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방금 법원에 서류 제출하고 나왔다.」
「생활비도 그만 보내라. 이젠 죽은 사람도 아닌데 뭐라도 하면 내 입 하나 건사 못 하겠냐.」
「밥 잘 챙겨 먹으면서 일해라.」
「늘 미안하구나.」
연달아 도착한 메시지로 번쩍이는 액정을 바라봤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껏 오로지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번호로만 숨죽여 전화를 걸어오던 아버지였다. 낯선 번호와 낯선 메시지의 내용들. 하루아침에 산 사람이 된 아버지가 낯설었다.
죽은 사람도 하루아침에 되살릴 수 있을 힘. 아니. 멀쩡히 살아 있던 사람도 죽음을 선택하게 하고 마는 위력. 그 무서운 권력을 눈 하나 깜짝 않고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남자.
저 굳게 닫힌 문 안에 앉아 있을 서정혁을 떠올렸다. 절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제 발목에 채운 족쇄의 무게가 새삼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실감이 돼서.
“들어오시랍니다.”
비서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탄식이 터졌다. 서정혁과 마주 앉아, 들어서는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사람. 다름 아닌 조인호였다.
바로 오늘 아침 조인호의 결혼 기사가 났다. 제게 파혼 이야기를 꺼낸 게 불과 몇 주 전 일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날의 통보가 단순히 충동적 결정이 아니었다는 게 확실해 보였다. 상대는 현 야당 실세라 불리는 의원의 고명딸이라 했다. 힘을 보탤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하다던 핑계가 무색지 않은 상대였다.
“찾으셨다고요.”
애써 표정을 지우고 묵례를 했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깊게 내쉬는 조인호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과 조인호를 느긋이 번갈아 관찰하는 서정혁의 시선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는 이 상황을 즐겨 볼 작정인 게 분명했다.
미친놈. 소시오패스. 변태. 사이코.
내뱉을 수도 없을 호칭들을 실컷 속으로 되새김질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인사들 하시라고 불렀습니다. 피차 불편하겠지만 앞으로 계속 긴밀히 공조해야 할 사인데, 두 분 모두 사적 감정은 잠시 좀 접어 주시길 부탁드리려고요.”
다리를 꼰 그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그 미소에 괜한 오기가 일었다. 이쯤 되면, 겨우 지워 가는 사적 감정을 자꾸 불러일으키는 게 되레 누구인가 싶었다.
이 질 낮고 뻔한 의도에 말려들지 않을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은성제약 건, 전담으로 맡아 진행하게 될 차현서입니다.”
“후…. 하필.”
먼저 건넨 인사에 조인호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기막혔다. 너 보란 듯 태연하게 구는 게 아니니 착각하지 말란 경고라도 면상에 퍼붓고 싶었다.
“하필. 대한민국에 실력 좋은 변호사 널리고 널렸는데 왜 하필, 이런 선택을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아시죠? 저 골드스톤, 아니 서 본부장님 이름 하나 믿고 목숨 건 사람입니다.”
대 놓고 하는 볼멘소리였다. 조인호 제 딴엔 불쾌감을 확실히 내보여 협박이라도 해 보겠단 심산인 듯싶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이 거래를 무효화할 수도 있다는, 뭐 그런.
그러나 턱을 모로 기울이고 귓불을 불량스레 만지작대는 서정혁의 입매엔 옅은 조소나 핏 걸렸을 뿐이었다. 네까짓 게 어디서 감히 앙알대냔 듯.
“골드스톤이 이 일에 건 돈도 조인호 씨 목숨값에 뒤질 건 아니라고 봅니다만.”
뇌까리는 저음의 어조가 다소 고압적이었다. 그 한마디 말만으로도 관계는 분명해 보였다. 아니. 그저 둘 사이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열은 명확했다. 실질적으로 누가 누구의 목줄을 쥐었는가와는 별개로, 애초에 조인호는 서정혁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조인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궁지에 몰려 하릴없이 잡은 동아줄이 하필 서정혁이라는 걸 패착으로 알아야 했다. 알고도 잡지 않을 방법은 이미 없었을 테지만.
조인호의 긴 한숨이 정적을 갈랐다. 할 말을 잃었는지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제 큰 아량을 베풀어 한 번 들어 주기나 하겠다는 듯이. 멍청했다.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이 뭔지나 제대로 아는 건지.
현서는 표정을 능숙히 숨기고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진행 방향에 대해 개략적으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했다. 만기 이후 바닥 친 채권을 매입해 최대 채권자가 될 계획 그리고 법정 관리인 지정을 시작으로 조인호를 새 대표로 추대할 최후 상황까지.
그 악랄하고 치밀한 계획에, 조인호는 퍽이나 흡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곧바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꿔 들썽거렸다. 함께 일할 상대가 불과 얼마 전 자신이 버렸던 여자라는 건 이제 안중에도 없단 듯이.
