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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열흘 남짓이 지났다. 빚은 자리를 옮김과 동시에 곧바로 깔끔히 청산을 했다.
허탈했다. 그 많던 빚을 이렇게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게. 지긋지긋한 빚, 다 갚고 나면 해방감이라도 느껴질 줄 알았었는데 예상외로 덤덤한 기분이라 당황스러웠다. 빚도 돈도, 다 현실감이 없어서겠지.
골드스톤에서의 직함은 법무팀장이었다. 예상한 대로 모든 조건은 최상이었다. 업계 톱 티어라 불리는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들도 이런 대우는 쉽게 받지 못하지 싶을 만큼 파격적이었다. 모든 게 다 처음, 서정혁이 약속한 그대로였다. 사실 그래서 더 불안한 것도 맞았다.
물론 팀원을 꾸릴 새도 없을 만큼 일은 많았다. 들인 돈 만큼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겠다는 심보인 건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순식간에 열흘이 지나 있었다.
되레 고맙긴 했다. 덕분에 머리 복잡한 생각할 여력도 없어서.
“괜찮으세요?”
조수석에 앉아서도 계속해 업무 자료를 넘겨 보는 현서에게 솔이 대뜸 괜찮냐 물었다.
솔의 눈엔 주변에서 무어라 수군대든 말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무섭게 일에 집중하는 현서가 신기하기도, 대단하기도 해 보였다. 4년째 함께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운 건 좀 고달팠지만.
“뭐가?”
“자리 옮기고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요.”
“받은 만큼 일을 더 해야겠지. 아니면 솔이 네가 일 줄여 달라고 나 대신 항의라도 해 줄래?”
농담 섞인 현서의 추궁에 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저는 아주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솔의 긍정적 의견 표명에 핏 웃음이 터졌다. 현서가 자리를 옮기며 비서인 그녀의 연봉 또한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그냥 변호사님 걱정돼서 하는 말이죠. 돈도 좋고 일도 좋지만 사람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리고 먹을 땐 좀 먹어 가면서 하시고요. 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짧은 점심시간이 끝난 시각이었다.
“도대체 그거 먹고 어떻게 버티세요? 아까도 고작 세 숟갈 먹고, 깨작깨작. 계속 서류만 보시고.”
걱정인 양 했지만 결국 식당에서 내내 일 얘기만 떠들어 댄 것에 대한 항의도 섞인 거였다. 몇 년째, 자는 시간 빼고 하루종일 붙어 있다시피 하는 윤솔을 왜 모르겠는가. 모르는 것 빼고 다 아는 사이인데.
작게 웃으며 미안하다 답을 하려는데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던 현서의 입가에 미소가 싹 가셨다.
탑승을 거부하듯 절로 몸이 굳었다. 익숙한 향이 훅 밀려들었다.
“안 타요?”
엘리베이터 안에 서정혁이 서 있었다. 그날, 그러니까 H 호텔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 이후 처음 보는 거였다.
그날 이후, 예정된 절차대로 인사팀과 날짜를 조율해 첫 출근을 했고, 며칠 전에는 임명권자인 김영진 지사장이 갑자기 해고됐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차기 지사장에 대해 각종 추측과 소문들만 무성하게 나돌아 사내 분위기가 꽤 흉흉한 상황이었다.
잘은 몰라도, 라이언 서가 한국에 들어온 건 뷰티큐브 인수 건의 최종 마무리 확인을 위해서라 알고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본부장은 곧 홍콩으로 돌아갈 거라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었고. 그래서 더는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또 맞닥뜨린 얼굴이 썩 달갑지 않았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마주친 눈빛이 불순하게 번뜩거렸다. 얼마 먹지도 못했던 음식이 체하는 듯 불편한 기분이었다.
“타요.”
“아뇨, 먼저 올라가시….”
“타라니까?”
거절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서정혁은 버튼을 고집스레 누른 채 명령했다. 빙긋이 웃기까지 하면서.
역시나, 재수가 없다.
결국, 옆에 섰던 솔이 쭈뼛대며 현서의 팔짱을 잡아끌었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사각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시간이 지나치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시공이 멈춰 버린 듯한 악몽에 시달리며 간절히 빌었다. 제발 더는 아는 척 말아 주기를.
“적응은 좀 했어요?”
기어코 뒤통수에 내려앉는 남자의 목소리에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했던 표정을 지우고 태연함을 가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열심히 적응 중입니다.”
그가 음흉하고 능청스럽게 웃는다.
“다행이네요,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여서.”
땡.
드디어 청량한 차임 소리가 정적을 깨고, 가라앉은 공기를 갈랐다. 12층, 법무팀 사무실이 있는 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를 향해 슬몃 묵례를 하고 나갔다.
“잠깐 내 방에서 얘기 좀 하죠?”
다시 돌아보며 무슨 뜻이냐 되물으려는데,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나 방금 지사장으로 겸직 발령받았어요.”
예상치 못했던 소리였다. 당황스러웠다. 거론되던 차기 지사장의 이름에 서정혁이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던 터라.
머뭇거리자 그가 또다시 재촉의 눈빛을 보내왔다. 하릴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함께 14층으로 향했다.
지사장실과 그 비서실이 있는 꼭대기 층. 널따란 공간이 며칠 새 완전히 바뀐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꽉 채워져 있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심플하고 간소하다 못해 텅 빈 회색빛으로 변한 집무실은, 열흘 전쯤 봤던 것과는 확연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 다 이렇게 바꿔 놓은 건지.
사방이 휑했다. 그저 벽에 걸린, 짙은 녹색 빛의 마크 로스코 그림 한 점만 그 차가운 공간을 메우고 있을 뿐.
이런 게 이 남자의 취향인 건가. 그런 거라면 퍽 어울리긴 했다. 전체적으로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내가 별로 안 반가운 얼굴이네요?”
