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정혁은 노크 없이 들어서는 레오의 얼굴을 힐긋, 확인하곤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물 대신 위스키로 약을 삼키는 목 넘김이 퍽 자연스러웠다.
[제임스가 저더러 본부장님 약 제때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체크하라고 성화인데.]
[귀찮은 인간. 조만간 갈아 치우든가 해야지, 널린 게 정신과 닥터인데.]
[네. 닥터는 널렸지만, 본부장님 성질 받아 줄 사람은 이제 한 사람도 없어요. 아시죠, 소문 다 난 거?]
레오는 이번엔 생각도 하지 말란 듯 으름장을 놨다. 그 진심 어린 경고에 정혁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제 눈앞에 카운트되는 숫자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정혁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인물이 그였다.
첫 인연을 떠올리자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열여섯, 홀로 남은 할렘 빈민가에서 죽음을 고뇌했던 제게, 제 몫의 말라비틀어진 빵 한 조각을 내밀던 어린 레오의 얼굴을, 정혁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의 그가 아니었다면, 우연히 손에 들어온 총 한 자루로 제 머리를 갈기는 데 미련 한 점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기어코 맨해튼 가장 전망 좋은 펜트하우스에 짐을 풀었을 때 제일 먼저 레오를 찾았다. 약에 찌들고 완전히 망가져 최후의 불행만 기다리던 그에게 이젠 제가 먼저 손을 내밀 차례라 여겼다.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한 번씩 빚진 사이였다. 목숨을 담보로 한 신뢰는 두터웠고 또 절박했다. 제 말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든 다 해내고야 마는 그의 능력 또한 못지않았다.
레오는 제게 있어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 그리고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인 셈이었다.
남은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삼키며 창밖의 야경을 바라봤다. 발아래, 별 무리처럼 반짝거리는 스카이라인이 뉴욕의 그것보단 확연 아려했다.
[차현서 씨한텐 일부러 정신 못 차리게 일 떠넘기시는 거죠?]
역시나 제 의도를 정확히 간파한 질문이 던져졌다. 여자의 가면을 기어코 벗겨 내려면 얼굴을 제 쪽으로 오롯이 돌려놔야 했다. 그래서 굳이 그녀를 통째로 사 온 게 아니던가.
레오에게 건네받은 태블릿 액정 화면을 툭툭 두드려 넘기며 살폈다. 사진의 포커스는 온통 차현서였다.
[대부분의 거래는 다 끊은 것 같은데, 아직 JK 쪽하고의 관계는 유지 중입니다.]
경찰서와 법원, 그리고 JK가의 저택을 오가며 찍힌 사진들만 수십 장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건은 둘째 아들 장기용의 폭행 합의 건이고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양재숙을 비롯한 JK쪽 사람들과 계속 접촉하며 의뢰받은 일 처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또 무슨 미련인 건가.
“당최 나한테 집중을 안 하시겠다.”
예상만큼이나 고집스러운 여자의 성미에, 정혁은 낮은 혼잣말을 읊조렸다.
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밟히기보단 짓밟길 선호하는 제게 차현서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보고 있으면 이상한 오기, 아니 승부욕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어서.
조금 전 조인호를 부득불 그녀 앞에 데려다 앉혀 놓은 데엔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았다. 마음 없는 결혼 상대였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차현서의 동요를.
문득, 무심히 액정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가 낯선 남자와 나란히 걸으며 친근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생경했다. 차현서의 웃는 얼굴이. 늘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이 아무런 경계도, 의심도 없이 풀어져 세상 해맑게 웃고 있는 거였다. 둥글게 휘어진 눈꼬리와 예쁘게 말려 올라간 산호색 입꼬리가 퍽 요요하고 앙큼스러웠다. 여자에게 이런 얼굴이 있었던가.
일순 생소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안온하던 심사가 급격히 뒤틀렸다.
그 날카로워진 시선을 알아차린 레오가 알아서 설명을 덧붙여 온다.
[김준한. 차현서 씨 대학교 선배입니다. 김재학 대법관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정부 지검 차장 검사, 형은 서울 지법 판사. 아주 유명한 법조인 집안이더라고요. 차현서 씨랑은 대학교 때부터 청송에서까지 쭉, 같이 공부하고 근무해서인지 꽤 친한 사이 같아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친하면 이런 무방비한 표정이 나오는 건가.
[둘이 사귀기라도 했어?]
[아뇨. 그런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사이는 아닌데,]
이렇게 웃는다고.
끊긴 목소리가 침잠했다. 액정 속, 말간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부지불식간, 매끈하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실컷 제 쪽으로 돌리려 노력했던 차현서의 얼굴이 웬 낯선 놈에게로 향해 있단 게 영 씁쓰레했다. 조인호보단 외려 이쪽이 더 흔들어 볼 가치도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분명한 판단 미스였다.
[이쪽에도 따로 사람 붙이겠습니다.]
심기를 읽은 레오가 알아서 뒷걸음질을 쳤다. 빈 잔을 쥔 손등에 힘줄이 꾹 솟았다.
좀처럼 깨기 힘든 미션의 게임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원망과 복수심에서 발로한 애매한 감정들이 저 깊은 아래에서 울렁댔다.
그 근원도, 정체도 몰랐다. 아직은 모든 게 불분명하고 불확실했다. 여자의 가면을 벗기고, 밑바닥까지 확인하고 나면 뭘 어쩔 생각인지. 못된 호기심으로 시작한 이 게임의 결말을 어떻게 몰고 가고 싶은 것인지. 결국, 유치한 복수라도 해야 이 모호한 갈증을 해갈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이토록 흐리멍덩한 기분은 정말이지,
“엿같네.”
