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본부장님.”
차를 세우고, 조수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잠든 서정혁을 불러 깨웠다. 혼자서 세 병이나 마신 사람치곤 퍽 멀쩡했던 그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버렸다. 덕분에 그의 집까지 대리 기사 노릇을 해야 했음은 당연했다.
“본부장님, 도착했습니다.”
다시 불렀지만 영 미동이 없었다. 내비에 찍힌 대로 어찌 오긴 했는데, 이 거대한 몸집의 남자를 집까지 책임질 자신은 도무지 없었다.
뭘 어떡해야 하나. 그 외국인 비서라도 불러야 하나. 연락처를 모르는데. 사내 전산망에라도 접속해 검색해 봐야 할까.
“하….”
잡스러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문득, 제 옆의 짐 같은 남자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지하 주차장의 적은 조도 속, 음영이 더해져 인상이 되레 또렷해졌다. 참 빌어먹게도 잘생긴 얼굴에 새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엔 상반된 여러 가지의 느낌이 공존했다. 감은 눈, 긴 속눈썹이 내려앉아 더 짙어진 눈매와 얇게 진 쌍꺼풀의 곡선이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를 낸다면, 굵은 선의 콧대와 적당히 각진 턱은 강인한 남성적 느낌을 줬다. 큼지막한 이목구비가 화려하기도, 다소 마른 뺨이 수척해 보이기도 했다.
천사를 가장한 악마가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거였다. 이 얼굴로 작정하고 유혹해 오면 넘어가지 않을 이가 있긴 할까. 그래서 더 악랄한 건지도 몰랐다. 매혹적인 외모 뒤에 숨겨 놨을 잔인한 본성.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절망과 지옥을 선물하고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걸까.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남자의 본성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일 거였다. 이미 오래전, 도덕과 양심 따위 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저마저도 이렇게 소름이 끼칠 정도인 걸 보면.
지이잉.
상념을 깨듯 숄더백 속 핸드폰이 울렸다.
「변호사님. 어디 계세요?」
솔의 메시지였다. 낮에 부탁했던 자료 정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그대로 운전석 문을 밀어 열고 나왔다. 집까지 직접 기사 노릇까지 해 줬으니 이걸로 됐지 싶었다. 이 정도면 부하 직원으로서 도의적 할 도리는 다 한 거니까.
또각또각. 고요한 공간에 퍼지는 구두 굽 소리가 선명했다.
***
쿵, 차 문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눈꺼풀을 떠올렸다. 조금 전까지 제 곁에서 진동하던 옅은 플로럴 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두운 윈드실드 너머, 여자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혁은 그 작은 뒤통수를 한참이나 삐딱하게 바라봤다.
차현서. 평생을 저주하고 증오했던 남자의 외동딸.
차라리 이미 죽고 없길 바랐었다. 그녀 역시 저만큼이나 불행했을 삶이었을 테니, 결코 제 손으로 단죄하지 않아도 모든 게 다 순리대로 끝이 나 있길. 그런 나약한 기대를 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버젓이 살아남아 변호사가 되고, 저 손바닥만 한 등짝에 제 아버지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악착스레 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SY 최종 부도 이후 채권자들 피해 차선엽이 사라졌을 때였다고 해요. 경찰은 당시 열네 살이었던 딸 차현서를 시설로 인계했고, 시설에선 가족을 수소문해 찾았는데 그게 차현서 작은아버지였던 차문엽이었죠. 차선엽과 차문엽은 당시 이미 연을 끊고 지냈던 사이였다는데, 희한하게도 그때 차문엽이 순순히 미성년자인 차현서의 후견인을 자처해요. 네. 뭐, 다음은 예상하시는 대로예요. 그사이 실종된 차선엽에 대한 사망이 의제♬(擬制)됐고, 차문엽은 그나마 남아 있던 차선엽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해외로 사라집니다. 당연히 차현서는 상속을 포기할 기회도 없었죠. 남은 건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뿐이었다네요.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던 모양이죠. 돈만 주면 높으신 분들 골치 아픈 일들 뒤처리는 물론이고 살인자 변호라도 서슴지 않고 한답니다. 그쪽 일로 이미 꽤나 유명한 모양이던데요. 지속적으로 거래하는 정재계 인맥도 꽤 있는 것 같고요. 어쨌든 잘나가던 중견 기업 사장 외동딸 공주님이 하루아침에 빚만 한 더미 상속받은 꼴이니, 그 여자 인생도 참 어지간한 게 아니더군요.]
레오가 차현서의 이야기를 알아 와 처음 읊었을 땐 헛웃음이 다 났다.
어이가 없었다. 그게 꼭 저 같아서.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짐을 지고, 차마 도망치지도 못하고 악을 쓰며 견디는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 제 얼굴을 보는 것만큼이나 낯익었다. 죽느니만 못한 삶에 도대체 무슨 미련이 있어 그렇게 기를 쓰고 버티는 건지.
필터에 불을 붙이고, 뒷머리를 헤드레스트에 푹 기대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와 아무 의미도 없을 복수, 허망한 분풀이 따위를 하자는 게 아니었다. 불현 한국행을 결심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사진 속 새하얀 얼굴을 맞닥뜨린 순간, 악랄한 호기심이 들끓어서.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여자를 바닥까지 망가뜨려 보고 싶단 악마 같은 본능이 인 것뿐.
궁금했다. 가면 속 여자의 진짜 얼굴이.
