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113화
마계(1)
-왜 이렇게 늦었어?
-쯧, 내가 늦은 게 아니라 저 녀석들이 늦은 거다, 이프리트.
-그게 그거지 뭐.
-……그럼 다 모인 건가?
-너희들 빼고 진즉에 다 모여 있었어.
“미안하게 되었군. 이 녀석이 워낙 비바람에 몸을 맡겨서.”
“……죄송합니다.”
최진혁의 말에 비바람에 몸을 맡겼던(?) 도경수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를 해왔다.
갑작스러운 도경수의 사과에 핀잔을 주던 이프리트조차도 깜짝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실피드 녀석 좀 골리려고 한 말에 네가 답하면 어떻게 해…….
“아, 그런가요?”
-그래, 됐으니까 가서 아무 데나 앉아.
“예, 감사합니다.”
이프리트의 말에 도경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의자에 앉았고, 그런 도경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르면서 김혜진이 핀잔을 주며 도경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 이제 회의를 시작하겠다.”
-그런데 무엇에 대해서 회의를 하는 거지?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손을 번쩍 들고 말하는 실피드의 말에 최진혁은 덤덤하게 답했다.
“마신과 악신에 대한 처리 문제다.”
-하아? 우리 정령계가 그들을 처리하는 데에 도움을 줘야 하는 이유가 뭐지?
“이유는 김혜진과 엘리쟈가 말해줄 거다.”
-……이런 망할!
현재 엘프 왕국은 지구에 있고, 김혜진의 고향도 지구다.
그리고 그런 지구를 마신과 악신이 접수할 기회만 보고 있었으니 실피드로서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욕만 할 뿐이었다.
그런 실피드를 뒤로한 채, 최진혁이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가 직접 마계로 가는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
-하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마계에 가면 우리 정령들의 힘이 대폭 감소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까 전에 김혜진에게 재밌는 사실을 들어서 말이야. 이 계획에 실현 가능성이 생겼다.”
당당한 최진혁의 말에 실피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 김혜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령신이시여 그 재밌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윽, 그렇게 말하니까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 같네.”
“뜸 들이지 말고 아까 내게 한 말 그대로 말해라.”
“에헤이, 알았어. 전대 정령신의 기억을 얻으면서 깨달은 건데. 너희들이 다른 세상으로 갔을 때 힘이 약해지는 건 정령신이 없어서일 거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령신이시여.
“그러니까 너희들이 정령계 밖으로 나가면 약해지는 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게 다 심연의 존재인지 뭐시긴지가 너희 기억을 지워서 그런 거야.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이 정령계에서 나가면 약해지는 게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거지.”
-그러면 정령신께서 하신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응, 너희들은 이제 정령계 밖으로 나가도 패널티가 없어. 나랑 엘리쟈가 있는 한은.
-오…… 오오오!
김혜진의 말에 실피드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정령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여지껏 자신들이 정령계에서 나갈 때마다 사라지던 힘을 당연하게 여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들의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사실에 소름 끼쳐 했다.
정령이 소름 끼치는 것도 우습지만 말이다.
“……정령계에서는 신보다 강한 너희들의 기억까지 조작했다는 사실이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군.”
-……우리도 마찬가지다. 설마 우리도 모르는 새에 기억이 조작당해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지.
“하아, 그런 녀석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군.”
정령왕들의 기억을 그 자신들조차 수천 년 동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조작을 해버린 심연의 존재들의 저력에 최진혁은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그들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천하의 최진혁조차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사이에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룬 최진혁이었지만 아직 정령왕 하나 정도밖에 상대할 수 없었다.
물론 언데드들까지 모조리 동원한다면 넷 모두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넷보다 아득할 정도로 강력한 심연의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진혁은 머리가 아파왔다.
“후우, 그래도 해야겠지. 그러기 위해서 강해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 힘내고. 열심히 응원해 줄게.
“무슨 소리냐? 너희도 당연히 함께다.
-……전대 정령신께서도 그 녀석들에게 당해서 한 줌 핏물이 되셨다. 그런데 우리가 뭐 어쩌라고?
“그렇기에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말대로 나는 지금 전대 정령신보다 약한데 그런 나 혼자서 그 녀석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흐음.
“나도 함께하겠다.”
최진혁의 말에 실피드가 고민하던 사이 묵묵히 앉아 있던 루더슨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도경수도 손을 들었다.
“루더슨 씨가 가면 저도 가겠습니다.”
“오빠도 가? 그러면 나도!”
“……진혁이 가면 나도…….”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김혜진과 엘리쟈도 찬성표를 던졌다.
-이…… 이런…….
그렇게 두 명의 새로운 정령신의 찬성에 실피드는 반대고 찬성이고 할 것 없이 자동으로 찬성이 되었다.
* * *
-하아, 그래서 곧장 마계로 쳐들어가겠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말이 안 될 게 뭐가 있지? 아니면 그들을 이곳에 불러서 싸우는 게 나은가?”
-……그냥 마계로 가자, 가. 이 망할 자식아.
