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106화
정령계(4)
“정령계? 갑자기 웬 정령계?”
-다른 정령왕들에게 동의를 얻은 사안이다. 물론 네가 거부한다면 가지 않아도 된다.
실피드의 갑작스러운 정령계 초대를 받은 김혜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엘리쟈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엘리쟈.”
“응? 왜?”
최진혁과의 해후를 나누고 있던 엘리쟈는 갑자기 김혜진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김혜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너는 어때? 정령계에 갈래?”
“으음…… 나는 아직 할 일도 많고…… 거의 왕 대리 수준이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어맛!”
현재 엘리쟈는 엘라드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탓에 상당한 양의 국무가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최진혁을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잠시 나와 있지만 곧 다시 돌아가 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정령계로 훌쩍 떠날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뇨?”
-정령계는 현계와 시간 차이가 있다. 그것도 어마어마할 정도로 말이야. 우리가 괜히 계약자들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정령계는 우리에게는 지루하거든.
“흐음…… 대충 어느 정도의 시차가 있죠?”
-정령계에서 1년은 현계에서 1일이다.
“와…….”
그리고 이어진 실피드의 말에 엘리쟈는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무려 365 : 1의 비율이라는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그 정도라면 가볼 만했다. 며칠 정도야 엘라드에게 미뤄두면 되니까 말이다. 그렇게 엘리쟈가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정령이 아닌 사람이 정령계로 갈 수 있나? 여태까지 많은 서적들을 읽었지만 정령계에 갔다는 사람이나 요정들이 있다는 말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최진혁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최진혁의 말에 엘리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바로 자신들의 안전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정령왕들이 계약자인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정령계라는 낯선 환경이 자신들에게 안전한지는 다른 문제였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정령계는 너희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이 말은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앞서 말했던 시차 문제도 약속하도록 하지.
드래곤의 맹세와 비슷한 정령왕의 약속에 최진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실피드가 저 약속을 어긴다면 한 줄기의 바람이 되어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둘을 정령계로 데려가려는 것이지? 무슨 이유라도 있나?”
-……그건 말해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렬이로군.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는 채, 다른 세계로 내 동료들을 보낼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면서 김혜진과 엘리쟈를 자신의 등 뒤로 감추는 최진혁의 모습에 실피드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도 아니라 최진혁 쪽에서 반대하고 나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실피드가 한숨을 내뱉으면서 말했다.
-시험 때문이다.
“시험?”
-그래, 지금은 사라져 버린 정령신의 시험이다. 정확하게는 그 환생을 찾는 시험이지.
“그, 루프르스의 전 후임이라고 했던?”
-그래. 그 사람, 아니, 그 신이 맞다. 심연의 존재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실피드의 말에 주위가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최진혁은 정령신의 일이 마냥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초대 알케미가 본 미래의 그도 심연의 존재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시험으로 환생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나?”
-그건 우리도 모른다.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두 사람이 그의 환생인지는 어떻게 알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저 막연한 추측일 뿐. 다만 너희 둘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에 최진혁의 등 뒤에 숨어 있던 김혜진이 반응해 왔다.
“가능성? 무슨 가능성?!”
-너희들이 정령신의 환생 혹은 영혼의 일부라는 가능성을 말이다.
“우리가 그중에 하나라면 어떻게 되는데?”
-정령신의 힘을 물려받고 기억도 물려받게 되겠지. 정령계에서 신의 자리를 맡고 있는 우리 네 정령왕을 합친 것보다도 강력했던 정령신의 힘과 기억을 말이다.
실피드의 말에 김혜진과 엘리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거절하기에는 무척이나 달콤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또다시 최진혁이 막아서며 말했다.
“이제 메리트는 알았으니 디메리트도 말해보시지?”
-쯧…….
날카로운 일침에 실피드가 혀를 찼다. 말하려고는 했으나 이렇게 추궁당하니 마치 자신이 악역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만약 시험에 들어간 너희가 정령신의 환생 혹은 영혼의 일부가 아닐 경우…… 생존을 장담하지 못한다.
콰득!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우리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실피드의 말에 최진혁의 발치가 박살이 나 있었다. 폭음에 놀란 도경수가 최진혁을 향해 달려와 물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길드장님.”
“지금 실피드가 한 말을 그대로 말해주지. 정령신의 시험을 김혜진과 엘리쟈에게 보라고 권하더군.”
“……그래서요?”
“그 시험이 실패하면 시험을 본 두 사람의 생명은 장담하지 못한다고 하더군.”
“……실피드, 그 말이 사실입니까?”
최진혁의 설명에 도경수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생명을 담보로 걸고 시험에 응하라는 말에 화가 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기에 도경수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것이 대련과 수련으로 친해진 이라면 더더욱 배신감에 화가 날 것이다. 도경수의 그런 반응에 실피드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선택은 둘의 자유라고 말이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 명심하게.
그 말을 끝으로 실피드는 정령계로 돌아갔다. 자신이 여기에 있으면 제대로 된 회의가 안 될 거라면서 말이다.
