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88화
엘릭서(3)
-후우…… 내 한 조각 남은 영혼이 방금 그 녀석 때문에 사라질 뻔했군.
‘괜찮은 건가? 그래도 살려뒀다고 했으니 그 정도까지는 안 갔을…….’
그 말을 들은 초대 알케미가 최진혁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이 나를 일부러 살려줬을 것 같나? 다 내가 살기 위해서, 정보를 하나라도 더 남기기 위해서 발버둥 친 덕분에 살아남은 걸세. 아마 내가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지 않았다면 나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걸세.
‘……음, 일리가 있군.’
사실 심연의 존재가 초대 알케미를 일부러 살려뒀다는 말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최진혁이었다.
척 보기에도 흉포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초대 알케미의 입을 막으려 하던 존재가 작별 인사를 하라며 살려두다니?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최진혁이었기에 이제야 초대 알케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얼마나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지?’
-……본래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는 대화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기껏해야 5분에서 10분 정도일 거다.
‘갈 길이 멀군. 중요한 내용부터 설명해 봐라.’
-일단 네가 신이 된 다음부터의 일은 조금 전의 충격으로 다 날아가 버린 탓에 말해주고 싶어도 말을 해줄 수가 없다.
‘……그럼 뭘 말해줄 수 있지?’
-이거 하나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군. 내가 본 미래에서 자네는 언제나 홀로 다녔어. 물론 자네가 독불장군의 성격이란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과 협력해야 해. 지금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다가는 내가 본 미래와 같이 죽음에 이를 것이네.
‘……난 이미 일곱 번째 마왕을 루더슨과 아르타, 그리고 루와 협력해서 쓰러뜨렸다. 이건 협력이 아닌가?’
-뭐라고!? 자네가 일곱 번째 마왕을 쓰러뜨린 장소가 어디인가?
‘신성 제국에서 쓰러뜨렸다. 거기에 신성력과 마기가 공존하는 물건도 얻었지.’
-……내가 본 미래와 다르군. 내가 본 미래에서 자네는 아무도 없는 사막의 황무지에서 그와 결투를 벌이고 승리했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말이야.
최진혁이 협력을 했다는 말에 잠시 당황해하던 초대 알케미는 이내 껄껄 웃으면서 기뻐했다.
-내가 말을 해주기 전에 이미 자네는 훌륭하게 미래를 바꾸어가고 있군. 자네가 신이 된 이후의 일은 지금은 모르지만 아마 그때까지도 자네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했던 것 같네. 심연의 존재들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도 말일세.
‘……지금이랑은 정반대로군.’
지금의 최진혁은 혼자가 아니었다.
정령사인 김혜진이 있었으며 타고난 배틀메이지인 도경수와 무뚝뚝하지만, 자신의 할 일을 잘하는 김민식이 있었고 성격이 호탕한 성지혁도 있었다.
또한, 지금은 미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윌리엄 에반스와 리치인 미셸까지도 있었다.
최진혁의 곁에 있는 이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말딘 대륙에서 온 이종족들 또한 최진혁과 함께했다.
엘프인 엘라드와 엘리쟈 그리고 카린, 드워프 킹 두르간. 거기에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루더슨마저도 최진혁의 곁에 있었다.
또한, 신성 제국의 교황과도 연이 생겼다. 이미 초대 알케미가 본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기에 최진혁은 자신이 정말로 바뀌었다는 것을 다시 체감할 수 있었다.
아마 초대 알케미가 본 모습은 자신이 아르말딘 대륙에 있을 시절의 성격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미래를 바꾼다고 한들 자네가 죽는다는 미래가 바뀌었을지는 모르네. 물론 엘릭서를 이용해서 미래를 볼 수도 있겠지만…….
‘……난 아직 죽을 생각이 없다.’
-흐하하하, 그래. 자네 같은 걸출한 인재가 고작 미래를 보겠다고 목숨을 내놓아서는 안 될 일이지. 안 그런가? 그리고 이미 자네는 엘릭서를 모조리 흡수했네. 이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어.
