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116화
마계(4)
“마계의 끝이라…….”
그렇게 말을 하는 최진혁의 앞에는 전신이 성한 곳이 없는 알타로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가만히 놓아둘 최진혁이 아니었다.
“이봐, 그래서 그 마계의 끝은 어떻게 가야 하는 거냐.”
“으으…… 그건…… 그건…….”
“후우, 됐다. 그럼 길 안내나 해라.”
마계의 드높은 마족 대공이 한낱 내비게이션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불쌍하게 여기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마족을 벌레만도 못 하게 여기는 네 명의 정령왕은 물론이고 지구에서부터 마족에게 시달려 온 김혜진과 도경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신성한 세계수를 모시는 엘프인 엘리쟈는 그런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백미는 단연 루더슨이었다. 애초에 마족을 벌레로 여기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취향 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벌레가 싫다고 벌레를 하나하나 박멸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루더슨은 그런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였다.
아니, 그들보다 더했다. 루더슨은 벌레를 모조리 박멸하면 벌레가 있는 소굴까지 찾아가 박멸을 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그가 지금 벌레를 앞에 두고 참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초인적인 인내심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벌레는 쓸모 있는 벌레라는 점도 한몫했다.
자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쓸모 있는 벌레 말이다.
“내가 위치는 말했을지언정 그런 하급 마족이나 할 것 같은 일을 할 것 같…… 구나. 하겠다, 꼭 하겠다!”
하지만 그런 벌레가 일을 거부하겠다고 하자 루더슨의 눈에선 자동으로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루더슨의 화가 그의 딸인 루미에게까지 전염이 되었는지 루미마저 공중에 떠서 팔짱을 낀 채, 알타로스를 노려보았다.
루미의 힘은 물론이고 방금까지 루더슨 덕분에 느낀 고통을 상기한 알타로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굴하게 웃으면서 꼭 하고 싶다며 간청해 왔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최진혁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 대표는 당연하게도 실피드였다.
“뭘 어쩌겠나. 바로 마신에게 간다.”
-하아, 역시 너란 녀석은…….
“불만 있나?”
-됐다. 그냥 빨리 처리하고 정령계로 돌아가고 싶을 따름이다. 이곳은 너무…… 별로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실피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계의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마기가 담긴 먼지들 때문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미세먼지와 비슷할 것이다. 누구보다 순수한 정령이라는 점 때문에 실피드는 더더욱 불쾌감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 실피드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김혜진이 말했다.
“맞아, 아저씨. 실피드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왕들도 그렇고 나랑 엘리쟈도 조금 힘들어, 이곳은.”
정령은 그 무엇보다 순수한 존재이지만 반대로 마기는 그 무엇보다 삿된 존재다.
그리고 지금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마기의 농도는 평소보다 더더욱 짙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마기의 총본산이나 다름없는 마신이 마계에 현신해 있기 때문이었다.
마계의 주인이 마신이니 최진혁 일행에게는 압박을 주면서 자신의 부하인 마족들에게는 힘을 더 실어주기 위해서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김혜진의 말에 최진혁은 고개를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다른 정령왕들의 안색도 그렇게 썩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도 말은 안 했지만 김혜진의 말에 동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기에 최진혁은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조금 더 서두르기로 하지.”
“진짜? 아저씨 고마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최진혁의 말에 김혜진이 반색했다.
본의 아니게 모든 정령들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김혜진은 정령신이기에 정령왕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맘 편히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최진혁이 페이스를 올리겠다고 말하자 당연히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차피 마족 녀석들이 제대로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쓸어버리는 편이 더 편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최진혁은 주저앉아서 헥헥대고 있는 알타로스의 목덜미를 덥썩 잡아 들었다.
자신보다 덩치도 작은 최진혁이 그 두 배는 되는 자신을 번쩍 들자 알타로스는 겁먹은 강아지 꼴이 되어서 최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마…… 말로 합시다! 말로!”
“마신의 신전으로 우릴 안내해라, 당장!”
“하…… 하겠습니다!”
최진혁의 서슬 퍼런 안광에 알타로스는 자신의 바지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쾅! 콰릉! 쩌저적! 쿠르릉!
“마신이시여! 저희를 돌봐…… 켁!”
“건방진 녀석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마신께서 너희들을 심판…… 켁!”
알타로스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대로 최진혁 일행이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백 명이 넘는 마족이 나타나 일행의 길목을 막아섰다.
마치 무협 소설에서 보던 녹림의 일원들처럼 길목을 막아선 마족들은 최진혁 일행에게 돈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요구했고, 당연하게도 자연재해들 속에서 마치 믹서기에 던져진 과일들처럼 정령왕들이 일으킨 자연재해에 갈려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침입자인 최진혁들의 손에 잡혀서 내비게이션 노릇을 하고 있는 알타로스를 욕하면서 죽어갔다.
“네놈이 그러고도 대공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느냐!”
