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40화
던전 브레이크(1)
“그래서 우리를 어떻게 이 세상에 녹아들게 하겠다는 거지? 사실 이런 탁한 공기 따위는 우리에게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아.”
“그렇겠지. 세계수의 정화 능력이라면 세계수 주변만이 아니라 이 지구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테니까.”
“네 말이 맞아.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공기 따위가 아니라 이곳 세계의 주민들이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권할 것이 있다.”
“권한다라…… 무엇을 말이지?”
엘프 킹은 최진혁의 말에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흥미를 보였다.
죽음의 군주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만큼 최진혁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권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헌터가 되어보는 게 어떤가?”
“헌터? 사냥꾼을 말하는 겐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여기서 헌터는 동물을 잡는 사냥꾼이 아니라 흉포한 몬스터를 잡는 사냥꾼을 말하는 거다. 이곳 지구에서 쓰는 말이지.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자들을 헌터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금 몬스터들과 싸우라고 하는 건가? 우리는 평화주의…….”
“평화주의라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너희들은 평화주의가 아니라 그저 적은 개체 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화주의자라는 틀을 뒤집어쓴 게 아닌가?”
구구절절 옳은 말에 엘프 킹은 고개를 푹 숙였다.
평화주의자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면서 싸움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엘프들은 절대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목숨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전쟁을 기피하는 것이었고 말이다.
즉, 싸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싸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 지구는 던전이라는 형식으로 마왕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일반인은 침략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모르고 있지만…… 하지만 몬스터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그렇기에 엘프들이 헌터가 된다면 그들은 너희를 그 누구보다 환영할 거다.”
“으음…….”
최진혁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전 세계는 헌터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고위 던전을 공략할 헌터 부족이었다.
급이 낮은 던전은 급이 높은 헌터가 가서 클리어해도 되지만 급이 높은 던전은 급이 낮은 헌터가 클리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급이 높은 던전은 부상자부터 시작해서 사상자까지도 다수가 발생했다.
안 그래도 적은 고위 헌터의 수가 S급 던전 등에 들어갈 때마다 한 명씩만 죽어도 그 손해는 막심했다.
그렇기에 전원 정령사들에 솜씨 좋은 궁수들로 이루어진 엘프 종족들이 헌터가 된다면 전 세계가 쌍수 들고 그들을 반길 것이 자명했다.
거기에 엘프 원로들은 모조리 상급 정령사였다. 헌터로 치자면 S급에서 SS급 헌터 수준의 강자들이었다. 거기에 정령왕과 계약한 최상급 정령사가 둘이나 있었다.
그 말인즉슨 여태까지 단 한 명만 존재했던 SSS급 헌터가 이제는 세 명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SS급 던전과 그 이상의 던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총협회장은 이들의 합류를 누구보다 먼저 찬성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내 종족들을 지킬 의무가 있네.”
“지구의 무구에 대해서 알고 있나?”
“드워프 정도의 무구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다지 쓸모가 없네.”
“그 정도의 무구들이 있다면?”
“……?!”
농 삼아 던진 말에 최진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 킹이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드워프가 누구인가? 하나하나가 장인의 반열에 든 종족들 아닌가?
그런 종족이 만든 무구와 비견될 만한 무구들이 있다니 아르말딘 대륙인 중 누가 들어도 놀랄 만한 말이었다.
“물론 마스터피스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르말딘 대륙의 다른 물건들보단 쓸모가 있을 거다. 생존율이 껑충 뛸 거다. 내가 장담하지.”
“으으음…….”
“강철로 만든 갑옷보다 가볍고 튼튼한 가죽 갑옷.”
“……?!”
“이 정도면 헌터, 할 만하지 않나?”
몬스터의 가죽에 다양한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강철 정도의 방어력을 가진 가죽 갑옷을 만들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보았던 최진혁은 엘프 킹에게 당당히 거래를 신청했다.
물론 신기술이나 다름없는 강철 갑옷급의 가죽 갑옷을 구하기는 무척이나 어렵겠지만 최진혁에게는 김민식과 성지혁이 있었기에 별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로도 구하지 못한다면 윌리엄 에반스라는 치트키도 있었으니까.
‘우리 종족이 싫어하는 강철을 쓰지 않고도 강철 정도의 방어력을 지닌 가죽 갑옷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 종족의 생존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엘프들은 자연을 사랑했기에 자연의 일부인 철을 캐고 가공해서 무기나 방어구로 만드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렇기에 철을 다루는 드워프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엘프들은 인간들조차도 가지고 있는 드워프제 무구들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가지지 못했다.
드워프들은 가죽도 다루긴 했지만, 자신들을 싫어하다 못해 경멸하는 엘프들에게 가죽 갑옷을 만들어줄 정도로 마음씨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프들은 직접 가죽 갑옷을 만들어서 사용했지만 활을 잘 쏘는 것과는 별개로 평범한 손재주를 가진 엘프들은 그다지 뛰어난 가죽 갑옷을 만들지 못했다.
거기에 날 때부터 가냘픈 몸은 방어력이라고는 전무했다.
그 탓에 엘프들은 뛰어난 방어구에 환장했다. 뛰어난 방어구는 곧 자신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인간이나 다른 이종족도 마찬가지였지만 엘프는 그 정도가 조금 심했다.
“알겠네. 하도록 하지.”
“저, 정말로 할 거야? 아빠?”
