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왔어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태연히 와인 잔을 흔드는 서정혁의 모습에 헛숨이 절로 터졌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J빌딩으로. J빌딩에서 다시 H호텔로. 장소를 두 번이나 바꿔 가며 물을 먹인 사람치곤 좀 많이 뻔뻔한 얼굴이었다.
치미는 짜증을 누르고 앞에 마주 앉자, 그가 긴 팔을 뻗어 그녀 앞의 잔을 붉게 채웠다.
화려함이란 단어가 제 옷처럼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기성품이 아닌 게 분명한 고급 슈트와 셔츠와 시계, 명품 구두, 기다란 손가락에 사치스레 끼워진 굵은 반지까지도 모두 다, 그 잘나 빠진 얼굴에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소품으로 전락했다.
그는 마치 순혈의 귀족 검투사 같았다. 오만하고, 사치스럽고, 잔혹한.
“미팅은 잘 끝나셨고요?”
“덕분에.”
“다행이네요.”
부러 뱉은 뼈 있는 말에 그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합니다.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습니다. 대신 이렇게 대접하는 걸로 하죠.”
짙은 색의 눈동자가 능글맞게 휘어졌다. 다른 때 같으면 손님들로 북적거렸을 호텔의 메인 레스토랑이었다. 이곳이 이렇게 텅 빌 수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해 봤었던가.
“식사했어요?”
“JK 양재숙 이사님께 절 소개받으셨다고요.”
더는 이 능구렁이 같은 남자에게 말리고 싶지 않단 생각에, 곧장 본론으로 말을 잘랐다. 그가 그럴 줄 알았단 듯 웃었다.
“양 이사님과 신뢰가 아주 두터운가 보네요. 내 제안은 얼마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더니, 양 이사님 한마디에 이렇게 다시 연락한 걸 보면.”
“두텁죠. 이사님과는 서로 주고받은 게 많아서요.”
“부럽네요, 그 신뢰.”
“궁금한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빙글 웃으며 와인을 들이켜는 남자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50억. 진심이세요?”
“왜요. 부족합니까?”
“아뇨. 과해서요. 이해가 안 갑니다. 솔직히 안 믿겨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기 칠 인상은 아니지 않나?”
“진심으로 제가 50억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여쭙는 겁니다. 수지타산 안 맞는 일 하실 분 아니시잖아요.”
“우리 차 변호사님께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좀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네요. 겉보기엔 얼음 공주 같은 분이.”
공주, 라는 단어에 발끈해져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제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신 건 감사한 일입니다만.”
“고마울 건 없어요. 알다시피 손해 보는 장사는 나도 안 하니까.”
말하는 남자의 눈빛이 일순 서늘해졌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골드스톤에서 직접 칼을 쥐고 흔드는 것보단 대리인을 앞세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아니셨습니까? 청송을 한국에서의 첫 파트너로 선택하신 것도 그것 때문인 걸로 아는데요. ‘외국 자본이 한국 기업을 무너뜨린다.’ 이런 비난, 정면으로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우셨던 거잖아요.”
“그랬죠.”
“그랬다면, 제 업무 처리가 마음에 드셨다면, 그냥 절 지명하셔서 계속 청송과 함께 가는 방법이 더 합리적이잖습니까.”
“구체적인 이유까지 듣고 싶으시다?”
“네. 알고 싶습니다.”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은 그가 느긋이 고개를 까딱였다. 또다시 맹수 같은, 위험천만한 시선이 얽혀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첫째. 우린 별로 이미지 챙길 생각 없습니다. 어차피 골드스톤이 돈 먹고 튀는 일에 전문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 누가 있다고. 남 등 처먹고 번 돈으로 위선 떨어서 뭐 합니까. 민심 얻어 선거 나갈 것도 아닌데.”
제게로만 바짝 고정된 눈동자가 무서울 만큼 시리고 찼다. 비로소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가 상기됐다.
돈 되는 일이라면 영혼도 팔아 챙기는 악랄한 장사치. 타산에 안 맞으면 제 부모도 가져다 되팔 수 있을 파렴치한.
골드스톤 라이언 서의 악명이 어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던가.
“둘째. 우린 한국에서 한두 건만 털어먹고 나갈 생각이 아닙니다. 최소 10년, 20년 이상의 장기 계획으로 시작한 판인데, 그렇게 되면 법률 사무를 대리해 줄 로펌에 들이게 될 예산도 무시 못 할 일이 되겠죠.”
“그 돈으로 절 사시겠단 말씀이시네요.”
“아. 이제야 얘기가 좀 통하네.”
이, 미친놈.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간신히 삼켰다. 저를 관찰하는 눈동자가 더 노골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욕 참는 얼굴인데?”
“차마 아니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네요.”
길어진 입꼬리에서 피식, 웃음이 샜다. 급기야 큭큭대고 웃는 그 얼굴이 기가 막히게 잘생겨 더 얄미웠다.