“자작, 하다못해 남작들조차 목숨을 걸고 있거늘! 마신께서 네놈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보면서 알타로스는 속으로 짜증을 냈다. 그가 겪은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게 편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편한 편이었다. 만약 알타로스가 내비게이션 노릇을 자처하지 않았다면 마족에게는 죽음보다도 더욱 끔찍한 고통을 계속해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할 정도로 알타로스는 여유롭지 않았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지?”
주위에서 수백이 넘는 마족들이 갈려 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얼굴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최진혁의 모습에 알타로스는 자신이 마족인지 눈앞의 최진혁이 마족인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저기로 가면 됩니다.”
하지만 알타로스는 두려움을 꾹 누르고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알타로스의 그런 모습에 최진혁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휘적휘적 그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언뜻 보면 빈틈이 가득한 모습이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숫자를 보고 겁먹지 않을 이가 세상에 있을까?’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무방비 상태로 걷는 최진혁의 주위에는 열 기가 넘는 둠 나이트들이 최진혁을 호위하듯이 서 있었으며 그 뒤로는 해골마에 올라탄 데스나이트들이 둠 나이트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게 끝이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둠 나이트들이 최진혁을 호위하는 것처럼 수백의 듀라한들이 데스나이트들을 호위하듯이 서 있었으며 그런 듀라한들의 옆에는 벤시들과 스켈레톤들이 오와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마치 왕의 행차라도 되는 것처럼 최진혁을 따라 걷는 그들의 모습에 알타로스는 반항은커녕 순응하는 것을 택했다.
자신의 동족을 배신하고 자신이 믿는 신을 배신하는 결과를 택하더라도 말이다.
“안 오고 뭐 하나?”
“가…… 갑니다!”
그렇게 알타로스는 비굴함과 함께 목숨을 얻었다.
물론 그 목숨이 얼마나 될지는 알타로스 그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수천, 수만을 넘어서 수십만이 넘는 마족들과 그런 마족들보다도 수십 배는 많은 몬스터들을 베어내고 터뜨리고 갈아내면서 전진한 최진혁 일행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후우, 삐까뻔쩍하네요.”
“그러게, 돈도 많지.”
“……신도 돈을 쓰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황폐한 마계의 땅 위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이 지어져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범함이 느껴지는 성을 보면서 여태까지 훌륭하게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준 알타로스에게 최진혁이 물었다.
“저기가 마신의 기거하는 곳인가?”
“마…… 맞습니다.”
“수고했다.”
확답이 떨어지자마자 최진혁은 알타로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더니 수박처럼 터뜨려 버렸다.
뇌수에 손이 범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는 이들 중 그 모습을 보면서 역겨워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최진혁은 묵묵히 손을 털고는 저 멀리 보이는 마신의 성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최진혁의 뒤를 다른 일행들도 쫓기 시작했다.
* * *
“확실히 마신의 영역 주변이라 그런지 마족들의 수준이 높아 보이기는 하는군.”
최진혁의 말대로 마신의 성 주위를 원으로 빙 둘러싼 마족들의 수준은 최소 백작급 이상으로 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몬스터들도 그에 비슷했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지구의 평범한(?) S급 헌터나 SS급 헌터였다면, 아니, SSS급 헌터였을지라도 이 포위망을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있는 이들은 S급이니 SSS급이니 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버러지들아 뒤져라.
쿠우우웅!
말 한마디에 땅에서 흙 주먹이 솟아 올라와 마족들을 후려쳤고.
-잿더미가 되어라! 꺄하핫!
말 한마디에 거대한 청염이 피어올라 마족들을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바람이여, 우리의 앞을 막는 적들을 분쇄해라.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베어내는 칼날과도 같은 폭풍이 마족들을 휘감았다.
-물들이여, 그대들의 왕으로서 명합니다. 저들을 제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세요.
말 한마디에 땅 위에서 마족들은 숨이 막혀서 죽는 기이한 일을 겪게 되었다.
이렇게 네 정령왕의 힘으로 5할에 달하는 마족들이 손 쓸 새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다고 나머지 5할은 잘 살아 있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죽어!”
파앙! 파앙! 파앙!
도경수가 주먹을 한 번 내뻗을 때마다 부채꼴 방향에 서 있는 마족들의 몸이 터져 나갔으며.
“불.”
“그리고 바람이여.”
김혜진과 엘리쟈의 부름에 답한 불과 바람이 한곳으로 모여들더니 이내 둘이서 하나, 하나가 둘이 되어 마족들의 중심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백미는 다름 아니라 최진혁이었다.
“가라, 나의 군대여. 나의 적을 처단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삿된 것들을 지워 버려라.”
-주인님의 명을 따릅니다.
-주인님의 명을 따릅니다.
-크륵, 크르륵!
-카아아악!
최진혁의 말 한마디에 수천, 수만이 넘는 군세가 오와 열을 갖춰서 성큼성큼 마족들을 향해 전진했고, 그 뒤는 다들 알다시피 학살의 시작이었다.
백작급의 마족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후작급의 마족들조차 물량은 물론이고 질까지 갖춘 언데드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최진혁의 군세가 마족들의 원형진을 밀고 나갈 때였다.
“거기까지.”
누군가가 최진혁의 군세를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