‘상관없다. 애초에 볼 생각이 없었으니.’
사실 조금은 있었으나 초대 알케미에게 전해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최진혁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고이 접어두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그래도 이제 한 발자국 남았군.
‘아니, 두 발자국이다.’
9서클을 목표로 두고 말하는 초대 알케미의 말에 최진혁은 두 걸음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 최진혁의 단호한 모습에 초대 알케미는 큭큭 웃으면서 수긍했다.
-그렇지…… 자네는 9서클 따위에 만족할 만한 인재가 아니지. 희대의 인재라고 불렸던 나조차 9서클에는 다다르지 못했는데 말이야. 자네는 두 번이나 오르는군. 거기에 9서클에 만족을 하지 않고 그 위를 바라보다니…… 그 열정과 패기가 부러울 따름이야.
‘……이미 한 번 올라봤으니 두 번째는 수월할 뿐이다.’
-아니지. 자네의 재능은 인정받을 만하지만 9서클의 벽은 재능만으로 오르는 것이 아닐세. 운 또한 필요하지. 자네도 모르진 않을 텐데? 9서클까지 오르다 한순간 삐끗하면 존경받는 8서클 대마법사에서 0서클의 폐인이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
초대 알케미의 말에 최진혁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이유 때문에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르말딘 대륙 시절 최진혁이 9서클에 오를 때에도 천운이 따랐기 때문에 오를 수 있었다.
9서클을 만드는 데 필요한 마나는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마나가 조금이라도 통제를 벗어난다면 나머지 8개의 서클을 모조리 망가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뛰어난 마나 컨트롤 능력 덕분에 그런 위기를 잘 모면하고 최진혁은 9서클에 오를 수 있었다.
다만 그때 당시에 느꼈던 섬뜩함만큼은 지금도 최진혁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9서클에 오를 방도는 찾았나? 아직 마나가 조금 부족할 텐데 말이야.
‘그래도 마왕의 심장 하나쯤이면 충분한 양이다. 시간이 필요할 뿐.’
-그러고 보니 일곱 번째 마왕을 자네가 잡았으니 마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래. 이제 알케미에 자리를 잡고 9서클에 올라볼 생각이다.’
-빠르게 오르는 게 좋을 게다. 나머지 6마왕의 소환은 그리 멀지 않았어.
초대 알케미의 조언에 최진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최진혁의 반응이 싫지만은 않은지 초대 알케미는 껄껄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해왔다.
-그럼 이걸로 우리의 대화는 끝을 내도록 하지. 슬슬 기억들이 흐릿해져 가고 있어.
‘……대화 즐거웠다.’
-흐하하하, 나도 즐거웠네. 수백 년 만의 즐거움이었어. 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아 있기를 바라겠네.
그 말을 끝으로 초대 알케미의 목소리는 두 번 다시 들리지 않았다.
초대 알케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최진혁은 감았던 두 눈을 슬며시 떴다.
“완전히 사라진 건가…….”
“……대체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눈을 뜬 최진혁이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자 최진혁을 기다리던 알케미가 이상한 얼굴로 최진혁을 쳐다봤다.
“초대 알케미를 봤다. 정확하게는 목소리만을 들은 거지만 말이다.”
“……그분은 죽었습니다만?”
“엘릭서의 자신의 사념을 남겨두었더군. 덕분에 대화를 좀 나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에 사념을 남겨두는 방법이 실존했다니! 대체 어떻게 하신 거랍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는 말해준 게 없다.”
“그럴 수가…….”
최진혁의 말에 알케미는 마치 세상을 잃은 것처럼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런 알케미를 뒤로한 채, 최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루더슨을 보며 말했다.
“루더슨.”
“응?”
“초대 알케미가 그러더군. 나는 미래에 죽는다고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죽어? 대체 누가?”
9서클에 버금가는 위치인 소드엠퍼러인 자신조차도 작정하고 도망치는 최진혁을 잡을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그런 그를 죽인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루더슨의 머릿속을 지배할 때, 최진혁의 입이 열렸다.