창문 너머 시커먼 밤하늘에 구겨진 제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불쾌감이 무섭게 치솟았다.
***
고요하던 문밖이 소란스러워 현서는 보던 자료를 내려놓고 일어났다. 고질적으로 변한 만성 두통에 소음이 더해지자 머리가 깨질 듯 웅웅댔다. 결국, 알약 하나를 털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아니,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
문을 열기가 무섭게, 성난 얼굴의 여자가 솔을 확 밀어내곤 제 앞에 성큼성큼 다가와 섰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자위가 새빨갰다.
“차현서 변호사님?”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마주친 순간 직감했다. 일그러진 표정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나 알죠?”
이유진. 장기용을 폭행으로 고소한 피해 당사자였다. 합의를 위해 몇 번이고 찾아갔으나 그녀는 장기용 측과의 만남 자체를 줄곧 거부해 왔었다. 그런 그녀가 여기까지 직접 제 발로 찾아온 건, 최후의 협박이 먹혔단 방증이었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얘기하시죠.”
소란에 하나둘 몰려든 직원들이 주변에 북적대고 있었다.
“우리 엄마 병원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은 여자의 눈빛은 확연 정상이 아니었다.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금 그녀의 귀엔 어차피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성싶게.
“불가피했습니다. 이유진 씨께서 계속 저희 연락을 거부하셨으니까요.”
“이젠 하다 하다, 가족한테까지 협박을, 하…. 당신들 정말 어디까지 사람을 괴롭힐 생각이에요?!”
당신이 지쳐서 모든 걸 다 포기할 때까지. 내 쓰레기 같은 의뢰인이 다시 안온 무사해질 때까지. 그래서 세상이 계속 엿같이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킨 입이 썼다.
“이유진 씨에게도 저희에게도 서로 좋은 방향의 답을 함께 찾고 싶습니다.”
“좋은 방향? 당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일단 진정하시고, 들어가서 말씀…!”
쫘악!
순식간에 돌아간 뺨에 불이 일었다.
“나쁜 년!”
분노에 찬 욕지거리가 귓전을 때렸다. 보지 않아도 격노한 여자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떨려 갈라지는 그 한마디 목소리에 그녀의 절망과 무력한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이쯤 예상 못 했던 것도 아니기에 천천히 얼얼한 뺨을 들어 올렸다. 입술을 앙다물고 마른침을 삼키는데, 예고 없이 다시 뺨이 후려갈겨졌다.
짝.
“미친년!”
짜악.
여자는 때린 뺨을 연이어 올려붙였다. 억센 충격에 몸이 다 휘청였다.
“변호사님!”
놀란 솔의 목소리도, 수군덕대는 주변의 소음마저도, 꿈처럼 혼몽하게 들렸다. 그럼에도 현서는 속죄하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짜아악!
어김없이 칼날 같은 충격이 뺨을 베고 지났다. 생리적 눈물이 고일 만큼 아리고 쓰렸다.
용서, 이해, 양해. 그런 것 따위를 구걸할 자격이 제겐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늘 그랬듯,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제게 퍼붓는 그녀의 저주와 분노가 부디 그대로 이루어지길, 저 또한 바랄 수 있게 돼서 되레 고마웠다.
“이 쓰레기 같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다시 눈을 질끈 감는데, 얼얼한 타격감 대신 진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쳐 왔다.
“이쯤 합시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눈꺼풀을 파르르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엔 이유진의 손목을 허공에서 붙잡아 막은 서정혁이 서 있었다.
늘 익숙했던 상황, 일상적이었던 제 풍경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남자가 불쑥 발을 들인 거였다, 허락도 없이. 입이 마르고 몸이 바짝 굳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밖에서 해결하시고.”
그는 쥐고 있던 유진의 손을 슬쩍 밀어내며 레오에게 슬쩍 눈짓을 했다.
“그만 나가 주시죠.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단침입이니까.”
급히 나타난 보안팀 직원들이 쓰러질 듯 휘청이는 여자를 부축해 나갔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 눈동자가 저를 향해 왔다. 무심코 마주친 순간, 느닷없이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겨우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북받쳐서. 모래성처럼 나약했던 감정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아서.
실컷 있는 대로 그를 비웃어 놓곤, 그 못지않은 제 치부를 코앞에서 들켜 버린 셈이었다. 잠시, 제 주제를 잊고 그 위선을 떨었던 게 후회스러웠다. 바닥 모를 수치가 몰아쳤다.
본능적으로 먼저 눈을 피했다. 곧장 발을 내디뎠다. 한시바삐 그의 시야에서 도망을 치고 싶어졌다. 너무 버거웠다.
아무리 눌러도 도착하지 않는 엘리베이터 대시 보드의 숫자를 원망스레 쏘아봤다. 1초가 억겁 같았다. 정신이 혼몽했다. 그렇게 몇 초나 더 지났을까. 겨우 들려온 차임 소리에 다급히 발을 떼어 냈을 때였다.
그 찰나 손목이 채었고 어깨가 맥없이 돌아갔다.
“어디 가는데.”
그 건조하고 낮은 음성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짓깨물던 입술은 떨렸고 눈꼬리는 여지없이 화끈댔다. 부지불식간, 눈앞의 서정혁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