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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플로우-1화 (1/115)

로맨틱 플로우♬(Romantic Flow) [개인소장 부탁합니다] 1- 115화 完

♬ (1)

혜성 같은 소리.

핸들을 쥐고 있던 하얀 손가락이 톡, 액정을 터치했다. 주파수가 바뀐 라디오에서 다른 목소리의 앵커가 말을 이었다. 그제야 들을 만한 소식의 다른 뉴스가 흘러나왔다.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기업인 뷰티큐브가 사실상 헐값에 매각됐습니다. 뷰티큐브는 오늘 오전 배포한 보도 자료에서 글로벌 사모 펀드인 골드스톤과의 인수 합병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전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준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었다. 그러자 하얗고도 냉한 얼굴이 천천히 힐끗, 그를 돌아봤다. 표정에는 왜 웃냐는 무언의 항의가 담겨 있었다.

“관심 없어? 5천 년에 한 번 오는 기회라는데.”

실없는 소리였다.

현서는 윤기 나는 다갈색 머리칼을 찰랑이며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퇴근 시간, 차로 빼곡한 8차선 대로를 겨우 지나는 중이었다. 한 시간 만에야 눈앞에 나타난 저 지긋지긋하고도 익숙한 건물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싶었다.

신호가 바뀌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달갑게 핸들을 꺾었다.

“응. 관심 없어.”

“어련하시겠어요.”

“근데, 보긴 봐야 돼.”

“왜. 조인호 씨가 같이 보재?”

“아니. 내가 보쟀지.”

정확히는 솔의 아이디어였지만.

“결혼하기 힘드네, 참.”

알만 하다는 듯 준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도 그 말에 절실히 동의하는 바였다. 한가하게 떨어지는 별이나 보며 시간 죽이는 건 확실히 제 타입의 일이 아니므로.

끼익. 지하 통로로 매끄럽게 내려간 SUV가 주차 라인에 맞춰 깔끔하게 세워졌다.

오후 다섯 시 반. 예상보다 꽤 늦어진 복귀 시간이었다.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사무실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올라가면 아까 자료 받은 것 좀 바로 보내 주라. JK 비서실에서 정관 변경 급하다고 어제부터 계속 전화 오고 난리야.”

“안 변한테 보낼게. 절차조항 겨우 두 줄인데, 어쏘가 해도 충분하잖아.”

“아냐. 바로 솔이한테 보내 줘. 나더러 직접 챙겨 달래, 회장님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르며 밀린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저를 쳐다보는 준한의 시선이 무슨 타박인지 잘 알면서도 현서는 못 본 척 액정을 두드렸다.

“너 그거 아냐?”

“뭘.”

“어쏘들끼리 경쟁붙은 거. 서로 차현서 어쏘 하시겠다고.”

“왜. 이왕이면 다들 훌륭한 변호사 밑에서 일하고 싶대?

“암. 훌륭하지. 칼퇴 보장해 주는 파트너 변호사가 어디 흔한가.”

고저 없이 돌아오는 무심한 한마디에 준한이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로펌에서 제시간에 퇴근하는 사람 딱 둘이잖아. 대표님이랑 차현서 어쏘.”

“내 업무 다른 사람이 만지는 거 싫어. 못 미덥기도 하고.”

“오죽하시겠어요. 차현서 기준으론 대표님이래도 못 미덥겠지.”

얼음 같던 현서의 얼굴에 그제야 핏, 헛웃음이 샌다.

“나 먼저 간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준한은 손을 흔들며 휙 사라졌다. 그녀도 보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또각또각. 발걸음을 내딛다 무심코 내려다본 종아리에 실금 같은 스크래치가 선명했다. 출근길에 이미 한 번 갈아신은 스타킹 올이 또 나간 거였다.

내려가 1층 편의점에서 새로 하나 사 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냥 몇 시간 더 버티기로 한다. 어차피 지금부턴 혼자 사무실에 처박혀 야근이나 하다 집에 들어갈 건데, 싶어서.

곧장 사무실에 들어섰다.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솔이 문을 빼꼼 열고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변호사님. 저, 회의실에서 손님이 기다리시는데요.”

예정에 없던 클라이언트인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되물었다.

“누군데?”

“골드스톤요.”

“지사장님껜 내일 내가 직접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아니요. 지사장님이 아니고요.”

“그럼?”

“본부장이요. 아시아 본부장, 라이언 서래요.”

“누구?”

낯설고도 당황스러운 이의 등장에 잠시 사고가 멈췄다.

“본부장이 직접? 왜?”

솔은 모르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좀 떠름했다. 이번 뷰티큐브의 인수 합병 건이 제법 컸고 또 성공적이긴 했지만, 전 세계 기업 인수 합병을 하루에도 수 건씩 해 대는 글로벌한 양반들께서 굳이 이 누추한 곳까지, 그것도 일개 파트너 변호사를 만나러 직접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기분이 여간 싸한 게 아니었다.

곧장 대회의실로 향했다. 골드스톤 본부장이 왔단 소식에 대표가 상담실이 아닌 제일 큰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내준 모양이었다.

똑똑.

간결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담겼다. 시선이 절로 고정됐다. 준수하다 못해 우월한 체격이 시야를 압도했다.

각진 어깨와 길게 뻗은 다리를 응시하며 어렴풋이 경제지나 인터넷 기사에서 스쳐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혀끝을 차며 악랄한 새끼가 예쁘게도 생겼다고 빈정거리던 준한의 말뿐, 관심도 주지 않았던 그 얼굴은 도통 기억도 나질 않았다.

미국인이라 했던가, 유럽계 혼혈이라 했던가. 위협적일 만큼 건장한 그 뒤태가 희미한 기억마저 왜곡시키고 있었다.