“그래, 해야지 별수 있겠느냐. 우리로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느냐. 뛰어난 방어구도 얻고 이곳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 그러면! 나 아르만…… 아니! 최진혁이랑 같이 다녀도 돼?”
“그래, 그러려무나.”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만?”
“흐허허, 나도 자네 말을 들어줬으니 자네도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나.”
“후우…… 알겠다.”
“야호!”
“대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체통을 지키거라.”
“에이, 그건 또 내가 잘하지! 나만 믿으라구!”
자신이 허락하고도 불안한지 엘프 킹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엘리쟈에게 다짐을 받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킹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리쟈는 회의장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최진혁의 옆에 섰다. 딸의 모습에 엘프 킹은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최진혁에게 부탁했다.
“못난 딸을 잘 부탁함세.”
“잘 부려먹도록 하지.”
“……알겠네.”
자신의 딸, 그것도 엘프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이자 대장로였다. 그런 이를 부려먹는다고 하니 미소가 지어질 리가 만무했다.
“……후우, 그러면 그 가죽 갑옷은 언제쯤 받을 수 있겠나? 자네가 말한 그 헌터 일을 하려면 그 가죽 갑옷을 받고 나서 시작하겠네.”
“그건 내가 지금 물어보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최진혁은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신기하게 생긴 전화기의 모양에 엘프 킹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면서 관심을 가졌지만 그런 엘프 킹을 무시하고 최진혁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민식입니다.
김민식이었다.
“나다. 최진혁.”
-아 최진혁 씨.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그래, 엘프들을 헌터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군요…… 가 아니라! 어떻게 한 겁니까?
“쯧, 귀청이 터지겠군.”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끌어들이신 겁니까?
“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인정을 받는 일까지도.”
-……그들이 저희를 공격할 마음이 없고 저희를 도와서 헌터 일을 해주겠다면 인정을 받게 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무엇을 주기로 한 겁니까?
“강철 갑옷 정도의 방어력을 가진 가죽 갑옷.”
-……그거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기술로 만든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거다. 뉴스에서 봤다.”
-하아, 알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한 겁니까?
“한…… 만 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기한은요?
“가죽 갑옷을 줘야 일을 하겠다고 하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계속해서 힘든 일만을 주시는군요…….
“SSS급 2명.”
-네?
“S급과 SS급 수십 명과 B급에서 A급 헌터 수천 명.”
-서…… 설마?
“이게 내가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엘프들의 전력이다.”
-……최대한 빠르게 구해오도록 하죠.
어마어마한 엘프들의 전력에 김민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결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최대한 빨리 구해 오…….”
-최진혁 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말을 하던 최진혁이 갑자기 말을 멈추자 김민식이 의아해했다. 그런 김민식을 제쳐두고 최진혁이 엘프 킹에게 말했다.
“엘라드, 너도 느꼈겠지?”
“……그래, 망할 마족들의 기운. 제대로 느꼈네.”
“그러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 기운으로 보자면 최소 후작급 여럿이다.”
“후작? 하! 우리 엘프들을 물로 보는 겐가?”
“그렇다면 이번 마족들은 엘프들에게 맡기도록 하지.”
“……분명 가죽 갑옷을 받고 나서부터라고 했을…….”
“선수금.”
“……쯧, 망할 놈 같으니. 장인을 떼어먹으려고…….”
“혼인을 올린다고 한 적 없다.”
은근슬쩍 장인이라고 말했지만 칼같이 쳐내는 최진혁의 모습에 엘프 킹, 엘라드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 엎드려 있는 엘프 원로들을 보면서 소리쳤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생각들이야!”
“크흠흠…….”
엘라드의 호통에 최진혁의 격에 짓눌려 기절했던 엘프 원로들이 무안한지 헛기침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들은 깨어난 지 꽤 되었다. 최진혁의 영혼의 격이 아무리 강대하다지만 극히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해야 5서클 마법사 수준인 최진혁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엘프 원로들이 빠르게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엘프 원로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횅해진 회의장을 바라보면서 엘라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자네를 보니 안타레스 님의 예언이 맞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안타레스? 세계수의 수호룡이자 처음으로 그린 드래곤 중에서 드래곤 로드가 된 예언자를 말하는 건가?”
하나로도 부족한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무려 세 개나 가지고 있기에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던 최진혁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드래곤이었다.
“꽤 자세하게 알고 있구만? 맞네.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다른 수호룡분들과는 달리 자신의 드래곤 하트를 건네주고 자연으로 돌아가셨네.”
“……설마?”
“그래, 언젠가 세상이 환란이 닥칠 때, 그것이 필요할 거라고 하셨다네. 그리고 지금 자네의 모습을 보니 역시 그분이 예언은 사실이라는 게 믿겨지는군.”
드래곤은 나이가 들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면 비늘 하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당연히 드래곤 하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드래곤 하트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죽여서 얻는 방법뿐이었지만 그 방법을 실행할 수 있었던 이는 역사서를 뒤져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최진혁도 현역 당시에 한두 개 정도는 구할 수 있었지만, 안타레스의 드래곤 하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때 당시 얻었던 드래곤 하트는 성룡이었다.
하지만 안타레스는 죽기 직전에 주었다고 했으니 고룡(에인션트 드래곤)이었다. 성룡의 드래곤 하트가 강물이라면 고룡의 드래곤 하트는 바다와 같았다.
그런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있다는 엘라드의 말에 최진혁의 두 눈이 마구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