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어차피 자기 힘으로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 보려는 발버둥이죠. 못 가질 거면 파괴가 낫겠단 어리석은 판단. 뭐, 그런 거.”
서정혁의 말에 틀린 건 없었다. 조인호는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리석은 인간이었고, 서정혁은 그 어리석음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것뿐이었다. 다만 이 어이없을 만큼 당황스러운 우연이 못내 껄끄럽고 불편해졌을 뿐이다.
단 한 번을 꼬이지 않고 제대로 가는 법이 없는 인생. 스스로도 진절머리가 났다.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탓인가. 또 머리가 지끈댔다. 고질적인 두통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차현서 님.
원금·이자 일시 상환 완료.
잔여 상환액: 0원」
액정 속, 여전히도 현실감 없는 활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 빚을 청산하고 새로 얻은 또 다른 빚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차 변호사님이 그런 거 잘 만진다면서요. 더러운 거.”
그를 대신해 만져야 할 더러운 거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50억을 대가로, 얼마만큼 개처럼 부려져야 이 돈값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목숨값이라 해도 과한 금액이 아니던가.
서정혁, 그가 무얼 바라 이 거액의 돈을 선뜻 던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의도가 점점 더 두려워졌다.
해방된 기분 대신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과 찝찝함이 밀려드는 것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데, 카페 문이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차선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딸의 얼굴을 발견한 그가 좌우를 두리번대며 다가왔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제 모습을 들키진 않을까 하는 초조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렇게 대낮에 사람 많은 곳에서 딸을 만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어쩌자고 이런 데서….”
불안해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오랜 도피 생활로 늙고 야위긴 했으나 썩 나쁘진 않은 모습이었다.
“좋아 보이시네요.”
다행이라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안부를 묻거나 말 못 할 그의 어려움이 걱정스러워 한 말은 더더욱 아니었고.
수십 억의 빚만 유산으로 남긴 아버지를 진심으로 염려할 만큼, 착하고 유순한 딸이 못 되는 까닭이었다.
“잘 지내신 것 같네요. 다행히.”
오히려 썩 나쁘지 않은 모습의 그가 내심 못마땅해서였다. 당신이 남긴 빚을 갚으려 또 어떤 다른 빚을 만들어야 했는지 알기는 하느냐고.
“넌 어째 더 말랐어.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긴 하는 거냐? 조인호 그놈하고는 정말로 완전히….”
“이거요.”
파혼 얘기를 꺼내는 아버지의 말을 끊고, 서류 봉투를 그 앞에 내밀었다.
“열어 보세요.”
평소와 다른 딸의 표정을 의아하단 듯 바라보던 차선엽이 받아든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냈다.
“실종 선고 취소 청구….”
제목을 읽은 그의 시선이 곧장 다시 돌아왔다. 이게 뭐냐는 뜻이었다.
“작성은 다 했으니까 도장만 찍어서 그대로 법원에 제출하세요. 제출도 제가 하려다, 그래도 아버지가 직접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요.”
“뭐냐, 이게 다.”
상환 완료라 적힌 핸드폰 화면을 넘겨 보여 줬다. 차선엽의 표정은 외려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 빚 다 갚았어요, 아빠.”
쉽게 믿을 수 없을 말을, 계속해서 차분히 이어 갔다. 아버지가 현재의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도록.
“깨끗이 청산했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뭐?”
“빚. 50억. 그거 다 끝났다고요.”
“…이게 대체, 무슨….”
“그니까 아빠도 더 이상 죽은 사람으로 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얘기를 듣는 차선엽의 거친 손이 벌벌 떨려 댔다. 놀람과 기쁨. 혼란스러움과 슬픔. 그리고 미안함. 그는 여러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복잡한 얼굴빛으로 되물었다.
“자세히, 좀,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 봐. 네가 갑자기 그 큰돈이 어디서 생겨서 빚을 다 갚았다는 거냐.”
더듬더듬, 당황한 목소리가 떨리고 뭉개졌다.
“스카우트 제의받아서 좋은 조건으로 이직했어요.”
“아니, 아무리 이직을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 큰돈을…. 말이 안 되잖아.”
차선엽은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반응이 이해는 갔다. 저 역시 여전히 안 믿기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혹시, 너 무슨….”
“아뇨.”
아버지가 무슨 의심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먼저 말을 끊었다.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그런 거.”
“현서야.”
“걱정 마세요. 이상한 대가로 받은 돈 아니고, 불법적인 돈도 아니니까. 자리만 옮긴 것뿐이에요. 지금까지랑 다를 거, 하나도 없어요.”
“…….”
“살면 돼요. 그냥.”
스스로에게 하는 위안이기도 했다. 이 근원 모를 불안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한.
“이제 산 사람으로 사세요, 아버지도.”