물론 결정되면 자신을 부르라는 말을 남겼다. 그것이 거절이든 승낙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게 실피드가 사라진 자리에 최진혁을 비롯해서 이 일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았다.
이 소식은 엘라드에게도 전해졌고 간단히 사정을 들은 엘라드는 한걸음에 달려와 회의에 참석했다.
엘리쟈는 그의 딸이었으니 그도 이 회의에 참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면 정령신의 시험에 김혜진과 엘리쟈를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 말을 좀 해보도록 하지.”
이 말을 시작으로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었다.
시작은 최진혁이었다.
“나는 반대다. 애초에 목숨을 거는 일에 찬성을 하는 미친놈은 없을 거라고 본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혜진이가 고작 그런 일에 목숨을 거는 걸 전 찬성할 수 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일세. 엘리쟈는 내 뒤를 이어 왕국을 다스릴 하나뿐인 후계자. 그런 딸을 사지에 밀어 넣을 수는 없네.”
그리고 최진혁의 뒤를 이어 도경수와 엘라드가 반대에 표를 던졌다.
두 사람 다 김혜진과 엘리쟈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반대가 있으면 찬성도 있는 법. 찬성도 많이 존재했다.
“나는 이 둘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지간한 신들보다 강했던 이의 힘과 기억을 얻는 대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난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걸고도 신의 힘은커녕 9서클이나 소드엠퍼러에도 오르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답은 나왔지 않나?”
루더슨의 그 말에 찬성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저도 찬성합니다. 주인님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은 죄송하나 앞으로 있을 전쟁에서 그 힘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될 텐데 얻지 않는다면 앞으로 주인님께서 많이 힘들어지실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찬성합니다.”
미셸도 찬성에 표를 던졌고.
“나는 가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서 이제부터는 내가 뭘 해도 내 실력은 늘지 않을 거야. 지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도 그 힘을 얻는다면 아저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도 혜진이 말에 찬성. 아빠하고 국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진혁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당사자인 김혜진과 엘리쟈마저 찬성에 손을 들었다.
그렇게 되자 반대를 하고 나선 세 사람은 수적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열심히 반대 의견을 내놓았지만…….
“우리가 간다는데 왜 다른 사람이 난리야! 아저씨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엘프 아저씨도 그렇고!!”
김혜진의 그 말에 세 사람은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애초에 이 회의는 김혜진과 엘리쟈가 찬성을 내놓은 시점에서 끝났어야 했다.
둘이 가는 것이지 나머지도 같이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은 안 했지만 엘리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김혜진에 말에 반대를 하지는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선택을 세 사람은 존중하기로 했다. 두 사람 다 성인이고 자신들의 길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대신 조건이 있다. 우리도 간다.”
“뭐? 아저씨가 거길 왜 가!”
“애초에 한 번쯤은 정령계가 가보고 싶었으니 잘됐군.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있는 게 나을 거다.”
“……으휴, 알았어. 그럼 정령계까지만 같이 가자.”
“나도! 나도 갈래!”
“그럼 오빠랑 아저씨랑…… 또 누구 갈 사람 있어요?”
“루더슨도 같이 간다.”
“헤에, 그럼 이렇게 셋?”
그렇게 정령계로 함께 갈 파티가 꾸려졌다. 루더슨, 최진혁, 도경수 이렇게 셋으로 말이다.
사실 엘라드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아빠는 나 대신 일해야지!”
엘리쟈의 반대에 부딪쳐서 무산이 되었다.
이렇게 회의가 끝이 나자 최진혁은 실피드를 불렀다.
“정했다, 실피드.”
그리고 최진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정했나? 둘 다 가나? 아니면 한 명만? 그것도 아니라면 둘 다 안 가는 건가?
“둘 다 간다.”
최진혁의 말에 굳어 있던 실피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극과 극의 반응에 최진혁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실피드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빨리 가도록 하지.
“잠깐, 할 말이 있다.”
-음? 뭐지? 원하는 거라도 있나?
“우리 쪽에서 몇 명 더 같이 가기로 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아…… 알았다. 몇 명이나 더 가는 거지? 많으면 곤란하다. 정령계는 때 묻지 않은 세계. 정령사들을 데려가는 것도 꽤나 오염을 감수하는 일이다. 물론 처리가 가능한 오염이긴 하다만…… 다섯 명은 넘지 않았으면 하는군.
“적당하군. 우리 쪽에서는 세 명이 간다. 나와 도경수 그리고 루더슨 이렇게 셋이다.”
-알겠다. 그럼 바로 갈 텐가?
“뭐…… 여기서 더 볼일도 없으니 바로 가도록 하지.”
-아, 그리고 한 가지 말 안 한 게 있는데…… 정령계에서는 언데드를 소환하지 마라.
“유의하지.”
최진혁의 말에 실피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으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렸다. 그리고 이내 원은 커다란 포탈이 되었다.
-가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실피드는 포탈로 몸을 던졌고, 그런 실피드의 뒤를 따라서 최진혁을 필두로 한 일행들이 포탈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