“아.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랑, 왜 결혼을 깼을까.”
“네?”
지금 뭐라고 한 건가. 현서는 제 귀를 의심하며 눈동자를 부풀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방금?”
“아, 이런. 미안해요. 우연찮게 들어서.”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는 말끝을 흐렸다.
“뭘요?”
“파혼했다면서요.”
설마.
“조인호랑.”
기가 막혀 헛웃음이 다 났다. 정말이지 뭐 하는 자식인가 싶다. 지극히 공적인 비즈니스 상대에게 연애사를 줄줄 늘어놓고 다닐 만큼 못난 놈이었던가.
“어디서 들으셨어요?”
“좀 전까지 같이 있었거든요. 조인호 씨랑.”
조금 전 그의 미팅 상대가 조인호였단 소리였다.
겨우 웃음기를 지우며 고개를 까딱이는 면상에 와인이라도 훅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황스러움과 수치심 그리고 억울하고 초라한 감정이 혼융되어 파도를 쳤다. 이 낯선 남자에게 대체 왜 이런 밑바닥까지 내보여야 하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유감이네요. 나한텐 썩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무슨 뜻인가.
“그대로 조인호랑 결혼이라도 했으면 내 제안 안 받아들였을 테니까.”
“전 수락한 적 없는데요, 본부장님 제안.”
“안달 나서 여기까지 쫓아와 놓고 수락한 건 아니시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조롱했다.
“적당히 튕기죠? 어차피 사인할 거면서 피차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는 이쯤 하시고. 마음에도 없는 남자랑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돈 필요하잖아, 당신.”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이미 다 파악했다는 듯 저를 보는 오만한 눈빛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속을 모조리 들켜 버린 것만 같았다. 그가 제 안에 들끓는 탐욕과 본능을 끊임없이 들춰내고 파헤치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꾹 말아쥐었다. 남자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얘기 다 들었으면 이제 결정해야죠.”
그가 팔을 들어 무심히 핑거스냅을 튕기자 멀찌감치 서 있던 비서가 서류 봉투를 가져와 내밀었다.
“읽고 서명해요.”
어쩌면 악마인지도 몰랐다. 원하는 모든 걸 줄 테니 영혼을 팔라 끊임없이 유혹하는, 악마.
“거기 서명하는 그 즉시 차현서 변호사님은 우리 골드스톤 소속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내가 시키는 일은 뭐든 해야 할 의무가 있고, 지시 거부는 해고 사유입니다. 바로 계좌로 입금될 50억 원과 성과급을 포함한 별도의 연봉 전체에 대해 업무상 과실 명목으로 구상권이 청구될 수 있다는 점, 유의하시고요.”
50억에 말 잘 듣고 약점 많은 노예 하나를 얻었으니, 결국 그로서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계약인 셈이다.
망설이듯, 꺼낸 서류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흘이면 생각할 시간은 많이 준 것 같은데. 지금 사인 안 하면 거절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삐딱하게 앉아 최후 통보를 하는 남자의 표정이 오만했다. 네까짓 게 이걸 거부할 수 있겠냐 비웃는 것이었다.
“해요. 서명.”
그가 채근했다.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초조함에 숨이 턱 막혔다.
꼴이 우습고 초라하다. 그 앞에 곧장 무릎을 꿇을 수도, 이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다. 제 목줄이 이미 그의 손에 매여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에겐 처음부터 주어진 선택권이 없었던 거다.
객관적 상황 판단이 끝나자 목이 탔다. 눈앞의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 마셨다. 맨정신엔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술이 넘어가자 일순 얼굴에 더운 열이 올랐다.
“펜이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어 말하자,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슈트 안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내밀었다. 홀린 듯 그의 만년필을 받아 쥐었다. 받지 않을 이유보다 받아야 할 이유가 더 많다고 자위하면서.
“기대만큼 현명한 선택이네요.”
서명을 마친 그녀에게 그가 또다시 손을 내밀어왔다.
“앞으로 잘해 봐요, 우리.”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외면했다. 얼마나 뜨거울지 이미 잘 아는 커다란 그 손을 굳이 맞잡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우리’라며 자신과 동류로 묶는 그 단어가 문득 역겹게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도망치듯이. 수치스러움에 훅 열이 올랐다. 아니다. 들이켠 술기운이 이제야 오른 걸지도 몰랐다.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두 뺨을 때리듯 스쳤다. 무작정 아무 방향으로나 걷고 또 걸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수치심도, 초라함도, 비참함도 구태여 곱씹기 싫은 까닭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현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혜성이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조각조각 부서진 혜성이 저마다 긴 꼬리를 단 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5천 년 만에 돌아왔다는 그것들은 그렇게 소멸하는 중이었다. 흔적도 없이.
동시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알림 메시지에 50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괴롭히던 괴물 같은 짐이 단번에 소멸했다. 흔적도 없이.
“하….”
허탈한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