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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마주 앉은 남자의 얘기가 지겨워지던 찰나였다. 정혁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짙은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빈 와인 잔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차현서가 제 앞에 앉아 붉은 입술로 삼켜 대던 와인잔이었다.
“본부장님?”
지금 보고를 듣고는 있는 건가. 문득 머쓱해진 지사장이 말을 멈추고 정혁을 재차 불렀다.
“네. 듣고 있습니다.”
그제야 미동 없던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이며 움직였다.
“계속하시죠.”
“아…. 네. 그래서 일단은 마지막 임상이 끝날 때까지 채권 만기일을 연장해 주는 것으로 구두 합의를 한 상태입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문득 돌아온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서늘한 눈동자를 깜빡이는 그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질 않는다.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김 지사장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몇 년 전 싱가포르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는 서정혁이 어떤 인간인지 알 만큼은 알았다.
“지금 3상 최종 리포팅 단계라더군요. 끝나는 대로 시판도 최대한 빠르게 진행 가능하겠다고 확언을 했습니다.”
“아. 그래서 자의로 넓은 아량을 베푸셨다.”
“일단 시판만 시작하면 상환 능력은 충분해 보입니다. 그간 이자 연체도 없었고요.”
먹히지도 않을 눈먼 애원이 기가 막힌 듯, 정혁은 기어코 헛숨을 터뜨리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지사장님.”
“…네.”
“제가 왜 한국에 왔는지 알고 계시죠.”
모를 리 없었다. 해를 거듭하며 규모를 키우고 있는 한국 시장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본사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 전에 본부장인 서정혁의 의견이기도 했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는 분이 이러시면 안 되죠. 고작 6개월 치 이자.”
코웃음을 치며 제 앞의 상대를 조롱했다. 냉랭해진 분위기에, 못해도 그의 큰삼촌뻘은 될 늙은 남자가 식은땀만 흘리며 눈치를 살핀다.
“그 푼돈 벌어서 얻다 쓰시게. 애들 과자 사 주실 건가요?”
“본부장님.”
“시판 후에는요? 수익 나면 한 푼도 빠짐없이 우리 골드스톤에 그대로 갖다 바친다고 약속이라도 받아 두셨습니까? 수익으로 채무 털고, 팽하고. 언제 구걸했냐는 듯이 이제 볼 장 다 봤으니 꺼지라고 내쫓기나 하겠죠. 설마 우리 목표가 채권 회수라고 착각하신 거 아니죠, 김영진 지사장님?”
무섭게 쏘아붙이자, 지사장의 얼굴이 시허옇게 굳는다.
“그런 게 아니라, 본부장님.”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말을 이어 갔다. 눈치가 없다 못해 감이 없는 거였다. 멀찌감치서 상황을 지켜보던 레오만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본부장님께선 한국 사정을 잘 모르시니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미카엘 측에서 자사로 운영하고 있는 미카엘 재단이 워낙 자선, 봉사 NGO로 알려진 곳입니다. 역사도 오래됐고 한국 사회에서 명망도 높습니다. 모기업이 도산하면 재단에 타격이 안 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진행 중인 복지 사업부터 당장 올 스톱입니다.”
“네. 그렇겠죠.”
고저 없이 무감한 대답에 지사장이 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본부장님. 이건 본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단 꽤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요. 어쩌라는 겁니까.”
“정부나 다른 시민 단체들도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게, 현재 미카엘에서 후원하는 결손 가정 아이들만….”
“아. 예상보다 심각하시네.”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손을 내보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잔뜩 긴장한 지사장 앞에 다가서 불량스레 주머니에 한 손을 푹 찔러 넣었다.
“지사장님, 대체 언제부터 나 몰래 자선 사업하고 계셨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로 들리는데요.”
결국 할 말을 잃은 지사장이 입을 닫았다.
“좋습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실상은 그 과잣값도 제대로 못 벌어 오셨잖습니까, 지난 2년간. 한국 지사만 평균 투자금 회수율이 한 자릿수였습니다. 아시죠?”
스스로도 예감했던 상황이었기에 그는 더 대꾸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결국 올 게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그래도 지사장님이 책임감 하나는 확실한 분이시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오래 버티셨네요.”
진심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정혁은 그만 나가 달란 듯 저 멀리의 출입문을 향해 턱짓했다.
지사장은 절망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서정혁이 제 애원을 들어줄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아는 듯해 다행이었다.
[진짜 지사장 겸직을 하실 생각이세요?]
어느새 다가온 레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네 일 더 늘어날까 봐 걱정돼?]
[그게 솔직한 심정이죠.]
[이렇게 내일 없이 사는 비서를 나 아니면 누가 써 주지?]
농담 같은 진담을 내뱉으며 겉옷을 챙겨 들었다.
얼결에 밤 풍경이 고스란한 유리창 쪽으로 돌아서다 하늘을 봤다. 조각난 빛의 꼬리가 밤하늘을 길게 갈라 떨어지고 있었다.
곧게 뻗은 짙은 눈썹이 찡긋, 미동했다.
[보이세요? 5천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이 순간을 지금 제가 일이나 하면서 보내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다음 달 연봉 협상에서 좀 힘을 보태 주셨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잠시 떨어지는 혜성을 바라보던 정혁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능청스레 고개를 돌렸다.
[힘없는 분이 파릇한 경력의 변호사한테 덜컥 50억을 내밀진 않죠.]
차현서 이야기에, 매끈하던 그 얼굴에 미묘하게 실금이 갔다. 그러나 아닌 척, 다시 표정을 지우고 테이블 위에 남은 와인을 털어 마시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언제 투자금 회수 못 한 적 있었나.]