자리를 털며, 급기야는 은성제약 자선 행사 초대장까지 내밀어 왔다. 아무래도 제 약혼식과 겸하는 행사가 될 것 같단 말을 덧붙이면서. 참았던 헛숨이 터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놈과 결혼까지 하려 했던 건가 싶었다. 가진 깜냥 이상으로 욕심 많고, 아둔하고, 어리석은 놈에 불과했단 걸,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확연히 알 것 같았다. 잠시나마 쏟았던 감정이 다 허망해졌다. 그마저도 돌이키면 죄 의미 없는 것들이었지만.
조인호가 나가고 둘만 남은 공간. 무의식적인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 생각보단 쿨한 관계였나 봅니다. 내심 좀 걱정했었는데. 뭐, 분위기 나쁘지 않네요.”
느긋이 눈썹 위를 문지르는 남자의 표정이 자못 마뜩했다.
“나쁠 것도 없습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요. 저도 이번 일에 조인호가 꼭 필요하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럼 자선 행사에 아직 결정 유보한 채권자들이 많이 참석할 것도 잘 알겠네요. 괜찮겠어요? 파혼한 남자 약혼식 참석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걱정하실 일 없을 겁니다. 조인호에 대한 사적 감정, 접은 지 이미 오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핏, 조소하는 입매가 여간 밉살스러웠다.
단번에 몸을 일으킨 그가 무심히 사무실 한편의 미니바로 걸어갔다. 무채색 선반에서 위스키병을 꺼내 글라스에 주륵 따라내는 손길이 제법 익숙했다.
“한 잔 줘요? 야근할 때 마시면 집중 잘되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딱 자른 거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스키를 든 그가 현서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서자, 거대한 사무 책상이 꽤 아담해 보이는 착시마저 일으킨다. 이상한 남자.
“어젠 고생했어요. 그냥 식당 앞에 버리고 갈 줄 알았더니, 그래도 손수 집 앞까지 데려다 놓는 수고까지.”
큰 기대를 저버린 행동에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건가. 의도 모를 집요한 시선에 괜스레 입이 말랐다.
“제가 아무 데나 상사 버리고 갈 만큼 대담하진 못해서요.”
“그 아무 데나의 범주에 ‘차 안’은 포함 안 되는 게 확실하고.”
고맙단 인사를 하려는 건지, 질책을 하려는 건지 도통 애매한 어투였다. 어쩜 시비조일지도 몰랐다. 느긋이 말려 올라간 저 얄미운 입매를 보면.
덕분에 저도 모르게 다급히 변명의 말부터 터뜨리고 봤다. 오늘은 말려들지 않겠단 결심은 아직 유효했다.
“비서분껜 연락처를 몰라 연락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번 깨워도 본부장님께서 안 일어나셨고요. 제가 직접 본부장님을 업을 수라도 있었음 좋았을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아. 그래서 그렇게 내 얼굴을 빤히 봤나?”
말꼬리를 잘라먹은 얼굴과 별안 눈이 마주쳤다. 일순 나약했던 결심이 금세 산산이 부서졌다.
자고 있던 게 아니었구나.
아차 싶었다. 고작 소주 세 병에 불러도 못 깰 만큼 인사불성이 될 인간이라곤 분명 생각지 않았는데. 왜 넋을 놨던 걸까.
“하도 뚫어져라 보길래 혹시 공사 구분 못 하게 될 일 생기나 했죠, 난.”
느물대며 하는 말에도 그저 입술만 감쳐물 따름이었다. 그 반지르르한 얼굴 감상하느라, 그게 재수 없어 속으로 실컷 치미는 욕지거리 삼키느라 빤히 보고 있었단 답을 할 순 없었으니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내뱉고도 곧바로 후회를 했지만.
“죄송할 생각을 하긴 한 모양이네.”
그새 속을 읽어 낸 눈동자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바닥 아래, 글라스 잔이 빙그르 돌아가며 알코올 특유의 독한 향이 퍼졌다. 양 뺨에 열이 올랐다. 어쩐지 취할 것 같았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말려들 것만 같아 먼저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제게 인사도, 대꾸도 않는 그는 마치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를 관망하듯 느긋하기만 했다. 애초부터 공평하지 못했던 정보의 비대칭도 한몫을 했다.
그래서 더 무안하고 불쾌했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눈빛. 이미 저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놨단 듯 구는 그 오만함.
자꾸 남자 앞에만 서면 안 하던 당황을 습관처럼 하게 되고 연방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이고야 말았다. 번번이 혼자만 속을 읽혀 얼빠진 바보가 된 기분이라.
“그럼.”
그 숨 막히는 공간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남자를 마주하는 일이 점점 더 버겁단 생각이 들었다. 치미는 불길함에 애꿎은 발걸음만 더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