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1화 (321/328)

갈라진 몸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은 그야말로 천사만의 권능.

한낱 불씨에 불과한 버러지들과 달리, 천사들은 아주 강대한 불꽃을 품고 있으므로 넘쳐흐르는 생명력이 때로는 원치 않는 치유력으로 발휘되곤 한다.

그렇기에 예리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강대했다 한들, 미할리나의 권능 역시 시간 속에 스러져 간 다른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약해지고 낮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기껏해야 인간과 어찌 나눌 생각을 한단 말인가.

“진실로 미쳤구나.”

창백해진 예리엘의 안색을 흘끗 쳐다본 예후르가 그녀를 외면하며 페기를 데리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끈한 예리엘이 그를 뒤쫓으려 하였으나, 마귀에게 잡힌 발목이 꼼짝하질 않았다. 그사이에 먼 지하에선 아득한 폭발음이 울려와 발아래 무시무시한 진동으로 퍼져 가고 있었다.

아, 나를 이대로 두고 너희는 살아갈 작정이구나.

예리엘은 어느덧 둥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둘의 뒷등을 생각하며 서늘하게 웃었다. 죽음, 마지막, 끝.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천사에게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다만 이 기나긴 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만은 부디 지나간 족적보다 의미 있길 바랐을 뿐이다.

예리엘은 붙들리지 않은 발을 뻗어 신경질적으로 새장을 넘어트렸다.

그러자 끼익, 새장의 문이 열리며 비둘기들이 퍼드덕 날아오른다. 예리엘은 하얗게 떨어지는 깃털 사이로 손을 내뻗었다. 천사가 빠져나간 퀴테리아의 육신은 맥없이 나동그라지고, 천사가 숨어든 비둘기는 다른 새들과 함께 열띤 날갯짓을 한다. 지상에 발붙인 버러지의 몸을 떠나 다시금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하지만 마귀는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림자 속에서 하나둘 솟아오른 마귀들이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비둘기 하나가 잡히고, 또 하나가 잡혔다. 산 채로 무작정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쑤셔 넣어지는 새들이 애달프게 운다. 그러나 한 마리만은, 오직 한 마리만은 잡히지 않고 빠르게 비상하고 있었다.

높다란 천장 유일하게 뚫린 구멍으로, 빛을 쏟아 내는 저 하늘로.

나의 고향.

나의 빛.

가까워지는 빛이 눈부시도록 시야를 하얗게 물들인다. 예리엘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아니, 얻은 줄만 알았다. 빛에 눈이 먼 천사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는 진리를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

비상하는 새를 따라 벽으로 드리워진 사방의 그림자 속에서 마귀들이 삽시간에 떼를 지어 달려 나왔다.

무자비한 손톱이 허공을 가르고, 천사를 저주하는 괴물들의 목울음 소리가 끓어오른다.

끝내 꽁무니를 잡힌 천사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맥없이 추락했다. 순식간에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빛.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가 거멓게 쏟아져 내린다. 그러고는 뜯겨 나가 나부끼던 흰 날개깃마저 구렁텅이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소명의 천사 예리엘.”

착한 종이 되라는 소명을 어기고 만 사도가 굉음을 내며 허물어지는 건물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부디 죽음의 길로 앞서 나가시어….”

개미 한 마리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확인한 그녀가 몸을 뒤로 돌린다.

“사멸하는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어 본 줄 알았으나 실상 죽어 보지 못했던 그녀는 다시금 경험해 본 적 없는 관념에 얽매이게 되었다. 죽음, 삶의 끝, 생의 마지막. 이 세상 모든 진리를 아는 듯한 예후르에게도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었으며, 이 세상 모든 존재에게 제멋대로 소명을 내려 주는 인도자를 자처했던 천사 예리엘 또한 죽기 직전까지 죽음에 대해 무지했다.

어쩌면 겪어 본 적 없기에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 페기는 숱한 죽음을 목격하였으며 심지어는 한때나마 가까웠던 알틴의 눈을 직접 감겨 주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죽음이란 관념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 마지막을 가정해 보기에 그녀는 죽음과 지나치게 멀어졌다.

페기는 가만히 목을 짚어 보았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목덜미가 서늘해질 지경이나, 예리엘의 손에 잘려 나갔던 목은 어느덧 상처 하나 없이 잘 아물어 있었다. 북방에서 화살을 맞고 죽어 가던 그녀를 예후르가 모종의 방법으로 살려 낸 뒤로는 이러했다. 페기는 그에게 구태여 영문을 묻지 않았지만, 이 또한 천사의 권능이겠거니 여기고는 있었다.

