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50억이라는 금액 때문에만 당황한 건 아니었다.
애써 표정을 숨기고 침착히 되물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말려드는, 아마추어처럼 보이고 싶진 않은 탓이었다.
“혹시 제 뒷조사하셨습니까?”
“기본이죠.”
뻔뻔하리만큼 단호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진 그녀는 흐르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당혹감을 포장했다.
청송의 최연소 파트너 변호사이자 에이스로 불리는 차현서가 실은 죽은 아버지의 어마어마한 빚을 상속받아 월급의 대부분을 차압당하고 있는 개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대학 때부터 친했던 선배 준한과 비서 솔이 정도뿐.
“왜요?”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치부를 들킬 만큼 허투루 처신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왜.
“왜 제가 필요하십니까?”
현서는 따져 물었다. 침착하려 마음을 가라앉혔으나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네. 물론 본부장님께서 이번 뷰티큐브 건을 인상적으로 감명 깊게 평가하신 건 이해합니다. 워낙 제가 심플하고 깔끔하게 일을 잘했으니까요.”
피식 웃으며 의자에 더 몸을 깊게 묻은 남자가 더 노골적인 시선으로 저를 관찰해 온다. 어디 더 떠들어 보라는 듯이.
“그래서 저를 탐내신 이유는 알겠습니다만, 또 한편 굳이 왜 저인가 싶습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더 훌륭한 법무팀 꾸리실 수 있잖습니까. 찾아보면 골드스톤에서 손짓만 해도 달려갈 전관 변호사들이 넘치고 깔렸을 텐데요.”
“기왕이면 눈에 익은 사람으로 고른 겁니다. 나도 명색이 정 많은 한국 사람이라.”
능글맞은 헛소리였다.
“뭐, 그래도 이유를 굳이 듣고 싶으시다니까.”
눈에 힘을 주고 잠시 침묵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으며 오뚝한 콧잔등을 가볍게 긁었다. 그러곤 자세를 슬몃 고쳐 앉은 뒤 말을 잇는다.
“어릴 때 미국에서 접시 닦는 파트타이머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들이며 유명 연예인들, 스포츠 선수들까지 드나드는 아주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야 뭐 주방 구석에서 접시나 닦고 있느라 홀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본 적도 없긴 하지만요.”
그녀는 힐끗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봤다. JK 비서실에서 재촉한 자료를 곧 송부해 주기로 해놨 다. 뜬금없이 시작된 남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렇게 듣고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차현서는 낯선 남자의 뜬구름 잡는 유혹에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지독한 현실주의자라.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홀에 심부름을 나갈 기회가 있어서 잠시 나갔었는데, 프라이빗 룸이 소란스러운 겁니다. 맨해튼에서 호텔만 몇 개를 운영한다는 부자 부부가 있는 프라이빗 룸이었죠. 무슨 일인가 싶어서 호기심에 슬쩍 안을 들여다봤는데, 레스토랑 매니저가 그 부부 아들이 바닥에 토해 놓은 음식물을 손으로 주워 담고는 팁을 받더라고요. 백 달러짜리 지폐를, 이렇게나 한 움큼.”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본부장님?”
“그냥.”
그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때 생각이 나서요. 나도 누가 나 대신 더러운 거 만져 줄 사람이 있었음 좋겠다, 싶어서.”
그녀의 동그랗고 까만 동공이 무슨 뜻이냐 되묻고 있었다. 그 순수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기가 막힐 만큼 부조리하게 느껴져 그는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차 변호사님이 그런 거 잘 만진다면서요. 더러운 거.”
설핏 상기된 두 뺨과 설핏 일그러지는 미간의 주름.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균열의 풍경이 퍽 만족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엿같죠.”
현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비뚜름해지며 제 동요를 관찰하고 있었다. 다 알면서 떠보는 것인지, 떠보며 뭔가를 더 알아내려는 것인지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원래 세상이 엿같이 돌아가는걸.”
덜컥 두려움이 엄습했다. 두려움의 근원은 무지에 있었다. 제 치부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상대에 대해, 그녀는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의도를 가진 건지, 왜 갑자기 나타나 이렇게 노골적인 위협을 하는 건지.
“협박같이 들리는데 제 착각인가요?”
“감히요. 대한민국 높으신 분들 뒤치다꺼리하시느라 공사다망하신 변호사님께, 제가 감히 어떻게 협박을 하겠습니까. 말했잖아요. 이제 막 장사 시작했는데 판부터 뒤집어엎는 바보가 어딨겠어요.”
나른하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태연히 이어졌다.
“그냥 제안을 하는 겁니다. 50억짜리 제안.”
일어선 그가 가깝게 다가왔다.
“차 변호사님 돈 좋아하잖아요. 난 그런 줄 알고 왔는데.”
슈트 안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낸 그가 톡, 손끝으로 그녀 앞 테이블에 제 명함을 올려놓았다.
“어쩐지 나는 우리가 꽤 잘 통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한쪽 주머니에 불량스레 손을 끼워 넣은 채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선. 그의 시선이 온통 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지가 결박된 듯이 갑갑했다. 아니, 남자 특유의 진한 스킨 향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 나도 제일 좋아하는 게 돈, 이거든요.”
소름 끼치게 낮은 속삭임이 이마 위로 쏟아졌다. 더는 견디기 힘든 위압감이 그녀를 압박해 왔다.
“이게, 저를 찾아오신 용건인가요?”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디 거절할 수 있으면 거절해 보라는 듯한 오만한 미소도 함께였다.