소파에 앉은 그가 긴 다리를 꼬며 쳐다본다. 반갑긴커녕 그저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대꾸할 뻔했다. 이렇게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숨이 콱콱 막히는 기분이라서.
“갑작스러워서요. 지사장님으로 다시 뵐 줄은 몰랐어서.”
“서운하네요. 나는 기대를 많이 했는데.”
“…뭐를, 요?”
“우리 같이 일하는 거요.”
역시 모호했다. 놀리는 건가, 조롱하는 건가. 그도 아니면,
“설레서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요, 차현서 팀장님 얼굴 볼 생각에.”
그저 악랄함인가. 번지르르한 얼굴의 입꼬리가 설핏 올라갔다. 도무지 의중을 짐작할 수도 없을 그를 마주하며, 가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제 정말 꼼짝없이 마주치며 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다. 제 손으로 제 목줄을 넘겨줬으니, 달리 더 할 말도 없었다.
그가 핏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태블릿을 향해 턱짓을 했다.
“한번 봐 봐요. 그걸로 짐 좀 풀어 볼까 하는데.”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터치하자 예상치 못한 문서가 팝업됐다. 놀란 눈을 부릅뜨고 다시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이게 왜….”
은성제약 인수 합병 계획에 대한 내부 문서였다. 조인호의 아버지 조기문 회장의 회사, 바로 그 은성제약 말이었다.
신약 개발 건으로 채무가 많긴 했어도 매각을 고민할 만큼의 자금 사정은 아닌 걸로 알았다. 일시적인 자금난 따위 얼마든지 자력으로 해결 가능한 조 회장이기도 했고 말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관찰하듯 저를 보던, 그 집요한 시선과 다시 맞부딪혔다.
도대체 뭔가, 이 남자. 먹이를 던져 놓고 반응을 살피기라도 하는 것 같은 이 표정은.
“돌아오는 채권 만기일 연장 요구를 거부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로는, 불가능할 텐데요.”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조기문 회장은 다른 계열사를 매각하는 일이 있더라도 제약만은 포기 못 할 사람입니다. 게다가, 아시겠지만 곧 신약 시판이 목전인데 채권단에서도 순순히 매각에 동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채권단 대부분이 조 회장에 매우 호의적인 사람들이고요.”
“네. 그래서 우리가 최대 채권자이자 과점 주주가 될 겁니다.”
물론 모르지 않는다. 라이언 서가 마음만 먹으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회사 하나쯤 무너뜨리는 거, 일도 아니라는 거.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고작 이 작은 제약 회사 하나를 먹겠다고 그런 수고까지 더하겠다는 건가. 도대체 왜.
“하필 은성제약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무리하게 인수해서 그 이상의 수익을 낼 만한 회사로 보이진 않는데요. 시판 앞둔 신약도 그냥 흔한 간염 치료제 중 하나인….”
“그냥 흔한 간염 치료제가 아니라.”
그가 말을 끊어 왔다.
“파킨슨병 근육 마비 속도를 현재 시중의 치료제보다 최대 0.7배까지 늦출 수 있는 치료제라면, 어떻습니까?”
그제야 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은성제약을 타깃 삼은 것인지를 알 것 같았다. 아무도 맡지 못했던 돈 냄새를, 서정혁 혼자서 맡은 거였다. 만약 또 누군가가 알고 있었다면 이미 주가는 요동을 치고도 남았을 일이니.
“그걸, 어떻게 아셨는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정보의 출처까지 제가 팀장님께 보고해야 하는 겁니까?”
“보고가 아니라 공유 부탁드리는 겁니다. 일 진행하려면 저도 알아야 하니까요. 이 사실을 오너나 이사들도 알고 있는지, 모른다면 외부자도 알고 있는 걸 왜 아직도 파악 못 한 건지.”
“내부자 조인호가 아직 파악 못 해서 안타까운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은 아니죠?”
무슨 뜻이냐, 되묻듯 그를 노려봤다. 집요하게 저를 훑는 눈빛에는 분명 뜻 모를 의도가 어려 있었다. 제 속을 샅샅이 꿰어 보려는, 질 나쁜 의도.
“왜요, 헤어진 남자 때문에 좀 껄끄럽습니까?”
“네?”
“그래요. 헤어졌어도, 뭐. 안타까움, 미련 이런 건 남았을 수 있죠.”
꼭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하고 있었다. 네 하찮은 감정 따위, 지극히 우습지만 봐주겠다는 듯한 태도. 도무지 불쾌하지 않을 수 없어 연방 입술을 사리물었다. 뭐 이런 망종이 다 있는지.
“어쩌나. 조인호도 이런 차 변호사님 마음을 알면 좋으련만.”
“본부장님. 죄송하지만 공사 구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기야, 안다고 달라질 건 없겠죠.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아버지, 형 뒤통수 때릴 수 있는 사람이던데요, 당신 전 약혼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정보 출처가 조인호입니다. 주주들이 매각 결정할 수 있게 여론몰이도 하고 자금줄 막아 가며 우리 일 도와줄 파트너라고.”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놀란 눈을 치켜뜨며 그를 응시했다. 일 때문에 조인호와 만났었다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정말, 이에요?”
“많이 놀란 얼굴이네. 결혼할 사이였다면서, 진짜 아무것도 못 들었나 봐요? 이상형이 공사 구분을 잘하는 깔끔한 타입이신가 보구나, 우리 팀장님이.”
열등감이 있단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아버지와 형을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가진 욕심만큼의 능력은 확실히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잘됐네요, 그럼. 공사 구분 잘해서 완벽한 일 처리 부탁합니다.”
서정혁이 웃는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선, 저를 올려보는 잘난 얼굴이 얄밉도록 우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