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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고 깎은 듯한 남자의 얼굴이 매끈하게 거울에 비쳤다. 셔츠 단추를 마저 채워 올리는 커다란 손이 만족스레 움직였다. 신경 써 골라 입은 슈트의 핏이 꽤 나쁘지 않은 까닭이었다.
[세부 조정안 마무리되는 대로 법정 관리인 선임 논의도 바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법정 관리인으론….]
[조인호 말야.]
보고하던 비서 레오의 말을 자르고 소매의 커프스를 끼웠다.
[지금껏 한 번도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다면서?]
전형적인 동부 악센트의 영어 발음과 침잠하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썩 조화롭다. 누구라도 홀릴 수 있을 만큼.
[조인호도 그 핏줄인데, 게다가 아들인데. 왜 그렇게 노골적으로 경영에서 배제가 된 거야?]
[핏줄인 건 맞습니다.]
[근데? 한국 재벌이란 사람들, 온갖 거 자기 자식 못 물려줘서 안달인 거 아니었나?]
[혼외자입니다.]
상상도 못 했던 답에, 정혁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제 비서를 돌아봤다.
[허. 혼외자?]
눈을 부릅뜨고 재차 묻자 레오가 다시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그제야 제법 멀쩡해 보이던 조인호에게 왜 아무런 권한이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하여간 한국인들이란. 그놈의 핏줄 연연하다 꼭 피를 보고야 마는 어리석은 종자들.
[잘됐네. 법정 관리인 문제, 조인호랑 얘기해 보는 건 어때?]
[조성호가 아니라, 조인호랑요? 진심이십니까?]
“이걸로, 계산 부탁할게요.”
남자는 비서와의 말을 끊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에게서 카드를 받아 든 쇼퍼의 뺨이 다소 붉어지고 있었다. 불쑥 들려온 다정한 한국어 발음과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태도가 그 이유였다.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이 상기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레오는 꽤 익숙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협상 틀도 안 나온 상태입니다. 벌써부터 우리가 다른 루트도 건드리고 있단 걸 조 사장 쪽이 알면 일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패를 여러 개 쥐고 있어야 협상할 맛이 나지. 지금 우리가 고작 구멍가게 되팔아서 번 푼돈, 그거 바라고 하는 짓도 아닌데.]
[그래도 조성호는 진심인 것 같던데요. 진심이어서 더 확고한 것 같고.]
[멍청한 놈들이 진심이면 무서워서 그래, 내가. 그리고 진심은 우리도 진심이야. 제대로 돈 벌어서 나가야겠단 마음은 우리도 아주 절절하잖아?]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레오가 수긍의 표정을 짓는다.
어느새 블랙 카드를 가지고 돌아온 쇼퍼가 수줍은 얼굴을 하고 섰다.
“고맙습니다. 예쁘네요.”
“…네?”
쇼퍼의 눈이 동그랗게 부풀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생략한 목적어를 뒤늦게야 느긋이 덧붙였다.
“슈트. 마음에 들어요.”
나긋하고 매너 좋은 목소리는 노골적이라는 오해를 산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레오는 결국 고개를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도 오면 나 옷 고르는 거 도와줄 거죠?”
“아…. 네. 물론입니다.”
한국어를 알아들을 순 없어도 지금 하고 있는 게 제 플레이보이 상사의 몸에 밴 플러팅이라는 것쯤은 확신하는 바였다.
[한국 여자는 취향 아니시라면서요.]
VIP 쇼퍼 룸을 빠져나오며 그를 타박하듯 물었다.
[내 취향인 일만 하고 살 수 있나, 어디.]
[공감 가는 얘기네요. 먹고 사는 문제에 취향은 사치죠.]
레오의 농담에 잘 뻗은 입술이 핏, 말려 올라갔다. 밤낮없이 일을 던지는 상사에 대한 은근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내일 7시에 사무실로 차현서 오기로 했어.]
[하겠다던가요? 그 여자가?]
[내가 언제 거래 실패한 적 있어?]
정혁은 레오의 주머니에 있던 차 키를 슬쩍 가져가며 입꼬리를 올렸다. 뻔뻔하리만큼 능글맞고 오만한 제스처였다.
[내일 저녁에 5천 년 만에 오는 혜성 떨어진다던데요, 본부장님.]
키를 빼앗긴 채, 레오는 이미 여러 번 했었던 말을 한 번 더 반복해 상기시켰다. 내일은 꼭 일찍, 아니, 정시에 퇴근할 거란 통보였다.
그러나 이미 저만큼 멀리 걸어가고 있는 그가 결코 들었을 리 없다. 홀로 남은 레오는 멋쩍게 이마만 긁었을 뿐이었다.
