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는 살려 줘.”
짙은 황혼이 몰려오는 때였다.
창밖 너른 하늘을 감싸 안은 저녁놀은 어느덧 서관의 집무실 안으로도 물결쳐 들어왔다. 창을 등지고 앉은 페기는 제 발치를 넘보는 붉은 물결을 그저 넋 놓고 지켜보았다. 고민의 타래는 속절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발 벗고 나서서 너를 도운 건 너를 가족으로 사랑했기 때문이고, 또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비올라가 죽기를 바란 적은 없어. 왜 꼭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 거야?”
“언제 또 화근이 될지 모르는 애야.”
“퀴테리아가 죽고 가문도 몰락했는데 걔 혼자서 무얼 하겠어. 그래도 정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내가 책임질게. 이름도 지우고 신분도 빼앗아서 아무도 모르는 저 다그마르 산맥에 처박아 둘게. 네게 위협이 되지 못하도록 내가 감시하면 되잖아. 응?”
차라는 전에 없이 간절한 얼굴로….
“레오의 유언이란 말이야.”
“…….”
“너한텐 원수였을지 몰라도, 나와 레오한텐 비올라도 가족이었어. 레오도 가 버린 마당에 비올라까지 죽어 버리는 걸 내가 어떻게 봐.”
꼭 울어 버릴 것만 같은 눈이었다. 성글게 짜인 감정들은 아직 이름을 붙일 만큼 여물지 못했으나, 훗날 원망으로 자라날 여지가 충분했다. 그 순간 차라의 눈빛에서 읽힌 미래가 그녀를 몹시 당혹게 했다.
언제나 충실하게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던 차라.
영원토록 추억할 레오폴트.
페기는 두 사람의 진심 어린 부탁을 받고도 매정하게 외면할 만큼 모질어질 수 없었다. 차라의 말대로 비올라는 이미 정치적인 실효성을 상실한 패였으며, 다시 재기할 가능성도 전무했다. 더 이상 죽이고 살리고의 의미가 없는 비올라 때문에 소중한 차라와의 관계를 어그러트릴 수는 없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심하던 페기는 불현듯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예후르가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해.”
그의 따뜻한 손길이 서늘해진 뺨을 감싸 왔다. 페기는 어리광을 피우는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에겐 확신이 필요했다.
“비올라 말이야.”
“…….”
“꼭 죽여야 할까?”
“차라가 다녀갔구나.”
그녀의 뺨에서 손을 떼어 낸 예후르가 저벅거리며 그녀의 옆자리에 가 앉았다. 페기는 심란한 표정으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차라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살려 주고 싶어. 거짓된 사도임이 공표된 이상 어디서든 위스누아의 비올라로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 더는 우리와 관계될 일도 없지 않을까?”
“안 돼.”
페기는 고개를 돌려 보았다. 표정이 사라진 예후르의 얼굴이 못내 서늘했다.
“그래, 네 말대로 어디 가서 위스누아의 비올라라 밝힌다면 돌팔매질이나 당하겠지. 하지만 거짓된 사도가 아니게 된다면?”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은, 비올라가 언제 불을 피워 낼지 모른다는 뜻이야.”
저절로 얼굴이 굳어졌다. 페기는 수습되지 않는 표정으로 간신히 입술만 달싹였다.
“하지만 그 앤 재능이 없다고….”
“사도로서의 재능이란 주입된 천사의 권능을 얼마나 높은 확률로 활용할 수 있을지의 여부야. 가능성이 높아도 활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어도 불을 피워 내기만 한다면 사도로서의 자격을 보이게 되는 거지.”
인간에게 부여된 ‘재능’의 뿌리는 뱀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천사였던 뱀이 갈가리 찢겨 나가 인간으로 퇴화했으므로, 그중 극소수의 인간에게서 까마득한 선조의 모습이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근본은 뱀인 바, 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 모든 인간에게는 미약하게나마 선조의 모습이 남아 있다. 운이 아주 좋다면 별 볼 일 없는 재능을 갖고도 천사의 권능을 품어 불을 피워 낼 수 있었다. 반대로 운이 나쁘다면 제법 괜찮은 재능을 지니고도 일평생 권능을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라는 불을 피워 내지 못하지. 하지만 재능으로만 따진다면 너나 안드레아, 심지어는 레오폴트보다도 월등한 사람이 바로 차라야. 그런 차라가 아직도 불을 피워 내지 못하는 건 차라의 잘못도, 그 애를 선택한 이슬라의 잘못도 아니야. 그저 지금까지 운이 좋지 않았을 뿐.”
그의 손끝으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운이 좋으면 안드레아처럼 사도로 각성하자마자 불을 피워 낼 수도 있어. 그게 아니라면 보통은 두 갈래야. 레오폴트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방법을 터득하게 되거나, 아니면 너처럼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불을 피워 내게 되거나.”
페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불을 피워 내지 못하여 심장이 꿰뚫렸던 그녀는 무덤에서 기어 올라온 뒤로 불을 피워 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죽음과도 가까운 경험보다 더한 충격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비올라는….”
