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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9화 (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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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은 크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사모 펀드 골드스톤의 한국 지사장이었다는 명성이 무색하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규모였다. 그의 명함에서 ‘골드스톤’이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간 순간, 많은 누군가들에겐 더 이상 볼일 없는 존재가 됐단 뜻이기도 했다.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없건만 참으로 무정한 세상이었다.

현서는 조문을 마친 뒤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지사장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직원들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죽은 지사장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는 아무래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며 더 괴로워했을지도 몰랐다. 이제 와 아무 의미도 없는 추측이겠지만.

“어머, 저기.”

문득 입구 쪽을 향해 앉아 있던 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일순 식장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으로 서정혁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상주가 대뜸 다가가 거칠게 멱살을 쥐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여기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주위 남자 몇 명이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흥분한 상주를 뜯어말렸다.

그러나 정작 서정혁의 얼굴은 태연했다. 이런 일쯤 다 예상했던 바라는 듯. 사람들이 남자를 떼어 내자, 그는 흐트러진 셔츠 깃을 툭툭 털어 내며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까지 했다.

파렴치하고, 뻔뻔했다.

결국 오열하던 상주가 홀로 흥분해 쓰러졌다. 누군가가 부른 구조대가 와서 쓰러진 상주를 실어 갔고, 곧이어 커다란 근조 화환이 들어왔다. ‘라이언 서’라 적힌 흰 리본을 펄럭이면서.

그 소란에도 서정혁만 동요 한 자락이 없었다.

지켜보던 모든 이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대단한 분이시네.”

무슨 생각으로, 무슨 낯으로 여길 왔을까. 도통 속 모를 사람임을 알지만, 괜스레 부아가 났다.

그래서 그를 따라나섰다. 누구라도 대신해 항의를 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부장님.”

차에 오르려던 그가 멈칫하며 돌아봤다. 먹이라도 발견한 듯, 짙은 눈썹이 슬몃 들썩였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잘 만났네. 타요.”

대뜸 조수석 문을 열어젖히는 그를 보며 멍청히 섰다. 태연히 미소 짓는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타라니까.”

하려던 말조차 잊게 만드는 인간.

“말 참 안 들어, 당신.”

머뭇거리는 순간 손목이 채였다.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도 아니었는데 그에게 끌려가듯 차에 탔다.

곧이어 옆자리에 그가 앉았다. 특유의 사치스러운 스킨 냄새가 차 안 가득이었다. 짐승이 제 영역 표시를 하듯, 제 영역을 분명히 하겠단 건가. 습관처럼 숨이 막혔다.

“뭐 먹을래요. 부디 채식주의자만 아니면 좋겠는데.”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자는 건 아니고. 이왕이면 좀 먹으면서 얘기하죠. 차 팀장님도 나한테 할 말 있어서 쫓아 나온 거잖습니까.”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는 굵직한 손가락에 걸린 반지가 번뜩 빛을 냈다. 무례하다. 일말의 미안함과 죄책감이라곤, 아니, 사소한 후회조차도 없는 얼굴이 그악스러웠다.

“여기는 뭐하러 오셨어요?”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왔습니다만.”

뻔뻔함에 기가 찼다.

“일부러 들쑤시러 오신 건 아니시고요.”

“안타깝지만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전혀 예상 못 했다고까진 말 못 하겠지만.”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제스처는 누가 봐도 썩 밉살스러운 것이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 질 낮은 비난이 절로 곱씹어지고야 만다.

있는 대로 노려보는데도 그는 느긋이 웃을 뿐이었다.

“유가족 대신해서 내 멱살이라도 다시 잡으러 온 건 아닐 거니까.”

커다란 손이 불쑥 현서의 목덜미를 스쳐 지났다.

“이쯤하고 벨트 맵시다.”

주욱, 그의 손가락에 길게 딸려 나온 벨트가 허리 아래에서 달칵 채워졌다. 잠시 스쳤을 뿐인 남자의 체온에 솜털이 쭈뼛 솟았다.

재빨리 시선을 피해 반대로 돌렸다. 이 당황스러움을 알 리 없는 그는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액셀을 밟는다. 고급 세단이 빈 도심 숲으로 매끈히 미끄러져 나갔다.

“은성제약 서류들은 좀 검토해 봤습니까? 채권 매입 시기를 좀 당겨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불가능해 보이진 않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매번 이렇게 속을 읽히고야 마는 게 억울했다. 결국 또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 줄 수밖에 없단 것도.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근데, 아마 매입 시도하는 순간 조 회장이 눈치챌 겁니다. 일단 시작하면 생각할 여유도 주지 말고 몰아붙여야 할 거고요.”

“같은 생각이군요, 나랑.”

웃는 목소리가 조롱을 가득 머금었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지금 이 허기에, 서울에선 뭘 먹어야 하는지.”

“…네?”

“맨날 똑같은 호텔 레스토랑 지겨워 죽겠으니까.”

이 상황에 지금 이런 헛소리가 잘도 나오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인 인간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미친놈.

