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 헌터가 되다! 39화
엘프 포레스트(4)
“허어…… 엄청나게 크군요.”
“엘프들이 숲에 산다고 해서 검소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예,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엘리쟈의 안내에 따라 회의장 앞에 도착한 미셸은 거대한 나무로 이루어진 회의장의 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무척이나 고풍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탄만 하고 있을 거야? 문 열어.”
“…….”
“열어라.”
“넵! 알겠습니다!”
문을 열라는 엘리쟈의 말에 미셸은 최진혁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보다 강한 이인 것은 분명하나 자신의 옆에는 그녀가 충성을 맹세한 최진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미셸의 고민을 최진혁이 덜어주었다. 최진혁의 말에 미셸은 밝게 웃으면서 회의장 문을 벌컥 열었다.
무척이나 커다란 나무, 그것도 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어지간한 철문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6서클의 마법사답게 미셸은 신체 강화 마법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기에 무거운 나무문도 손쉽게 열 수 있었다.
끼이익-
그렇게 열린 회의장의 문 저편에는 이미 수많은 엘프들이 가득 착석해 있었다. 정확하게는 나이가 지긋한 엘프 원로들이 말이다.
그리고 회의장의 가장 상석에는 머리에 왕관을 쓴 엘프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르만.”
“쯧, 아직도 안 죽었나?”
“하하하, 아직 죽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아빠도 참!”
“엘리쟈, 너도 어서 자리에 앉거라. 네가 요청한 회의 아니더냐.”
“쳇, 알았어요.”
하이 엘프, 그중에서도 왕족은 특히나 수명이 길다.
일반 엘프들이 약 500년 정도를 산다면 보통의 하이 엘프들은 1,000년, 나아가서 왕족은 약 1,500~2,000년 정도를 산다.
물론 수명을 전부 다 채우고 죽는 엘프들이 손에 꼽기는 하지만 말이다.
종족의 왕이자 아버지인 엘프 킹의 말에 말괄량이 같던 엘리쟈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가서 착석했다.
엘리쟈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엘프 킹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 우리 죽음의 군주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지?”
“이런, 너무 싫어하는 것 아닌가?”
“내 딸이야 자네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네가 일반적인 흑마법사가 아니라지만, 내 눈에는 자네나 자네 옆에 있는 리치나 다를 바가 없네만.”
“……내가 엘리쟈의 청혼을 거절한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커흠흠! 그, 그럴 리가! 나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하는 사람…… 아니, 엘프일세!”
“후우, 역시 너는 왕의 자질이 떨어지는군. 팔불출 같으니.”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말하는 엘프 킹의 말을 믿는 사람과 리치, 그리고 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최진혁의 말이 이유로 들렸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자신을 불신에 찬 눈으로 쳐다보자 엘프 킹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입을 뗐다.
“커흠흠!! 그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부른 게 자네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네. 사실 엘리쟈가 대장로의 이름을 걸어가면서까지 회의를 요청한 게 처음이거든. 그리고 엘리쟈가 그렇게 열심히 도움을 주려는 사람은 세상에 자네뿐일 테니까.”
“아빠도 차암…….”
자신의 아버지인 엘프 킹의 말에 엘리쟈는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하지만 그런 엘리쟈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진혁은 말했다.
“그래, 내가 말한 것도 맞고 내가 부탁한 것도 맞다.”
“역시,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모은 이유를 말해주게나. 언제나 독불장군처럼 혼자 다녔던 자네가 이렇게 우리에게 손을 벌리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껄껄 웃으면서 말하는 말에 다른 엘프들도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살짝 웃었다.
아무리 세상 물정에 어두운 엘프들이라지만 대륙 전체에 퍼진 최진혁의 소문은 그들에게조차도 퍼져 있었다.
심지어 최진혁의 소문에 흠뻑 빠져서 팬이 된 엘프까지 있을 정도였다.
“쯧, 농담은 그만하지.”
“그래 사실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엘프 포레스트에 살고 있는 우리도 지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세계수와 그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나무를 엘프 포레스트라 칭한다. 그 엘프 포레스트는 현재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프 포레스트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통째로 차원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엘프들은 현재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피가 튀기는 전장이 가득한 아르말딘 대륙이었지만 공기 하나만은 무척이나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은 공기는커녕 탁한 공기로 가득한 지구에 오니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엘프 포레스트 바깥에 이상한 물건들을 들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들을 당황이라는 이름의 미궁 속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바뀌어 버린 차원에 대해서 논의를 하려고 할 때, 최진혁이 온 것이었다.
괜히 엘리쟈의 말에 회의장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미 회의장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회의를 시작하려 할 때, 때마침 엘리쟈의 정령들이 도착한 것이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너희도 얼추 이 상황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있겠군.”
“……마왕들이겠지. 아니, 정확히는 마신인가?”
“역시 지혜의 종족답게 추리력이 좋군. 맞다. 아마 너희들이 첫 타자일 거다. 그 뒤로 다른 이종족들을 비롯해서 아르말딘 대륙의 모든 것들이 이동할 테지.”