“가능성이야 언제든 열려 있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앞날.
월등한 재능을 가진 차라가 죽을 때까지 불을 피워 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어느 날 비올라가 속에 품고만 있던 천사의 권능을 만인에게 내보일 가능성도 존재했다. 비올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상, 페기는 언제 자신의 대항마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차라도 결국은 네 입장을 이해해 줄 거야.”
예후르가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고민하던 페기가 말없이 일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 것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저녁놀이 달아난 사위는 어느덧 밤의 어둠으로 묻히고 있었다.
페기는 컴컴하게 어두워진 복도를 거침없이 걸었다. 기척 없이 따라붙은 호위가 촛대를 쥔 손을 내뻗으니, 그녀의 앞으로 둥근 불빛이 형성되었다. 페기는 그렇게 서관을 나와 성 나르세스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덟 대성당으로 둘러싸인 드넓은 광장 위에 희미한 조각달이 떴다.
광장에 깔린 하얀 대리석은 미약한 달빛을 받아 윤이 흐르고,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가는 밤하늘은 대리석의 반사광을 머금은 것처럼 별빛을 쏜다. 순례자들이 빠져나간 광장은 인적 없이 적요했고, 다만 문이 열려 있는 세 개의 대성당 속 성화만이 고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페기는 그중 성 예리엘 대성당 앞에 섰다.
“…죄인은.”
“내일 새벽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호위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페기는 어딘지 흐릿해진 눈을 깜박였다.
“곧 새로운 교황이 선포될 시기에 성도에서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사형은 성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집행될 것이라고 공표하도록.”
“…….”
“그리고 죄인은 다그마르 산맥으로 비밀리에 빼돌려.”
서늘해진 그녀의 눈이 호위에게 닿았다.
“다그마르 산맥에서도 가장 외진 수도원에 감금하되, 감시를 붙여 정기적으로 보고를 올리도록 해. 감금 이외의 벌은 가할 필요가 없다. 죄인에겐 수도원에 갇혀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고통일 것이니.”
“…….”
“다만 다그마르 산맥으로 죄인을 이송하는 인력을 줄이고 감시를 헐겁게 해야 한다.”
“예?”
호위가 의아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페기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 검지를 입술에 살짝 붙였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뒤를 밟아. 죄인이 순순히 다그마르 산맥의 수도원으로 들어간다면 그대로 귀환하되, 만약 외부 세력과 접촉하여 탈주할 기미가 엿보인다면….”
쓸모없는 패로 전락한 지금의 비올라를 원하는 세력이 있을까.
페기는 깊게 고민해 왔다.
퀴테리아를 비롯한 청백회가 꺾이고 든든한 뒷배였던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마저 몰락한 마당이었다. 교국의 승기는 너무나도 확연하게 기울었으므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비올라와 없던 연도 끊으려 들 것이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의 비올라마저 끌어안으려는 세력은 예후르와 페기에게 극심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 국제 정세에서 그럴 만한 세력은 단 하나뿐이다.
탐보프의 황제, 빌헬미나.
“북쪽을 경계해라. 탐보프의 정예병은 산을 잘 타니, 만일 개입하려 든다면 다그마르 산맥 인근에서 등장할 것이다.”
“죄인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까?”
“아니.”
이것은 시험이다.
차라의 바람대로 과연 네가 죽은 듯이 묻혀 살 수 있을지.
“설령 탐보프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외부에서 개입하려 든다면 네 손으로 죄인을 죽여라. 숨이 끊어지는 것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돌아와.”
서릿발 같은 엄명이었다. 호위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이곤 날랜 걸음으로 광장을 빠져나갔다. 페기는 그제야 다시 시선을 돌려 성 예리엘 대성당을 들여다보았다.
암암한 어둠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타오르는 성화.
페기는 발걸음을 뗐다. 눈앞에 깔린 시커먼 어둠의 길로. 저기 먼 외딴섬처럼 떨어진 성화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며.
예후르는 집무실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먼바다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검은 하늘과 미미하게 자리 잡은 별들, 선선한 밤공기….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자연의 감촉은 어제와도 다르지 않고, 수천 년 전과도 다르지 않았다. 너무나도 긴 세월을 살아온 그는 그렇기에 자연 속에서 종종 잊은 줄만 알았던 옛 기억들을 떠올리곤 했다.
이를테면 난생처음 지상으로 내려와 느꼈던 감회, 힘겨웠던 뱀과의 사투,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흐릿해진 벗들과 누구와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시시한 농담들.
그는 대체로 지나간 추억을 되짚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러한 회상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손끝에 피어오른 불꽃을 볼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던 어린 날의 페기를 떠올리고, 새벽녘 짙게 내리깔린 안개를 볼 때마다 화살을 맞고 쓰러지던 그녀의 뒷등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러나 오늘의 밤하늘에서 떠오른 과거의 풍경은 보다 오래된 것이었다. 평소라면 몇 번 곱씹다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을 기억이나, 운 좋게도 오늘은 지난날을 함께 추억할 동지가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꺾어 올렸다.
“이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