***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서류를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죽은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였다.
현서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복도 끝 비상구로 나갔다. 그냥 사무실에서 받는다 해도 누가 엿듣는 것도 아닐진대, 어느새 습관이 됐다.
모두에게 차선엽은 이미 죽고 없어진 사람이어야 하니까.
- 바쁘지?
“…….”
- 그냥. 잘 지내나 해서.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용건을 채근했다.
“무슨 일, 있어요?”
- 일은, 무슨.
“그럼 왜…요.”
- 네 결혼식. 준비는 잘돼 가는지, 걱정이 돼서.
그제야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반사적으로 긴장이 됐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위급한 상황이 생긴 건 아닌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다시 제 앞에 나타난 이후 10년이었다. 지난 10년을 늘 이렇게 살아왔다. 전화 한 통에도 마음 졸이고 숨죽여 가면서.
- 아비가 돼선 딸자식 결혼한다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자격 없지, 내가.
고개를 푹 떨구고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섰을 늙은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가슴이 갑갑했다.
한때는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혼자 떠나려 했느냐고. 왜 혼자서만 도망치려 했던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무책임하고 겁 많았던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비참해졌다고, 내내 울며 저주를 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깨달았다. 자신이 꽤 오래도록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는 걸.
아버진 이미 죗값을 충분히 받은 듯 보였다. 제 하찮은 저주 따위, 더 보태지 않아도 좋을 만큼 가혹하게.
그래서 결국 그를 미워하지 못했다. 더 저주를 하지도, 용서를 하지도 못했다. 아버지에 대한 정의하지 못한 감정은 아직도 연민과 그리움, 그사이의 어디쯤을 표류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
늘 그리워했던 어린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으니까.
“나 결혼 안 해요.”
- …….
“안 하기로 했어요.”
최대한 침착하게 소식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충격을 받은 듯, 수화기 너머에선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야 차선엽은 작게 읊조렸다.
- 그래. 잘했다.
파혼을 했다는 딸에게 잘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도 묻지 않고,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통장 확인해 보세요. 이번 달 생활비, 좀 전에 보냈으니까.”
- 미안하구나.
늘 고맙단 말보다 미안하단 말을 더 많이 하는, 그런 사람.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다시 진동이 울렸다. JK 소속 김 실장에게서 온 메시지가 액정에 깜빡거렸다.
「장기용 전무 이사님 건 자문 요청 드립니다.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 바랍니다.」
양재숙이 말했던 막내아들 일인 모양이었다.
딱딱한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섰다. 가늘고 기다란 속눈썹이 깊게 감겨 내렸다.
결혼은 깨졌다. 잠시나마 가당찮은 희망과 배부른 감정으로 고뇌했던 시간들이 다 무색할 만큼, 다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기댈 곳 하나 없이 홀로 악착스레 견뎌야 하는 지옥.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늘 제자리였던, 더럽고 냄새나는 밑바닥으로 말이었다.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단 희망은 애초에 버렸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고 견뎌 왔을 뿐이다.
이렇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시궁창에 손을 담그고 오물을 뒤집어쓰면서, 이렇게 얼마나 더 죽어야만 하나.
이대로라면 아마도 평생을 벗어날 수 없을 굴레였다. 그날 이후 죽은 채 살아가는 건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청산하고 싶잖아요.”
자꾸 떠올랐다. 거부 못 할 거라던 오만한 목소리가 내내 이명처럼 맴돌았다. 그 비웃음이, 줄곧 귓가에 아른댔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구질구질하며 추접스러운지, 불행을 알아챈 악마의 비웃음 같던 그 얼굴이.
꿀처럼 달콤한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 거짓이었다.
흔들렸다. 아닌 척했으나 처음부터 지금껏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은 너절한 부표처럼 동요했다.
실상, 욕심 없단 말도 다 개소리였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단 말 만큼이나 그랬다. 벗어나고 싶고, 살고 싶었다. 있는 대로 욕심을 부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그 모든 속내를 서정혁, 그 남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가 내민 손을 잡는 게 또 다른 굴레가 되어 제 목을 조인대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더러운 오물이나 치우며 버텨야 할 운명이라면, 답은 역시나 선명했다. 이 지옥에서 지금 당장 저를 끌어 올려 줄 사람은 서정혁 하나뿐이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일 저녁 7시. 내 사무실에서 봅시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봤다. 간결하고 차가운 두 문장을 보내며 지었을 그의 표정은 뻔했다.
여지없이 덫에 걸린 사냥감이 얼마나 같잖고 우습게 느껴졌을까.
“하….”
내뱉은 숨이 메아리처럼 깊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