“……역시.”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는지 최진혁의 폭탄 발언에도 엘프 킹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런 사실들을 어찌 알고 있는 거지? 설마…….”
오직 아르말딘 대륙에서만 일어난 일들을 최진혁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엘프 킹은 의아해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최진혁의 옆에 서 있던 미셸에게 향했다.
“리치! 네놈, 마왕의 수하로구나!”
엘프 킹의 일갈과 함께 회의장 내부가 요동쳤다. 회의장에 모여 있던 원로들이 곧장 반응했기 때문이다.
백에 달하는 정령들이 회의장을 가득 채우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수십 초에 불과했다.
주위를 완벽하게 봉쇄한 채, 자신들의 친구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정령들의 모습을 보며 미셸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이미 죽은 자의 몸이었기에 마치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최, 최진혁 님…….”
제아무리 날고 기는 6서클 마법사라지만 이곳에 모인 원로들 중에 미셸보다 못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에 미셸의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상급 정령들은 미셸이 마법을 쓰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곧장 미셸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 상황에서 미셸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최진혁을 간절히 부르는 것뿐이었다.
“멈춰라.”
“……아르만, 자네가 아무리 내 딸의 사위가 될 사내라지만, 마왕의 수하를 엘프 포레스트에 들인 죄는 자네의 목숨으로도 부족하네. 지금 자네를 당장에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게.”
“왜 이 녀석이 ‘아직’까지 마왕의 수하라고 생각하지?”
“아직까지? 그렇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소린가?”
엘프 킹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하자 최진혁이 인상을 팍 쓰면서 말했다.
“이 녀석이 마왕의 수하라면 이 녀석의 주인인 나도 마왕의 수하라고 생각하는 건가?”
“크흠, 그건 아니네만…….”
“그리고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다.”
“……알겠네. 계속 말해보게.”
결국 최진혁의 말에 엘프 킹은 손을 들어서 정령들을 뒤로 물렀다. 정령들이 물러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미셸을 무시한 채, 최진혁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미셸의 라이프 베슬을 꺼내 들었다.
“이건 이 녀석의 라이프 베슬이다.”
“최, 최진혁 님……?”
갑작스러운 최진혁의 행동에 미셸의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정령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령들에게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박살 나더라도 라이프 베슬만 남아 있으면 얼마나 걸리든지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가 덜했다.
하지만 지금 엘프들이 최진혁의 손에 놓인 자신의 라이프 베슬을 깨뜨려 버리면 어떻게 손쓸 새도 없이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미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최진혁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수십이 넘는 엘프 원로들에게 소리쳤다.
“나는 죽음의 군주, 아르만이다. 그런 내가 마왕을 죽이면 죽였지 그 아래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눈을 희번덕뜨면서 말하는 최진혁의 모습에 엘프 원로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몸의 내부가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쿨럭…….”
그와 함께 피를 토하는 이가 속출했다. 그리고 피를 토한 이들의 정령은 소환자의 정신이 흔들리자 역 소환당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을 넘어서 백에 달하던 정령들은 어느덧 열도 안 되는 수로 줄어들었다.
최진혁의 말 한마디로 이뤄낸 일에 피를 토하지 않은 이들 중 하나인 엘프 킹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최진혁을 바라보면서 힘없이 읊조렸다.
“……죽음의 군주 시절의 무위를 회복한 건 분명 아닐진대 도대체 어떻게……?”
“내 원래 몸은 잃었더라도 내 영혼은 건재하다. 그리고 5서클에 오르면서 반신이란 격을 갖춘 내 영혼의 힘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쿨럭, 물론 단점도 있지만…….”
“최, 최진혁 님?”
말을 하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는 최진혁의 모습에 옆에서 오들오들 떨던 미셸이 기겁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에 엘프 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정도의 힘에 그만한 단검조차 없다면 말이 안 되지. 물론 자네가 본래의 힘을 전부 되찾는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요원해 보이는군.”
최진혁의 말 한마디에 쓰러진 이들의 수준은 상급 정령사들이었다. 인간으로 치자면 6서클에서 7서클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두어 단계나 약한 이가 말 한마디로 피를 토하게 하고 주 전력인 정령까지 역소환했는데 리스크가 없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나?”
입가에 흐르고 있는 피를 옷소매로 닦으며 최진혁이 엘프 킹에게 물었다.
“충분하네.”
엘프 킹은 그리 말하면서 최진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지금부터 너희들이 이곳에서 잘 녹아들 수 있는 방법부터 알려주겠다.”
“경청하겠네.”
엘프 킹이 내민 손을 덥석 잡으면서 최진혁이 말했다. 방금까지 생사결이라도 낼 것처럼 굴던 둘의 급변한 모습에 미셸만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바, 방금까지 죽이려고 하시던 것 아닙니까?”
“원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라.”
“맞네. 사실 나도 리치를 그다지 싫어하지는 않아. 저 늙은이들이 성깔을 부려서 연극한 걸세.”
“……예?”
쓰러져 있는 엘프들에게 들리지 않게 큭큭거리면서 웃는 엘프 킹의 모습에 미셸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