차마 내뱉지 못한 욕을 집어삼키며 전방을 응시했다.

“저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

“뭔데요.”

“육식주의자이신 것 같아서요.”

“역시. 눈치도 빠르고.”

핏 웃는 얼굴을 흘겨 응시하다 문득 다시 핸들을 쥔 손등에 눈이 갔다. 이번엔 요란하게 번쩍이는 반지나 시계 따위를 보는 게 아니었다.

커다란 손등 위, 어딘가에 찢겼던 흉터가 있었다. 몇 번이고 손을 내밀 땐 못 봤었는데, 이런 끔찍한 상처가 있었던가. 화려함에 눈이 팔려 미처 보지 못했다. 깨진 적도 없는 유리처럼 고매해 보이기만 하는 모습관 영 어울리지 않게 흉한 이 상처 자국을.

“여기예요.”

통보하듯 말하고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온통 남자의 묵직한 향으로 가득한 차 안 공기가 숨 막히게 부담스러워서였다.

“자주 와요?”

허름한 식당 앞에 선 그가 저를 내려다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그러곤 곧장 담배를 입에 물고 한 손으로 불을 붙였다. 긴 호선이 걸린 입술 새로 긴 연기가 아스라이 퍼져 나갔다.

뭘까. 쉼 없이 헷갈렸다. 여전히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다 자신할 만큼 오만하고, 자신 때문에 자살한 이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화환을 던질 만큼 잔인한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천진한 표정을 짓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굴까.

문득 알고 싶어졌다. 호기심이 빗발치듯 일었다. 악마인지, 아이인지. 구원일지, 악몽일지. 혹은 인연인지, 악연일지.

“친한 사람들이랑 오는 단골집이에요.”

“아. 그럼 이제 나도 차현서 씨랑 친한 사람?”

방심하면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의 너스레에 할 말을 잃었다.

식당 안은 고기 연기로 자욱했다. 낡고 허름한 고깃집의 풍경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치스레 차려입은 남자의 모습이 퍽 이질적이었다.

“하실 말씀, 있으시다면서요.”

불편하고 껄끄러워 바로 본론을 물었다. 마주 앉아 다정하게 밥이나 먹을 사이는 아니잖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가 픽 웃었다.

“2주 뒤에 정기 주총 있습니다. 그날 저녁에 조 회장이 채권단 모임을 따로 잡았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다음 주말에 시간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좋군요.”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 얘기 하자고 밥까지 먹자고 한 건가, 어이가 없어졌다.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우는 그의 손놀림이 제법 익숙했다. 한번 신경 쓰이기 시작한 손등의 상처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현서는 애써 관심 두지 않으려 시선을 거두고 음료수 잔을 들었다.

“와인은 잘 마시던데, 소주는 안 마셔요?”

“소주, 좋아하시나 보네요.”

“없어서 못 마시죠. 맨해튼 한인 마트에선 여기 가격에 열 배쯤 하는 비싼 술이거든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최고급의 와인이나 위스키가 아니면 쳐다도 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소주를 반가워하고, 송아지 스테이크도 거위 간 요리도 아닌 고작 돼지 삼겹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먹는다. 이렇게나 세상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이 미친놈은 사람 죽여 놓고도 어떻게 이렇게 태연한 얼굴로 밥이나 먹나.”

“…….”

“뭐,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얼굴이네?”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저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느긋했다. 또 속내를 읽힌 게 억울해 애써 태연한 척 대꾸를 해 봤다.

“어쨌든.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아. 그 사람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해서?”

“적어도 도의적 책임이 없진 않으시잖아요.”

솔직한 대답에 그가 핏,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실적이야 어쨌든 그래도 평생을 몸 바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났는데. 하등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그 좌절감. 낙담. 절망감. 최소한 그건 감정들을 공감할 순 있죠, 누구나. 반사회적 성격 장애가 아니고서야.”

아니. 솔직함을 빙자한 비난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딱히 되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그대로 말을 이었다.

“물론 민심 얻어 선거 나갈 일도 없으시겠고, 자선 사업 하는 분도 아닌 거 잘 압니다만, 굳이 보태지 않아도 될 비난까지 받을 이유는 없지 않나요?”

“내 걱정해 주는 겁니까?”

되묻는 그 목소리엔 별다른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대표의 평판도 기업의 자본이니까요. 제가 몸담은 회사에 대한 걱정이기도 합니다.”

“생각보단 꽤 감정적인 타입이시네.”

매끈한 얼굴이 대 놓고 조소를 했다.

“감정 가지고 일하면 나랑 오래 못 갈 텐데.”

시선이 마주친 것뿐인데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협박인 걸까, 경고인 걸까. 그도 아니면,

“공사 구분 잘하는 거 맞아요?”

유혹인 걸까.

“불안하네요. 어쩐지 차 변호사님이랑은 자꾸 공사 모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라.”

서정혁은 위험스럽고도 불량스러운 눈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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