“심연의 존재라더군. 그리고 실제로 만나도 봤다.”
그렇게 말을 하는 최진혁의 전신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런 최진혁의 상태에 루더슨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떨 정도로 위협적인 상대였나?”
“나는 여태껏 그렇게 어두운 존재는 본 적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강함에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의 본체가 아니라는 말에 나는 한 줄기 남은 자존심으로 그를 도발하듯이 한마디 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최진혁이 그런 말을 하자 루더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신인 루와 가이아의 앞에서도 당당하던 최진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물론 루와 가이아는 최진혁의 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살기나 기운을 내뿜지 않은 덕분도 있지만 자칫하면 루와 가이아의 손짓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최진혁은 허리 한 번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반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그런 최진혁이 심연의 존재에 대해서 저리 부정적으로 말하자 루더슨의 마음속에서도 스멀스멀 불안감이라는 것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에 루더슨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자 최진혁은 자신의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다. 초대 알케미는 내가 그런 심연의 존재들 손에 죽는다고 했지만…… 나는 죽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충분히 미래를 바꿔 나가고 있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더더욱.”
“……미래를 바꾸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알케미가 본 미래는 어디까지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 내가 바뀌지 않고 갔다면 이루어질 미래였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초대 알케미가 본 것과는 달리 많이 바뀌어 있다. 일단 나는 혼자가 아니었고, 초대 알케미는 엘릭서라는 안배를 남겼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지금부터 계속 바꾸어 나가면 되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본래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돌아온 최진혁의 모습에 루더슨 또한 언제 안색을 굳혔냐는 듯이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최진혁에게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 무얼 할 계획이지? 아니, 애당초 계획은 있나? 미래를 들었다고는 하나 네 입으로 직접 그 미래를 바꾸겠다 했으니…….”
“아니, 미래는 내가 죽는 그 순간만 바꿀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질 미래는 최대한 바꾸지 않는 식으로 가야겠지. 그래야 대비하기가 쉬울 테니까.”
“흠……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래서 이 이후로 벌어진 일은 무엇이 있지?”
“각 나라의 지배자들이 폭주하고 그들의 폭주로 세계의 인과율이 나머지 6마왕 전부가 현신할 정도로 풀어진다.”
“……그 말은?”
“그래, 6마왕이 전부 지구에 소환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마 용병 왕국 기르신을 비롯한 기사 제국 세레스 그리고 마도 왕국 알타논이겠지.”
“기르신이 알케미를 침공해 오겠군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알케미가 최진혁에게 물어왔고, 알케미의 질문에 최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후우, 저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요. 물건에 사념을 담는 방법이 궁금하긴 합니다만…… 우리나라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니…… 죄송하지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알케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먼저 돌아갔다. 그런 알케미의 뒷모습을 보면서 루더슨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기르신을 어떻게 할 생각이지?”
“부숴야지. 그래야 최대한 6마왕이 소환될 시기가 늦춰질 테니.”
“……아무리 알케미가 도와준다고는 하나 알케미와 기르신 사이의 무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전술 병기나 마찬가지인 내가 돕는다고 해도…….”
“그래, 게릴라전이 특기인 그들을 한 번에 일망타진하기는 힘들겠지.”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지?”
루더슨의 물음에 최진혁이 게릴라전이 특기인 용병들을 한곳에 모으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의 본진을 친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겠지? 아무리 너와 나라고 해도 하나의 왕국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아니, 네가 아르말딘 시절의 실력을 되찾는다면 무리는…… 잠시만, 설마?”
다짜고짜 본진을 친다는 최진혁의 말에 루더슨은 부정의 의사를 표하다가 이내 최진혁의 의도를 읽어내고 놀라워했다.
“……9서클에 오를 생각인 것이냐.”
“그래. 얼마 전에 얻은 도미닉의 심장. 그것으로 부족한 나머지를 채우고 나는…… 전성기의 능력을 되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