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플로우-3화 (3/115)

♬(3)

“이놈, 이거.”

최 변이 손톱으로 탁탁, 잡지 속 ‘Ryan Seo’의 사진을 불만스레 찍어 대며 읊조렸다.

“나는 이 껍데기가 더 재수 없어. 얘 진짜 한국인 맞아? 뭐가 좀 섞인 거 아니고?”

회의가 끝났음에도 잡담이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회의 시간에 대표가 직접 뷰티큐브 건을 맡았던 현서를 치하한 게 발단이 됐다.

골드스톤의 뷰티큐브의 인수가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의도했든 아니었든, 이로써 그들은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겠단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월가의 악질이라 불리는 칼 앤더슨이 창립한 펀드인 ‘골드스톤’은 전형적인 행동주의 노선의 사모 펀드였다. 그들은 대상을 가리지도, 한계를 두지도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무뢰한들이었다.

이른바 기업 사냥꾼이라 불리는 그들이 어떤 식으로 회사 하나를 동강 내어 껍질까지 팔아먹는 돈 귀신들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한때 건실했던 기업들 여럿이 이미 그들 손에 팔려 조각났던 전적들이 그들의 악명을 더해 왔고.

그리고 그 악랄하고 천박한 일의 중심엔 늘 언제나 그가 있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그게 라이언 서에 대한 세인들의 평판이었다.

“여기 한국 이름도 떡 하니 있는데요? 서. 정. 혁.”

유학파 신입 주니어가 정리한 서류를 내려놓으며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어릴 때 미국 이민 갔다가 사고로 부모님 잃고 운 좋게 입양돼서 자수성가한 케이스예요. 저 뉴욕에 있을 때도 이미 월가에선 꽤 유명 인사고요. 동양인이 바닥서부터 탑까지 올라간 전설로. 와스프♬(WASPs : White Anglo-Saxon Protestants,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 아니면 끼어들 틈도 안 주는 데서, 엄청나긴 하죠. 무려 골드스톤에서 아시아 총괄 본부장까지 하고 있으니. 칼 앤더슨 엄청난 인종 차별주의자인 거 유명하잖아요. 근데도 그렇게 예뻐한대요. 대 놓고 자기 후계로 찍을 만큼.”

월가의 투자은행 ‘에런 체이스’에서 브로커로 시작해 고작 2년 만에 파트장급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고, 골드스톤 대주주인 칼 앤더슨의 눈에 띄어 현재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 객관적으로 알려진 서정혁의 정보는 딱 거기까지였다.

“이 정도면 자랑스러운 한국인인 건가?”

“무슨. 그래 봤자 돈에 미친 검은 머리 외국인 새끼지. 이런 새끼들한테 국적, 조국, 뭐 그런 게 있는 줄 알아? 안 그래, 차 변?”

불현듯 덧붙여진 최 변의 말꼬리에, 문득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차 변 만나겠다고 찾아왔었다며. 어때? 한국말이나 제대로 할 줄 알고?”

하루 만에 벌써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역시 유력한 용의자는 대표였다.

“네. 잘하던데요.”

현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챙기던 서류를 마저 챙기며 답했다.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에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번뜩였다.

“왜 왔는데? 그 대단하신 양반께서 무슨 일로 직접 행차하셨대?”

“여기 시장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한국 진출 물꼬 터 줘서 고맙다고 왔었어요, 성과금 들고.”

“오오, 정말!? 근데 대표님은 왜 말씀 안 하셨지?”

성과금이란 말에 표정들이 단번에 바뀌었다.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와글와글, 시끄러워진다.

결국, 세상사 다 돈으로 굴러가긴 하나 싶다. 누구 말마따나.

“글쎄요.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부를 생각이시겠죠.”

무심히 대꾸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젠 만성이 되어 버린 두통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와 서랍 속 약을 꺼냈다. 알약 두 개를 막 집어삼키려던 찰나, 주머니 속에서 지이잉, 진동이 울렸다.

조인호, 라고 무성의하게 저장된 세 글자를 잠시 멍하니 내려봤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저와 곧 결혼할 남자였다. 이제 와 정말 결혼해도 괜찮을 남자인가를 재고 따지는 건 감정적 사치였다.