뿌옇게 퍼지는 연기 속, 작은 뒷모습이 아스라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
“본부장님이랑, 두 분이서만요?”
노트북을 두드리던 솔의 손이 멈칫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얼굴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내 잘못이지. 장례식장에서 괜히 뒤따라 나가선.”
정작 현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히 답했다.
“왜 따라 나가셨는데요?”
“너무 뻔뻔하고 재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욱했어.”
“와. 오죽 재수가 없으셨나 봐요. 변호사님의 그, 희박한 오지랖과 정의감을 이만큼이나 끓어오르게 한 걸 보면?”
현서는 모든 걸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심각하게 재수 없었어.”
고인 앞에 태연히 조문하던 반반한 낯짝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밥에, 술에. 그 와중에 일 얘기까지. 보통의 인간이 아님은 확실했다.
“아아. 그래서 같이 식사하셨구나.”
솔이 돌연 수긍의 제스처를 내비쳤다.
“뭐가?”
“변호사님 재수 없는 인간 좋아하시잖아요.”
좋기는, 개뿔이나.
“좋아서 간 게 아니고 불가항력. 내 목줄 쥔 인간이 밥 먹자는데 별수 있었을까.”
현서는 제 앞의 커피를 살짝 들이켜며 말했다. 그러자 솔도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그런 고깃집을 좋아하시던가요? 보이는 것만큼이나 결벽증이 심하신 것 같던데. 비서실 직원들 얘기하는 거 우연히 들었는데 와. 아주, 상상 그 이상이던데요.”
“그러게. 일부러 엿 먹이려고 데려간 건데 내가 더 당황스러웠잖아.”
“진짜 알 수 없는 분이네요.”
솔의 표현이 퍽 정확하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사람.
“저도 여기저기 소식통 동원해서 알아보려고 했었는데 사생활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시더라고요. 특히나, 월가 입성하기 전 어디서, 어떻게, 뭘 하면서 지냈는진 완전 미스터리 수준이고요. 저 외모 저 능력에 눈에 안 띄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암튼, 희한해요.”
무슨 사연이 있기에 신비주의 콘셉트인 건가 싶었다. 어떤 말 못 할 과거가 있기에 이렇게나 철통 보안인 건지.
“그래서 더 소문만 무성해요. 눈에 띄게 잘났겠다, 캐릭터 확실하겠다, 남 말하기 좋은 사람들이 딱 씹고 뜯기 좋은 먹잇감이죠.”
모니터 속 자료를 바라는 보고 있었으나 신경은 온통 솔의 얘기에 쏠려 있었다. 알 수 없는 남자의 무성한 소문이라. 그 내용이 궁금해서였다.
“살인 전과가 있단 썰부터, 한때 갱단 소속이었다,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 등등. 염문설도 무지 화려하고요. 할리우드 여배우부터 모델, 대학교수, 정치인, 기업인, 심지어 유부녀였던 하원 의원하고까지 스캔들이 났었어요. 아주, 화려하다 못해 스펙터클하던데요. 직종, 인종, 나이, 성별 싹 다 불문. 심지어 게이란 얘기도 있어요.”
전과자. 갱단. 정신병자. 여성 편력자. 게이.
그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것 같긴 했다. 껍데기만 대입한다면 일견 다 수긍이 갈 법한 단어들이었으니까.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지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핸드폰이 울었다. 솔이 먼저 액정을 확인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JK의 김 실장이었다. 아직 채 마무리되지 않은 장기용의 일로 전화한 게 분명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변호사님. 다름이 아니라 이사님께서 꼭 변호사님과 통화를….
- 아, 차현서 변호사님?
김 실장의 말이 잘리고, 웬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네. 차현서입니다.”
- 이번에 내 일 처리하고 계시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 수고가 많으시네?
장기용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무례하고, 건방진 인성이 충분히 느껴졌다. 취한 건지, 발음이 좀 부정확하기도 했고.
- 고생하시는데 변호사님 밥 한 끼 사드려야겠다 싶어서. 언제 시간 돼요?
가능하면 마주치기 싫고, 말려들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다. 이런 인간을 위해 일하고 변호해야 한다는 게 엿같은 기분이 들 만큼.
“아뇨. 괜찮습니다.”
- 뭐가 괜찮은데?
“사모님께 사례 충분히 받고 진행한 일입니다. 이사님께서 따로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 아니. 내가 변호사님 얼굴이 좀 보고 싶다니까?
거절 의사를 명확히 하자 그는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장 회장 내외는 어쩌다 아들 둘 모두를 이따위 인간쓰레기로 양육한 건가. 첫째 아들 뒤치다꺼리로 이미 진을 뺄 만큼 다 빼 봤던 그녀였다. 겨우 좀 수습이 되려나 싶었는데 이젠 둘째 아들이 돌아와 사고를 치기 시작한 거였다.
현서는 간신히 인내하듯 눈을 질끈 감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들에게 자신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개일 뿐이니. 그래도 어쨌든 이 쓰레기들 덕분에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될 수 있음 안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놈은.”
솔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JK 막내아들 소문이 어디 보통 추접스러웠던가.
“이것도 불가항력. 더러워도 어쩔 수 있나. 돈 벌라면 더러운 거든 뭐든 만지는 거지.”
현서는 흐르는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깊게 한숨 쉬었다.
“그런 거 잘 만진다면서요. 더러운 거.”
불현 누군가의 조롱이 또렷이 떠오른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