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8화 (328/328)

종장

날이 좋아 갔던 미레 강변에서 페기는 아주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붉은 머리.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페기는 어렴풋이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사피르?”

짐작이 맞았는지 붉은 머리의 사내는 경황없는 투로 네에, 하고 대답했다. 아연한 기분에 휩싸인 페기는 그저 눈만 둥그렇게 뜰 뿐이었다.

사피르.

그는 오래전 페기의 음악 선생이었다.

나병이 심해진 뒤로 악기를 연주할 수 없게 된 레오폴트가 고르고 골라 라발에서 데려온 인물로, 특유의 온화한 성정이 페기와 제법 잘 맞았었다. 어린 제자가 자신의 경지를 넘어섰다며 성도를 떠난 이후로는 까맣게 잊고 살았던 사람인데, 이렇듯 우연찮게 마주치니 놀라울 수밖에.

“…붉은 머리는 여전하네요.”

페기는 여전히 놀라 떨떠름해진 기색으로 그의 머리칼을 눈짓했다. 기실 저 머리칼로 알아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페기는 살면서 저토록 새빨간 머리를 안드레아와 사피르 말고는 본 적이 없었다.

우연이어도 이 정도면 인연이다. 페기는 자연스레 강변에 앉아 사피르와 담소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잔뜩 얼어붙어 있었던 사피르도 점차 긴장이 풀리는지 제법 원활하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연주를 안 하신다고요?”

경악하는 사피르의 목소리에 페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망가진 왼손을 감싸는 오른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조금 들어갔다.

“아니, 어째서… 물론 이유가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늘 그녀의 피아노 연주에 칭찬을 아끼지 않던 인물답게 사피르는 온몸으로 아쉬운 티를 냈다.

“음악은 아직 즐기시는 거지요?”

“그럼요.”

실은 손이 망가진 뒤로 눈 닿는 곳에서 피아노는 모조리 치우고 연주회도 열지 않았으나 구태여 썩은 속을 다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의 흔쾌한 대꾸에 사피르는 마음이 조금 놓인 듯했다.

“옛날에 제가 늘 전하께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음악은 천사들의 언어라는.”

“…….”

“훌륭한 연주에선 그만한 황홀감이 느껴지곤 하지요. 부디 전하께서도 그런 감동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예의상 고개만 끄덕이려던 페기는 아직도 저를 열세 살 어린 제자로 보는 눈길을 마주하곤 멈칫했다. 늙은 스승의 눈에는 따스한 온정만이 가득했다.

사피르는 곧 치러질 교황 즉위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왔다고 했다. 백방에서 사람이 몰리는 날이 될 것이기에 아마도 우연한 만남은 오늘로 끝이리라. 페기는 짤막했던 조우를 뒤로 하고 성궁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자연스레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천사들의 언어.

그녀의 삶은 늘 그것을 좇아 온 과정이었다.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들었던 천사의 장중한 음성으로 걷기 시작한 사도의 길.

음악으로 다시금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연주의 길.

하지만 그녀에게 소명을 내려 주었던 천사는 죽어 사라졌고, 연주는 더 이상 불가하다. 이제는 무엇을 좇아야 하는가.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표했던 것들을 모두 쟁취한 그녀에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페기는 문득 제 앞에 놓인 길이 어떤 길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

새로운 날이 밝았다.

거룩한 새벽의 도시 오스피나는 전에 없이 들뜬 분위기였다. 거리마다 내걸린 기다란 천들과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색종이. 백방에서 구름처럼 몰려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성궁을 향해 꾸역꾸역 밀려들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앙겔리카 성궁의 백색 성벽이 유달리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주인공인 페기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단장하고 무거운 의복을 입는 내내 얼굴에는 시름만이 가득했다. 그런 모습을 예후르는 흐뭇하게만 지켜보고 있으니, 그를 향하는 페기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네가 나가는 건 어때?”

새로운 교황은 페기로 정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후르가 강하게 밀고 나간 것이었다.

“왜 또 그래. 이미 결정된 일이잖아.”

“하지만….”

페기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오므렸다.

어차피 교황으로서의 절대 권력은 원탁으로 이관될 예정이었다. 성좌에 오른다 한들 그녀는 만인으로부터 숭배받는 사도로서의 위용만 보여 주면 되었다. 언제나 빛나는 모습으로, 볕 닿지 않는 음지로까지 따스한 손길을 내뻗으며.

레오폴트에 비하면 의무는 줄고 자유는 늘어났다.

이는 곧 페기와 예후르, 차라 중 아무나 교황의 자리에 올라도 된다는 뜻.

더 이상 정치적 지도자일 필요가 없는 교황의 자리에 굳이 그녀가 올라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거추장스러운 의복이나, 만인의 앞으로 나아가 종종 해야 하는 연설은 예후르에게 더 걸맞았다.

하지만 예후르는 강경했다.