살라는 말에 부르르 떨리는 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차선엽은 서럽게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것처럼 살아왔던 그에게, 삶이란 무슨 의미였을까. 자신을 죽이고 딸을 희생시켜서라도 지켜야 했던 미련이었을까, 헛된 욕망이 만들어 낸 괴물 같은 오기였을까.
차라리 당신이 죽기를 바랐었던 이 악마 같은 마음을, 그는 짐작이나 했었을까.
하염없이 울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차선엽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먼저 카페를 빠져나왔다.
아버질 더 마주하고 있는 건 확실히 무리였다. 원망과 연민. 그 어디쯤 떠도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색하며 구질구질해지고 싶진 않았다. 이제 와 손 맞붙잡고 앉아 울며 회포를 풀 것도 아니므로.
바쁜 발걸음을 재촉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들어서자, 솔이 기다렸다는 듯 요청한 자료를 잔뜩 들고 쫓아왔다. 그런 그녀가 반갑고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니었다면, 제어하지 못한 감정이 삐죽이며 못나게 새어 나와 버리고도 남았을 참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 건….”
솔이 은성제약 건의 자료를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
“뭐가?”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괜스레 되물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구태여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별 의미도 없는 오기였지만.
“하필이면 이 시점에, 왜 또 하필이면 이 회사여선…. 괜히 조인호 씨랑 또 얽혀서 괜히 더 복잡해지시는 거 아니냐구요.”
“복잡해질 게 뭐 있어. 이미 다 끝났는데, 심플하게.”
심드렁한 말에도 솔은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제가 구질구질한 거예요, 변호사님이 지나치게 쿨한 거예요? 아무리 마음이 없는 남자였어도 그래도 결혼하려던 사람인데. 정말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억울하고 화나고 슬프고, 그런 감정 안 느끼세요?”
“별로.”
무심한 얼굴로 자료를 뒤적이며 부정했다.
“끝난 일에 괜히 감정 소모해서 뭐해? 일할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그러게요. 제가 또 쓸데없는 걸 걱정했죠.”
“그래. 알면 이 자료 하나만 더 부탁하자.”
명부의 주주들 중 최근 지분이 늘어난 사람들만 리스트 업 해 분류한 개인정보 자료였다. 적혀 있는 기본적인 사항 외 더 자세한 정보를 알아봐 달라는 뜻이었다.
아무렴요. 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렇게 사무실에 오후 내내 틀어박혀 서류를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관자놀이를 쿡쿡 쑤시던 두통이 더 심해지고 있었다. 참다못해 약을 챙겨 일어났다.
어느새 텅 비어 버린 컵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직원들이 어색하게 묵례를 해 왔다.
어쩐지, 수군덕대는 직원들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무슨 일 있어요?”
두통약을 집어삼키고 돌아서며 무심히 물었다. 퍽 낯이 익은 얼굴의 직원 하나가 아직 모르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음 소거된 채 틀어진 티브이 화면을 가리켰다.
시선을 옮기자 고딕체의 자막이 단번에 읽혔다.
사모 펀드 골드스톤 前 한국 지사장 김영진 씨,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뜻밖의 뉴스였다. 미간을 모으며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다.
하루아침에 해임을 당한 뒤 신변을 비관한 자살로 추정된다고 했다. 하나뿐인 유족인 아들이 부검을 거부해서 곧장 사건 종결 처리가 됐다고.
“자살은 무슨. 타살이지.”
누군가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뻘이나 되는 어린놈한테 그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으니. 들리는 말로는 따로 찾아가 통사정하고 빌기까지 했다던데. 저 아들이 시한부라잖아요. 아마 암이라던가. 하여튼 진짜 잔인하네요.”
서정혁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직원들은 분명 새 지사장인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새로 발령받은 후 그 짧은 며칠 새에도 사내엔 피바람이 불었었다. 그간 전 지사장이 바닥을 쳐 놓은 실적을 끌어 올려야 한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아무도 대 놓고 토를 달지도 못했다. 칼 앤더슨이 이러라고 보내 꽂은 라이언 서였으니까.
“어휴, 뭐가 어떻게 돌아가려는 건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이 든 직원이 툭툭, 탄식한 직원의 팔을 쳤다. 그제야 다들 말을 아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현서를 의식하는 거였다. 어쨌든 차현서도 새 지사장이 스카우트해 온 낙하산 법무팀장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그, 이따 퇴근하고 다 같이 장례식장 갈 건데. 팀장님도 같이 가실 거죠?”
괜히 화제를 돌리며 질문하는 직원의 미소가 퍽 어색했다. 조금 전 자신들의 모든 말을 잊어 달라 애원이라도 하는 듯했다.
“네. 같이 가겠습니다.”
혼란한 내심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탕비실을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