최진혁을 설득해 보려고 하던 실피드는 결국 본전도 찾지 못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억지로 설득을 얻어낸 최진혁이 다른 정령왕들을 보면서 물었다.
“너희는 어떻지?”
-……뭐, 우리 의견은 존중해 주게? 안 간다 하면 안 가는 거야?
“아니, 예의상 물어보는 거다.”
-에라이, 네가 마신 해라 그냥. 여기 마신이 있었네.
악독한 최진혁의 모습에 이프리트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질색하며 손가락으로 최진혁을 가리켰다.
그런 이프리트의 모습에도 최진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나머지 정령왕들을 바라봤지만 앞에서 이미 봤던 터라 다른 정령왕들도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럼 결정되었군.”
그렇게 말하면서 최진혁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덟 쌍의 눈을 마주 봤다.
“우리는 마계로 간다.”
그리고 마계로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마계에 가는 방법은 아는 거지?
“…….”
바로 마계로 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중요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아홉 개의 머리를 맞대었지만…….
“후우,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가?”
-애초에 차원을 넘는 일이다. 정령과 인간의 계약처럼 무언가 이어진 매개체도 없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지. 그것도 우리는 공격을 위해서 넘어가는 거다. 마계에서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것도 그렇군. 하아,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내가 도와줄게.”
실피드의 말에 최진혁이 한숨을 푹 내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되는 장소에서 들리자 최진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했다.
“오랜만?”
“……루프르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니라 루프르스였다.
“응, 그래 루프르스 맞는데? 왜 신기해? 내가 여기에 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뭐지?”
“헤에? 이유가 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너도 짐작하고 있는 거 있잖아. 그거 맞아.”
“마계에 가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거냐?”
“응, 내가 직접 잡아주진 않는다?”
“하! 거기까지는 필요도 없다. 우리 전력이라면 충분히 마신 하나 정도는 때려잡을 수 있으니까.”
“호오…… 그래? 그럼 알았어. 다들 여기 모여봐.”
그렇게 말한 루프르스는 사탕을 쪽쪽 빨면서 사람들과 정령왕들을 한군데로 모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한 가지 말해주는데 마계는 지구나 정령계와 많이 다르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마신이 너희들을 벼르고 있어서 마계 전역에 마족들이 깔려 있으니까 조심해. 최소 백작에, 엉덩이 무거운 공작들도 나섰다?”
“……뭐?”
드넓은 마계 전체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마족들이 깔려 있다는 말에 최진혁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프르스의 말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거기에 한번 마족들에게 걸리면 끝도 없이 몰려올 마족들을 상대할 것도 각오해야 하고…….”
“……또 있나?”
“응, 당연하지. 그러다가 너희들 힘 빠지면 마신이 나타날 거야.”
“하아,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을…….”
예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려던 최진혁은 이어지는 루프르스의 말에 말하는 것을 멈췄다.
“참고로 말하면 악신 룬 샤드도 거기 있다?”
“뭐? 잠깐…….”
“그럼 바이바이!”
루프르스의 말에 최진혁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루프르스는 정령왕들과 인간들로 구성된 특이한 파티를 마계로 보내 버렸다.
그렇게 정령왕 없는 정령계 홀로 남겨진 루프르스는 조금 전까지 최진혁 일행들이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사탕을 핥았다.
그리고 그런 루프르스를 향해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여어, 루프르스. 저번에 맞은 상처는 괜찮나 보네?”
“……꺼져. 확 죽여 버리기 전에. 니 딸랑이는 어디에 두고 혼자서 왔냐?”
“흐하하하, 역시나 재미있어. 영원에 가까운 잠을 자서 그런지 너와 하는 대화는 언제나 즐겁군.”
사내는 말을 하면서도 루프르스를 향해 걸어왔고…….
푸스스스-
사내가 걸어온 길 주변에 있는 풀과 꽃들이 죽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루프르스가 인상을 쓰며 손을 휘저었다.
파아아앗!
그리고 빛무리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재가 되어 휘날리던 풀과 꽃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기를 수십여 번. 사내는 루프르스가 있는 정자에 도착해 루프르스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번 녀석은 괜찮나 보네?”
“쯧, 이번에야말로 죽여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하하,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는 한 약해질지언정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 루프르스?”
“……잊었을 리가.”
그런 특성 덕분에 루프르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었기에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전성기에 비하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약해져 있음에도 살아 있는 이유였다.
“그래서 마계로 보낸 건가?”
“그래, 얼마 전에 눈치챘거든. 네 충실한 멍멍이가 무슨 계획을 꾸미는지 말이야.”
“그 녀석은 참 일도 잘하고 내 말도 잘 듣는데 그 과잉 충성이 문제란 말이지. 난 아직 일어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잘난 부하를 둔 내 잘못이지. 안 그런가?”
“닥치고 꺼져. 용건이 뭐야?”
“그저…… 곧 있으면 다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말이야. 할 말은 이게 다다. 그럼 조만간 다시 보지.”
그 말만 남긴 채, 사내는 재가 되어서 사라졌다. 그런 사내를 바라보면서 루프르스가 씹어뱉듯이 사내의 이름을 말했다.
“망할, 아자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