[그러게요. 그걸 알았으면 차현서 씨도 이렇게 쉽게 서명 못 했을 텐데.]
레오는 현서의 계약서가 든 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귀찮더라도 웬만하면 원하는 대로 세팅해 줘. 가진 게 많아야 뺏을 때 재밌으니까.]
[네, 네. 잘 알죠, 최대한 잔인하고 싶으신 거.]
비서의 비아냥을 들으며 그는 케이스에서 담배를 빼 물었다.
쌀쌀해진 공기 속으로 희뿌연 연기가 건조하게 흩어졌다. 머리 위엔 혜성이 그리고 간 긴 꼬리가 여간 끈질기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도, 그 여자도 인생 평탄하게만 살아온 것 같진 않던데요.]
[그러게. 살아 있었네, 뻔뻔하게도.]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며 묻는 남자의 얼굴이 퍽 자조적이었다.
피자 한 조각으로 사흘을 견뎌야 하는 빈곤함도, 차별과 멸시를 숨 쉬듯 견뎌야 하는 비참함도, 그의 인생에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일 터였지만 그는 여전히 끔찍한 악몽 속이었다. 아마도 영원히 깨어나기 힘들.
그러니 네 인생도 끝없는 악몽이어야만 한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아니, 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시궁창에 처박아 놓곤 홀로 행복해질 순 없는 거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차현서, 그 여자에게.
[다시 말하지만 저는 절대 본부장님한테 원할 살 짓 안 할 겁니다.]
기다리던 정혁의 차가 로비에 멈춰서자, 레오가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 사라진다.
벨보이가 차 키를 들고 다가왔다. 줄곧 눈앞에 아른대는 여자의 잔상을 애써 지우며 피우던 담배를 지져 껐다.
***
“야, 너…!”
다급하게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준한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기막힌 헛숨을 내뱉었다. 지금 막 누군가에게 어이없는 얘기를 듣고 달려온 길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 헛소리가 아니었음에 더 황망한 얼굴이다.
“뭐야, 너?”
“왔어?”
현서는 힐끗, 걸어들어오는 준한을 확인할 뿐 계속해 박스에 제 짐을 옮겨 담고 있었다.
“뭐냐니까? 이게 지금…!”
“다 듣고 왔으면서 뭘 물어.”
“너 진심이야? 골드스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 좋은 중단발의 머리칼이 어깨 위에 부드럽게 찰랑였다.
“거절하기 힘들 만큼 좋은 조건이었어.”
“그럼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지.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왜. 서운해? 혼자만 내빼서?”
“그런 말이 아니라.”
피식 웃으며 묻자 준한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그놈들 밑에 가 봤자 너 더러운 일에 이용이나 당해.”
“여기에서라고 뭐 깨끗한 일만 했었나. 달라질 거 없어.”
“다르지, 그래도. 여긴 적어도 자기 보호 체계는 갖추고 일하게 하잖아. 실컷 이용하다 가치 없어지면 언제 내뺄지도 모르는 그런 양아치들이랑 어떻게 비교를 해?”
“돈.”
“뭐?”
“돈을 많이 준다잖아. 비교도 못 할 만큼 많이.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나 돈만 주면 뭐든 하는 거 잘 알면서.”
“현서야.”
“나도 알아. 다들 뭐라고 떠드는지. 근데 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서, 반박을 할 수가 없더라.”
매사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덤덤히 말하는 게 더 안타까웠다. 실은 아니면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면서. 제 순한 감정을 들킬까 되레 더 가시를 세우는 그녀를 모르지 않았다.
“걱정 마. 또 가서 어떻게든 잡초처럼 잘 버텨 봐야지.”
“그냥 편하게 살면 되잖아. 돈이면 여기서도 섭섭하지는 않을 만큼 벌 수 있고.”
“욕심 부리지 말라고. 선배도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차현서.”
준한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뭘 걱정해 이러는 건지 잘 안다. 다만 그는 알지 못했다. 차현서의 처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절박하다는 걸.
하기사, 격조 높은 법조 집안에서 그저 귀하게만 자라온 금수저 막내 도련님에게 이해를 바랄 순 없는 일이었다.
“조인호 씨도 알아? 아무 말 안 해?”
“내 일인데 그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걱정 가득한 그 눈망울에 잠시 말이 망설여졌다. 늘 옆에서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나 인호 씨랑 헤어졌어.”
“뭐?”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흥분하면 늘 시뻘게지는 귓불도 역시나였다.
“왜. 왜 헤어졌는데? 식 두 달 남겨 놓고 갑자기 왜. 그놈 설마…!”
“설마, 뭐.”
무언가 예상한 바가 있었던 건지, 말을 하려다 만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으며 어이없다는 듯 버럭 소리를 냈다.
“너는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에 말을 했어야지. 왜 혼자 앓아? 도대체 넌 날 뭘로 생각하길래….”
“뭔데?”
도리어 차분히 가라앉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갈피를 잃은 그의 시선이 방황했다.
“뭐. 선배가 내 보호자라도 돼? 되게 친한 척하네, 낯 간지럽게.”
소지품으로 가득 채운 박스를 무심하게 번쩍 들어 올렸다.
“조인호 내가 찬 거거든. 그러니까 오버 좀 하지 마.”
마음 약한 김준한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늘 신세만 지고 있는 기분이라.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대표는 마지막 인사조차 받지 않겠다며 거부를 했고, 일에 바쁜 동료들은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만 건넸을 뿐이었다. 지난 5년간, 영혼을 갈아 일한 곳에서의 마지막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