퍽 불쾌한 감정이 치솟았다.
“죄송합니다.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부러 더 똑 부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일순 그의 눈꼬리가 가느다랗게 올라갔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돌아섰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말려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서였다. 묘하고, 심상치 않고, 위험스러워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변호사님.”
낮은 목소리가 빙글대며 뒤통수에 와 닿았다.
“그 스타킹은 좀 갈아 신으셔야겠는데.”
흘낏, 눈짓을 하는 남자가 번죽거리며 말했다. 그 느물느물한 얼굴에 욕이라도 걸쭉하게 퍼붓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현서는 제 종아리를 확인하곤, 소리 없이 탄식하며 입술을 꾹 물었다. 그대로 문고리를 훅 잡아당기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반삭의 히스패닉계 비서가 눈인사를 했다.
곧장 사무실로 돌아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유 없이 목이 타고 얼굴이 화끈댔다. 그제야 참았던 숨이 깊게 밀려 나왔다.
***
툭, 눈앞에 짐처럼 내던져진 샛노란 돈다발을 보며 현서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저 숫자 적힌 종잇장의 의미가 과연 이들에겐 어떤 것일까 하고. 누군가에겐 평생을 그토록 바라며 좇는 것이 누군가에겐 이토록 흔하고, 쉬운 것일 수 있음에 새삼 입 안이 썼다.
봉투를 챙겨 가방에 넣고 돌아 나오는데 낯익은 가정부가 다가왔다.
“사모님께서 잠깐 뵙고 가시라고 하시네요.”
JK그룹의 안주인이며 장 회장의 두 번째 와이프인 양재숙은 현서를 고용한 고용주이기도 했다. 별채를 빠져나와 그녀가 있다는 본채로 넘어갔다.
커다란 방문이 열리자, 테이블 앞에 앉아 꽃꽂이를 하고 있던 그녀가 들어서는 현서를 힐끗 봤다.
“어째 좀 피곤해 보이네? 결혼 앞둔 신부가 너무 일이 바쁜 거 아니야?”
“안녕하셨어요, 사모님.”
“그럼. 안녕했지, 나야. 늘, 차 변 덕분에.”
고맙단 소리를 하면서도 양재숙의 시선은 온통 꽃에 가 있었다. 앞에 선 누군가 따위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무례함이었다.
“김 실장이 모자라게 넣진 않았지?”
“네. 충분합니다.”
“다행이네.”
익숙하고 당연했다. 이들에게 자신은 그저 뒤나 닦아 주고 다니는, 누구 말대로 본인들 대신 더러운 걸 만져 줄 처리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 또한 그들을 돈을 내주는 자판기라 여기면 됐다. 원하는 일을 해 주고 언제든 버튼을 누르면 그만인. 그게 그 무슨 더러운 일이라 해도 말이었다.
“수술비가 많이 급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전무님께서 전혀 모르고 계셨어서 일이 좀 수월했고요. 본인이 먼저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으니 뒤탈은 없을 겁니다.”
“그래. 뭐, 차 변이 어련히 잘 알아서 했으려고.”
이들이 믿는 건 사람이 아님을 잘 안다. 현서는 무거워진 핸드백을 다른 손으로 바꿔 들며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막내 일인데.”
말소리에 한숨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차 변도 전에 한 번 봤지? 우리 막내.”
“네. 뵌 적 있습니다.”
“어젯밤에 친구들끼리 놀다가 일이 좀 있었나 봐. 김 실장이 급한 대로 대충 처리하긴 했다는데, 불안하네. 차 변이 법적으로 문제 안 될지만 좀 봐 줘.”
얼마 전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다던, 그 문제의 막내아들이 기어코 일을 저지른 모양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김 실장님께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양재숙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골드스톤 라이언 만났다면서.”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려던 찰나였다. 예고 없이 들려온 뜻밖의 이름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내가 소개했어, 변호사 찾길래. 유능한 인재라고. 뭐, 안 그래도 이번에 인수 건 자기 작품이라 이미 알고는 있더라만.”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가 어떻게, 무슨 의도로 제게 찾아왔던 건지.
“뭐래? 저 밑으로 들어오래? 돈 많이 준대지?”
그녀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핏 웃으며 물었다.
“우리 JK 법무팀에도 안 들어오는데 거길 가겠냐고 하니까 그러더라. 험한 일 하는 사람한테 너무 대접이 박한 거 아니냐고. 웃겨, 진짜. 내 앞에서 돈 자랑하는 거 쉽지 않은데 말야.”
양재숙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손질한 작약 다발을 한 움큼 움켜쥐고 유리병에 담았다.
“어쩔 거야?”
“생각 중입니다.”
“벌써 넘어갔네.”
그녀는 단호하게 확신했다.
“그 돈 귀신, 도대체 얼마를 부른 거야?”
50억, 이라고 답하면 얼마나 웃을까. 진짜 네 가치가 그 정도인 줄 착각하는 거냐, 얼마나 무안을 줄까.
양재숙이 천천히 유리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무튼. 자리 옮기더라도 나랑은 거래 끊을 생각하지 말고. 남 좋은 일만 시키면 나도 억울하잖아. 소개비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저택을 나서며 곧장 골드스톤 김영진 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사장님, 차현서입니다. 혹시 본부장님께 제가 직접 연락을 좀 드릴 수 있을까요.”
어제저녁,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던 그의 명함이 몹시 아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