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71화
재회(4)
“그런데 대체 1년간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엘프 포레스트를 걸으면서 카린이 최진혁에게 물어왔다.
내심 아닌 척했지만 그래도 지난 1년간 최진혁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 카린의 물음에 최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내저었다.
“나에게는 1년이 아니라 몇 시간이었다. 그러니 더는 묻지 마라.”
안 그래도 루프르스 덕분에 1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날려 버린 것에 대해서 화가 덜 풀려 있었다.
최진혁은 자신에게 1년간 무얼 했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다.
최진혁의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카린은 조용히 입을 닫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왔을 때와 길이 조금 다른 것 같다만?”
“아, 저희 엘프 포레스트는 매일 매일 길을 바꾸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침입을 막기 위해서죠. 그래서 방문객들이 올 일이 있다면 저희 쪽에서 길잡이를 보냅니다.”
“네가 길잡이인가?”
“아뇨, 원래라면 제가 길잡이를 할 일은 없죠. 다만 최진혁 님은 보통이 아니시니까 제가 직접 길잡이로 나선 겁니다. 본래라면 제 밑에 부하 중 하나가 길잡이를 맡습니다.”
“길잡이들만 길을 잃지 않는 게 아닌가?”
“아뇨, 엘프들은 엘프 포레스트 내에서 절대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저 계급순으로 길잡이 맡는 것이죠. 저도 옛날에는 길잡이였습니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이제는 수백 년 전 이야기까지 하려는 카린을 최진혁이 제지했다.
“됐다. 네 어릴 적 이야기를 내가 들어서 어디 쓸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나빠요!”
하지만 그런 쌀쌀맞은 최진혁의 태도에 뒤에 서 있던 김혜진이 빽! 소리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미안해요. 아저씨가 원래 좀 이래요.”
“아…… 괜찮습니다.”
“근데…… 저는 그 이야기 궁금한데 저한테 해주면 안 돼요?”
“물론이죠!”
평소 티브이에서나 보던 엘프를 직접 본 것도 모자라서 그런 엘프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김혜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기에 카린도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찬가지로 상기되어 있었다.
꺅꺅거리면서 좋아하는 두 소녀(한 명은 수백 살 먹은 할머니지만)의 모습에 최진혁은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길 안내만 늦추지 마라.”
“당연하죠!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엘프 궁수대의 대장 카린입니다! 이런 수다 조금 떤다고 제 발걸음은 늦춰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예 목소리 톤까지 높아진 카린의 모습에 최진혁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진혁의 뒤를 어느새 얼굴이 해쓱해진 도경수가 뒤따랐다.
“하아…… 큰일이네.”
“음? 무슨 일 있나?”
“혜진이…… 한 번 물꼬 터지면 기본 세 시간인데…….”
“…….”
도경수의 그 말에 최진혁의 고개가 홱 돌아갔고, 그런 최진혁의 눈이 닿은 곳에는 어느새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한 명의 엘프와 한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 * *
“분명 길 안내를 늦추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카린의 말과는 달리 카린은 김혜진과의 대화를 길 안내보다 우선시했고, 그 결과 최진혁 일행은 저번보다 한 시간은 더 걸려서야 엘프 왕국 바로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이 논 탓인지 김혜진은 최진혁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는 카린을 두둔했다.
“에이! 뭐라고 하지 마~ 우리가 바쁜 건…….”
“지금도 엘리쟈는…….”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하지만 두둔하러 나선 김혜진은 최진혁의 입에서 엘리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K.O 넉다운 당해버렸다.
워낙에 지은 죄가 있다 보니 김혜진에게 있어서 엘리쟈라는 이름은 현재로서는 듣기만 해도 고개가 절로 숙어지는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최진혁의 말에 김혜진을 비롯한 카린이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도경수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나섰다.
“에이, 최진혁 씨는 또 왜 그러십니까?”
“됐다. 이제 그만 올라가지. 어차피 더 할 말도 없으니.”
“가시죠!”
흥미가 사라진 최진혁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세계수 정상에 있는 엘프 왕국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나뭇잎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도경수가 뒤따랐고, 그 뒤를 이어서 어깨가 축 늘어진 김혜진이 탔다.
“어라? 카린 씨는 안 올라가세요?”
“저는 그곳에 올라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혼자 가시죠.”
“아? 아저씨, 카린도 같이 올라가면 안 돼요? 네?”
“그건 내가 어찌할 부분이 아니다. 이건 엘프 왕국의 법이니까.”
“무슨 그런 법이…….”
법에 따라 카린은 자신들과 같이 갈 수 없다는 말에 김혜진이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엘프 왕국의 법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었기에 최진혁이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었다.
엘프 왕국의 왕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엘프 귀족들. 즉 어느 정도 혈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카린의 경우에는 엘프 궁수대의 대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기는 하나 엄연한 일반 엘프였다.
왕족의 피가 단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면 귀족이 될 수 없기에 카린은 웬만한 일로는 왕성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면 그때쯤은 갈 수 있겠지만, 엘프들은 드래곤에 버금가는 수명을 가진 종족이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려면 못해도 수백 년, 많게는 수천 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이번 생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었다.