현서는 통화 버튼을 누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어, 인호 씨.”

- 어디야?

“아직 사무실. 왜?”

- 지금 그리 가고 있어. 잠깐 보자.

당황스러웠다. 그녀가 알기로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캐릭터는 아닌지라.

“지금? 나 야근 길어질 것 같은데. 혹시 예물 때문에 그러는 거면….”

- 오래 안 걸려. 잠깐 보자. 할 말 있어서 그래.

어쩐지 목소리가 좀 차갑게 느껴졌다.

- 곧 도착해. 10분 있다 내려와.

어차피 내일 보기로 약속이 되어 있는데. 굳이 오늘 꼭 얼굴을 보며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스치는 예감이 썩 기껍지는 않았다.

조인호와는 은성제약 조기문 회장의 주가 조작 사건을 수임하며 면을 텄다. 호감을 먼저 표해 온 건 조인호 쪽이었다. 조인호는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예쁘고 똑똑한 여자가 좋다고 입을 털며 노골적인 구애도 마다치 않았다.

당황스러웠으나 굳이 피할 이유도 없기에 그의 호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혹여 이 남자라면 이 지긋지긋한 빚더미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속물스러운 기대도 없진 않았고.

자연스레 만남은 이어졌고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결혼을 두고 사람들은 신데렐라 신분 상승이라며 떠들어 댔다. 왕좌 싸움에서 일찌감치 패배한 조인호이긴 했어도 어쨌든 조 회장의 핏줄이었으므로. 언감생심, 가진 것 하나 없는 차현서가 먼저 탐낼 수도 없었을 남자인 건 맞았다. 조 회장과 그 식구들의 위선이 기실 혼외자에 대한 무관심 아니, 조인호의 승계권 배제를 위한 것이었단 건 딱히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음.

알량한 자존심과 닳을 대로 닳아 밑바닥 난 감정이 그녀에겐 더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결혼을 할 만큼 조인호를 사랑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그에게 이성적으로 끌린 적이 있긴 했던가. 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계속 진행해도 좋은 건가. 이렇게 팔려라도 가듯이.

스스로 생각해도 배부른 감정에, 고뇌가 깊었다.

10분 후. 겉옷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로비 앞 한구석에 주차되어 있는 그의 차로 다가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할 말이라니?”

조수석에 올라타 앉기가 무섭게 용건을 물었다. 불길한 침묵이 내려앉았고, 괜스레 시계를 확인하며 그를 재촉했다.

“뭔데? 나 얼른 들어가 봐야 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의 조인호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을 뗐다.

“헤어지자, 현서야.”

“…뭐?”

현서는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이쯤하고 우리 그만 정리하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찰나, 이렇게 파혼을 함으로써 처리해야 할 뒷일들이 일목요연하게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제 무의식은 이 관계의 끝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기방어의 본능처럼, 말이었다.

“왜. 이유는?”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리어 당황하고 흥분해 있는 건 조인호였다. 그는 쫓기듯 초조해 보였다. 한껏 상기되어 과장스레 말을 잇는 얼굴이 봐주기 힘들 만큼 일그러졌다.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나는 내가 욕심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고. 형 혼자 회사 다 먹겠다는데 그냥 손만 놓고 있을 수가 없겠어.”

“무슨 뜻이야?”

“나도 내 몫을 챙기고 싶단 뜻이야. 좀, 힘을 보탤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해.”

그러니까. 너는 힘은커녕 짐이 될 여자라 결혼을 못 하겠단 소릴 이토록 어렵게 하고 있는 거였다.

“남은 지분까지 탈탈 털리고 나니까 알겠더라. 내가 너랑 결혼할 수 없겠다는 거.”

좀 우스워 헛웃음이 났다. 처가 덕을 볼 수도 없을 고아에게 먼저 청혼을 한 게 누군데.