황량하리만큼 넓은 회의실엔 이미 짙은 밤빛이 가득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현서는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요란하지도, 무례하지도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안녕하십니까. 차현서입니다.”

타박타박.

느긋한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다가와 선 남자에게선 오묘한 스킨 향이 짙게 풍겼다. 낯선 향에 현혹되어 저도 모르게 넋 놓고 그를 올려다봤다.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던 얼굴이, 은은한 할로겐 조명에 비쳐 점차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곧고 진한 눈썹과 그 아래, 느릿하게 움직이는 눈꺼풀. 짙은 눈매와 빚어 깎은 듯 오뚝하게 뻗은 콧대. 다소 날카롭지만 남자답게 단단해 보이는 턱선까지. 눈을 떼지 못할 준수함이었다.

기실 잘생겼다는 뻔하고 단순한 표현만으론 좀 부족했다. 어디 한 군데 빈틈이라곤 찾을 수도 없을 얼굴이었으니까. 어쩐지 숨이 막혔다.

인사를 알아듣긴 한 건지. 꽤 한참이나 빤히 제 얼굴만 응시하던 남자가 느긋이 입술을 뗐다.

“드디어 뵙네요.”

“…….”

“말로만 듣던 차현서 변호사님.”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을 듣고 왔기에 이토록 사람을 무례하게 빤히 보는가. 먹잇감을 관망하는 맹수처럼 고압적인 시선이 빗발쳤다.

“반갑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네. 반갑습니다.”

짧게 닿은 그의 손은 커다랗고, 단단하고, 뜨거웠다.

“이번 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꼭 한번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벼르고 있었던 사람의 어조에 가까우면 가까웠지.

“앉으시죠.”

앉으라 권유하며 자신이 먼저 상석에 기대어 앉는다. 어쩐지 호스트와 게스트가 뒤바뀌었다.

정중함과 무례함의 경계가 모호했다. 아니. 일부러 상대를 위압해 기선을 제압하려는 불순한 의도는 조금도 없이, 그저 이 불손한 애티튜드가 몸에 배어 자연스러운 남자였다. 시종일관 내보이는 그 여유와 오만이 제 옷처럼 잘 어울린다. 바라보는 내내, 그의 주변 공기만 밀도를 달리하며 빽빽해져 있는 것 같단 착각에 시달렸을 만큼.

왠지 불안했다. 이런 류의 성향을 썩 모르지는 않았으나, 눈앞의 남자는 조금 더 당황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다분히 오만무례해서라는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좀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이 불길함을 더하는 거였다.

이상한 사람.

“절 찾으셨다고요.”

본론을 묻자 그가 퍽 불량하게 긴 다리를 꼬아 앉았다.

“가만 보면 한국 사람들이 정 많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아요. 양아치 고를 때도 기왕이면 익숙하고 눈에 익은 놈으로 고르는 거 보면.”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 올리는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악마 같다고 해야 할지. 이 역시 경계가 불분명했다.

“꽤 오래전부터 한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HHR이 혼자서 선점하고 있었죠. 자금 회수율 면에서나 수익률 면에서나 우리 골드스톤에 한참 못 미치고. 심지어 퍽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덴데요, 거기가.”

설핏 헛웃음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골드스톤이 인간적인 경영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던가.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국 사람들은 HHR만 찾는단 말이죠, 무안할 정도로.”

짐작해 보건대 자신들도 이제 한국 시장에 뛰어들어서 본격적으로 해 처먹어 보고 싶다, 뭐 그런 소리를 늘어놓으려는 모양이었다. 이번 M&A가 성공적으로 잘 끝나면 골드스톤이 본격적으로 한국 진출을 할 거라는 증권가 지라시로 떠돌던 말들이 영 틀린 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내게 하고픈 말이 뭔가.

좀처럼 그 의도를 알기 힘든 그의 눈을 가만히, 되묻듯 바라봤다.

“차 변호사님께서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무심코 그 까만 무저갱 속으로 영원히 빨려들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퇴로도 주지 않고 엉켜 오는 시선이 차마 피할 수도 없이 단단했다.

“뭘, 어떻게 말씀이시죠?”

“여기선 얼마나 받으십니까?”

마침내 할 말을 잃고 헛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속 모를 사람의 질문치고는 지나치게 노골적이어서 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스카우트 제의를 하시는 건가요?”

“제의라는 단어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거부를 못 하실 텐데.”

이 자신감의 근원 또한 권력인 걸까. 그는 태연히도 눈앞의 상대를 걱정하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제의는 감사합니다.”

완곡 화법으로 거절하려는 제 의도를 읽어 낸 남자는, 이미 이어질 말을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턱을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기대하셨던 답은 못 드릴 것 같습니다.”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제안이라는 듯 되레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거부 못 할 조건이라는 게 연봉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건 이미 대한민국 최고 수준으로 받고 있어서요. 게다가 ‘청송’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울타리를 굳이 박차고 나가기엔, 이제 막 한국에 진출한 골드스톤은 좀 모험이니까요, 저에겐.”

솔직히 말하자면, 덧붙인 말은 이상한 오기 때문이다.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남자가 이유 없이 못마땅하게 느껴져서였다.

“자신 있으시네. 얼마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죄송하지만 제가 물욕이 크게 없습니다.”

남자의 한쪽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차현서 변호사님.”

듣기 좋게 제 이름을 부르는 저음의 목소리에 입술을 감쳐물었다.

“빚 청산하고 싶잖아요. 50억, 그거.”

남자는 뱀처럼 웃으며 유혹해 왔다.

역시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본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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