“내가 교황이 되면 탐보프에서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내가 미워서라도 교국의 일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으려 들겠지. 하지만 넌 아니야. 아무리 빌헬미나라 한들, 부활이란 전무후무한 기적을 일으킨 너에게 함부로 반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작금의 페기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사도의 표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죽었다는 점에서는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는 경외감을 느꼈다. 양극단의 감정을 자극했다는 점만으로 백방의 찬사를 받기 충분했다.

“넌 잘 해낼 거야.”

뚜벅뚜벅 걸어온 예후르가 손수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이참에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도 익숙해져 봐. 우리 결혼식에서도 이렇게 떨면 안 되잖아.”

그를 흘겨본 페기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살짝 때렸다. 예후르가 장난스럽게 윽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페기는 모른 척 그를 외면하며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추기경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황 성하.”

문턱을 넘어오는 그녀를 보고 클레멘스가 서둘러 예의를 차리자, 다른 추기경들도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페기는 절반쯤 익숙하고 나머지 절반쯤은 낯선 면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저 중에선 또 얼마나 살아남게 될까. 그녀는 클레멘스와 산딜라의 경쟁이 평화로우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제 뒤통수를 아주 거하게 치셨더군요.”

과연 클레멘스는 웃는 낯으로 속삭여 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산딜라 추기경이라니…. 이번에도 전하의 안목에 감탄할 뿐입니다.”

“칭찬이라면 달게 듣겠어요.”

산뜻하게 웃어 보인 페기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원탁의 서열대로 선 추기경들과 한마디씩 인사를 주고받다 보니,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차라였다.

차라는 홀로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나이 지긋한 추기경들조차 들뜬 기색을 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 갓 성인이 된 사도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페기로서도 오랜만에 마주하는 것이었다. 차라는 수일째 입궁을 거부해 왔고, 페기도 굳이 그를 찾지 않았다.

“…사고라고 들었어.”

파리한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네 말이라면 믿을게.”

“…….”

“정말 사고였어?”

페기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맞닿아 오는 차라의 눈빛은 일견 간절하기까지 보였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처럼.

“응.”

페기는 싱긋 웃었다. 잔뜩 긴장해 있었던 차라가 그제야 눈을 감으며 기나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실 따위 페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차라가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이제 예후르와 차라가 그녀의 뒤에 섰다.

추기경들이 순서대로 도열하고, 백색 갑옷을 차려입은 근위 기사들이 양옆을 지킨다.

그 선두에서 페기는 발을 내디뎠다.

저 멀리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는 복도.

한 발, 한 발 다가갈수록 아득하게 들려오는 환호성은 커져만 가고, 쏟아지는 빛은 한계를 모르고 부풀어만 간다.

페기는 최초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드러냈던 공의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는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꿈길을 걷기라도 하는 양 발아래는 폭신하고, 주위의 공기는 보드라웠다. 적어도 오늘 하루만은 세상 모든 것이 그녀에게 호의적인 것처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작.

새로운 인생.

새롭게 시작될 모든 것들이 저 너머에 있었다. 그녀는 기꺼이 빛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드는 가운데,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

아주 기이한 경험이었다.

눈앞은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데, 저를 반기고 환호하는 소리만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치 모든 오감이 청각으로 집중된 것만 같이.

소리의 세상에서 그녀는 하염없이 부유하는 꽃잎이고, 하염없이 가라앉는 돌이었다. 세상 모든 진귀한 것을 지닌 왕이면서, 세상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은자였다. 그녀는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사의 음성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면, 이것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래, 천사의 음성. 천사의 언어.

그녀는 비로소 이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세 번째 길임을 직감했다. 소리는 또 이렇게 오는 것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이번에도 순순하게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첫 번째가 정해진 소명이고 두 번째가 소명을 따르기로 한 스스로의 의지였다면 세 번째는 제 손으로 개척한 운명이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감은 줄도 몰랐던 눈을 뜨자, 높은 테라스 아래 개미 떼처럼 모인 군중이 보였다.

누구는 손을 흔들고, 누구는 눈물을 삼키고, 누구는 환호하고.

제각각임에도 모두가 그녀만을 바라본다. 그들의 세상에는 그녀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어두운 밤이 찾아온 망망대해에 유일한 등대라도 되는 것처럼.

사도의 정점에 올라 만인의 우상이 되어 버린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생경하기만 하다. 당혹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돌려 보자, 복도의 그늘 속에서 예후르가 조용히 응원의 미소를 보내왔다. 페기는 용기를 얻어 한 발 크게 앞으로 내디뎠다. 테라스 난간을 붙잡고 서자,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이 끓어오른다.

교황과 사도를 찬양하는 소리가 마치 지상에서 울려 퍼지는 승리의 나팔 소리와도 같다. 그리하여 머나먼 천사들의 고향에라도 가 닿을 것처럼.

페기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고개를 꺾어 올렸다.

이 길에서 나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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