“헤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카린 씨 그러면 좀 이따가 내려와서 봬요. 이야기 재밌게 들었어요!”
“네, 하지만 저는 다시 안개 쪽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나중에 뵙도록 하죠.”
하지만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카린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맴돌아 있었다.
그런 둘의 애절한(?) 모습에 최진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카린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이 올라타 있는 잎사귀로 끌어올렸다.
“하아, 그냥 너도 올라타라.”
“예? 하지만 저는…….”
“일반 엘프겠지. 알 바 아니니까 올라와라. 저 녀석 또 찡찡거리는 모습 보기 싫으니까. 어차피 엘리쟈 때문에 한 번 엎을 거 그냥 너도 올라와라.”
“……네.”
최진혁의 강압적인 말투에 카린은 흠칫한 얼굴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홍조가 맺혀 있었다.
김혜진 또한 마찬가지로 카린과 같이 올라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방긋 웃으면서 카린의 손을 맞잡았다.
“카린! 이야기! 이야기 더 해주세요!”
“좋아요.”
그리고 나뭇잎 위에 올라탄 둘은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루더슨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뭇잎 위에 올라섰다.
“원래 여자들은 다 저러한가?”
“……혜진이가 원래 좀 특별합니다.”
“엘프들도 마찬가지지. 보통은 말을 많이 하지 않지만 한 번 열리면 참아온 만큼 말을 한다고들 하지.”
최진혁과 도경수의 질린 듯한 얼굴에 루더슨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렇게 조용한 남자 셋과 수다스러운 여자 둘을 태운 나뭇잎은 하늘로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미셸은 어디에 있지?”
“미셸은 지금 미국에 있을 겁니다. 윌리엄 총협회장님께서 미국이 위험에 빠졌다면서 한 6개월 전쯤에 데려가셨죠.”
“흐음, 그 자의 곁이라면 확실히 미셸도 괄목상대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테니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군.”
“현재 미국이 지옥 그 자체라고 봐도 될 정도라는 것만 빼면 말이죠.”
“그 정도인가?”
“예, 미국은 지금 대통령이 사라지고 그 땅덩어리가 절반으로 갈라져서 미친 듯이 싸우고 있죠. 낮게는 C~B급 헌터들이 높게는 A급에서 S급 헌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흑마법사이며 네크로멘서인 미셸에게는 천국이겠군.”
“맞습니다. 죽을 고비가 사방에 존재하는 곳이 현재 미국이지만 미셸의 경우에는 다르죠. 물론 미셸에게도 위기는 똑같이 찾아오지만 리턴과 리스크가 다르죠.”
미국이 현재 이등분되어서 모든 헌터들이 미친 듯이 싸우고 미친 듯이 죽어 나가고 있지만 그만큼 성장하는 속도도 남달랐다.
그중에서도 죽음을 다루는 네크로멘서인 미셸의 성장은 가히 압도적일 것이다.
거기에 윌리엄 에반스라는 괜찮은, 아니, 걸출한 이가 옆에 있으니 더더욱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터였기에 최진혁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 미셸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현재 최진혁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되살려 낼 수 있다.
거기에 미셸이 강해질 수 있다면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할 의향이 최진혁에게는 있었다.
“그래도 그만큼 빠른 속도로 강해질 수 있겠지. 그러면 괜찮다.”
“뭐, 아무리 미국이 위험하다고는 하나 미셸도 충분히 강하니까요.”
“시체들이 널린 곳에서 네크로멘서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 아, 네 녀석이 있군.”
그렇게 말하면서 최진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서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더슨을 쳐다봤다.
시체로 둘러싸인 곳에서도 네크로멘서를 이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바로 루더슨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에 얼마 전 인천에서의 싸움에서도 대단한 몬스터들의 시체로 둘러싸인 곳에서 네크로멘서의 정점인 최진혁과 막상막하로 싸운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최진혁을 압도했었다.
“음? 날 불렀나?”
“아니, 됐다. 넌 그냥 밑이나 보고 있어라.”
“……알았다.”
최진혁의 말에 고개를 돌려 최진혁을 바라본 루더슨은 최진혁의 싸늘한 말에 안색을 굳히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다음에 미셸을 볼 때가 기대되는군.”
못해도 7서클에는 올라왔을 때의 미셸을 기대하면서 최진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태운 나뭇잎은 거침없이 하늘로 치솟았고,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 무렵 끝이 없이 올라갈 것 같던 나뭇잎이 우뚝 멈췄다.
“이제 도착했군.”
“……죄송합니다.”
“됐다. 거기에 대해서는 끝났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이렇게 늦은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탓도 있었으니 올라오면서 김혜진과의 대화로 밝게 웃고 있던 카린의 얼굴이 다시 침울해졌다.
그러자 최진혁은 혀를 차면서 그런 카린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엘프 왕성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런 최진혁의 모습에 카린은 밝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빠르게 사라지는 최진혁의 뒤를 쫓아 따라붙었고, 그것은 루더슨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 같이 가요!”
“혼자만 가지 마시죠. 최진혁 씨.”
“……우리는 이곳의 길을 모른다.”
아쉽게도 최진혁과 카린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길을 몰랐기에 둘의 뒤를 따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