신분 상승이라는 속물스러운 기대완 별개로, 그에게 애정을 구걸한 적은 없었다. 결혼을 애원한 적도 없었다. 고귀한 양반들 뒤 닦아 준 돈을 받아 챙길지언정, 마음을 속이고 진심을 위장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제멋대로 맞지도 않는 유리구두를 선물해 안겨놓곤, 이제 와 다시 내놓으라니. 기가 찼다.

“혹시 여자 생겼어?”

“뭐? 야.”

조인호는 어이없단 듯 미간을 푹 구겼다.

“그렇잖아. 이제껏 30년 넘게 회사 같은 거, 승계 같은 거 관심도 없었으면서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고? 먼저 결혼하자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내가 짐이라고? 그걸 이유라고 대기엔 너무 궁색하단 생각 안 해?”

“네가 뭘 알아? 그동안 내가 내 밥그릇에 관심도 없었는지 어쨌는지 네가 뭘 얼마나…! 하!”

그는 억울하다는 듯 버럭 짜증을 냈다. 이런 구질구질한 이유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 남자의 마음이 이미 멀어졌다는 것. 그 떠난 마음을 붙잡을 수 없겠다는 것.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 다 내 탓이고, 미안하다. 후….”

그는 피곤한 목소리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담담한 척 침묵했으나 실은 마음이 툭 내려앉고 있었다. 좋아한 적도, 아니, 애당초 남자로 여긴 적도 없는 사람임에도 원망스러웠다.

버림받는다는 것. 혼자 남겨진다는 건 아무리 경험을 거듭해도 절대 덤덤해질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이딴 변덕이 처음도 아니건만 이토록 당황스러운 걸 보면 말이었다.

“내가 너한테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나한테 뭐가 더 중요한지….”

“알겠어. 무슨 말인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구질구질한 목소리에, 차가워진 이성이 온전히 돌아왔다. 덕분이었다.

“그래. 헤어져.”

“현서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데 더 할 말이 없네, 내가.”

“차현서. 그래도 나, 너한테는 진심이었다는 거 알아주라. 나 정말 너 사랑했던 거….”

더 듣고 있기 거북해 그대로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사랑해서 헤어진다. 사랑하니까 놔주는 거다. 뭐 그런 익숙한 개소리까지 들어 줄 아량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이유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바닥 인생에도 사람은 많았다. 호감으로, 호기심으로, 혹은 동정으로. 제각각의 이유로, 제멋대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던 사람은 숱하게 많았었다.

그러곤 약속이나 한 듯 결국 다들 떠나갔다. 질린다, 거북하다, 버겁다, 감당하기 힘들다…. 다가온 이유만큼이나 많은 이별의 변명들이 있었으나 결국 모든 이별의 이유는 하나로 귀결되곤 했다.

달라진 마음.

애초에 변하지 않는 것과 사라지 않는 것이 있기는 한 건가. 처음엔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고 혐오했었다.

그러나 이젠 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든 떠날 핑계를 찾고야 만다는 걸.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데 자꾸 마음이 울컥였다. 조인호와의 이별이 슬퍼서, 혹은 아쉬워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운명. 뭐하나 편하게, 평탄하게 가는 법이 없는 운명. 끊임없이 버림받고 또 혼자인 엿같은 제 운명이 서러워서였다.

어쩐지. 가당찮은 행운이 이번엔 꽤 오래간다 싶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참 엿같았다.

지이잉, 주머니 속 진동하는 핸드폰을 기계적으로 집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부터의 메시지였다. 종일 기다렸던.

「내일 저녁 7시. 내 사무실에서 봅시다.」

왜였을까. 불현 참았던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간결한 두 줄의 문장이 어떻게 버튼이 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냥, 메시지를 본 순간 안도가 됐다.

세상 참 엿같죠, 라고 위로 아닌 동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한 명쯤은 있다는 게. 적어도 이 엿같은 운명을 느낀 게 혼자만은 아니라는 안심. 혼자만 부적응자가 아니었단 동류의식. 뭐 그런,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시답잖은 감정들 때문이다.

손등으로 눈가를 스윽 비벼 훔치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겉옷을 벗고 자리에 앉아 밀린 업무 목록을 체크했다.

늘 그래 왔듯 담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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