 없는 사람이죠.”

피식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현서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무례하게 제 턱 끝을 잡아 들었다. 특유의 묵직한 향이 성큼 가까워졌고, 덜컥 숨이 막혔다.

“봐요.”

“뭐, 하는…!”

“많이도 맞았다. 미련하게.”

칠흑 같은 눈동자가 코앞에서 굴렀다. 피할 수도 없이 깊이 얽혀 오는 시선에 심장이 버겁게 내려앉았다. 남자는 이마, 눈동자, 뺨, 입술, 턱까지, 얼굴을 샅샅이 훑고도 감상할 것이 더 남았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끈질겼다. 덕분에 들이켠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온몸이 뻣뻣이 굳는 것만 같았다.

“병원 가 볼래요? 아님, 의사 불러 줘요?”

“아뇨. 이 정도로 무슨, 아…!”

그의 엄지손가락이 터진 아랫입술을 길게 훑고 지났다. 현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왜 자꾸 센 척을 하실까. 감당도 못 하는 주제에.”

한심하단 듯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커다란 손바닥이 부은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스치는 체온이 뜨거워 얼굴 전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그가 빙글댔다. 엉망진창인 제 꼴을 보며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쿵쿵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힘껏 그를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참을 만해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러지. 내 거에 흠집 나는 것도 못 참아서. 내가.”

구둣발에 담배를 지져 끈 그가 다시 세워둔 차를 향해 말했다.

“가죠. 바를 약이라도 사러.”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뺨에 차가운 강바람이 스쳤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또 두 번 말하게 할 거냐는 타박이 돌아올 차례였다.

“네. 가요.”

그 재수 없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 뒤로 찰싹 달라붙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애써 모른 척 차로 도망쳤다. 가슴이 정신없이 펄떡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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