그러나 천사의 은혜를 입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죽어 간다.

병에 걸려서, 사고를 당해서, 누군가의 손에 의도적으로, 아니면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음은 발치에 걸리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했으며, 조건 없이 만인에게 평등하였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나, 화려한 궁전에서 시중을 받는 왕이나 결국에는 똑같은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란 이야기다.

따라서 죽음에서 멀어진 페기 역시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었다. 그녀는 죽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가까운 사람들은 죽을 수 있다. 시기의 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될 문제. 그녀는 때때로 정신이 나가 버리는 레오폴트를 보며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으나, 막상 마주하게 된 상황에서마저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기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수도사들의 눈가, 한낮에도 적요한 사위, 침통하기 짝이 없는 근위대의 표정과 갈변되어 하나둘 떨어져 내리는 낙엽….

여름이 지나 돌아온 성궁에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장례 직전의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오폴트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은 하루걸러 전해지는 보고로 알고 있었으나, 성궁의 암울한 공기를 피부로 직접 느끼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페기는 자세히 캐묻지 않고 수도사들을 따라 내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도로 달려오는 내내, 비단으로 싸매어 소중히 품고 왔던 함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레오폴트의 침실 앞에는 원탁 추기경들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과 차라, 심지어는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안드레아까지 모여 있었다. 구석에서 훌쩍거리던 차라가 페기와 예후르를 발견하곤 황급히 다가왔다.

“레, 레오가… 레오가….”

예후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차라의 어깨를 매만져 주었다. 차라가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푹 숙이자, 페기는 고개를 돌려 침실 앞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다들 속절없이 시선을 피하는 가운데, 눈가가 벌겋게 짓무른 안드레아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들어가 봐.”

페기의 시선이 안드레아를 지나 침실 문에 가 닿았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안 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예후르가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은 사뭇 어두웠다. 페기는 거의 예후르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몇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등 뒤로 문이 닫히며 이제는 고요한 적막이 들어찬다.

예후르는 넋이 반쯤 나간 듯한 페기를 가만 내버려 두고 침대로 다가갔다. 가면을 쓴 레오폴트가 마치 송장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후르는 입술을 뗐다. 정적의 기저에 깔리는 몇 마디 속삭임이 끝나자, 마법처럼 레오폴트의 눈이 뜨였다.

페기는 조용히 속삭임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닥에 달라붙은 줄 알았던 발이 어느 순간 절로 움직인다. 가까워지는 어둠 속 침대. 옆으로 비켜서는 예후르. 페기는 지친 듯이 저를 향해 내려오는 가면 속 연옥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품속의 함을 꽉 끌어안았다.

함을 싸매고 있던 비단이 스르르 풀어진다.

그녀는 짤막한 숨을 삼키며 함의 고리를 풀었다. 뚜껑이 올라가고, 아직 잔떨림이 남은 그녀의 손이 함 속에 담겨 있던 것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것은 하얀 유골이었다.

한때 뼈를 덮고 있었을 피부도, 머리카락도, 하다못해 단단히 박혀 있었을 안구마저 썩어 사라진 머리의 유골.

좀처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초점을 잃고 흐리멍덩하던 레오폴트의 눈이 일순간 그대로 멈춰 버렸다. 깜박임조차 잊은 그 눈을 보며 페기는 가까스로 눈물을 삼켜 냈다.

“…가져왔어요.”

“…….”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레오폴트의 손이 움찔거리며 올라왔다. 두꺼운 천으로 손끝까지 동여맸음에도 나뭇가지처럼 말라 버린 부피감이 적나라했다. 핏발이 서도록 눈을 부릅뜬 그는 그대로 손을 뻗어 유골에 닿았다. 눈에 보이도록 덜덜 떨리던 손이 점차 안쪽으로 말려 주먹이 된다.

쿵!

안간힘을 다해 때려 낸 유골이 페기의 손아귀를 벗어나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레오폴트는 급하게 울음을 삼키며 몸을 뒤틀었다. 이 악물고 참아 내는 설움이 급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 위에서 노닐었다. 당황한 페기가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레오.”

“나, 나는 이제 되었어….”

“…….

“다 끝났어….”

핏발 선 연옥색 눈동자에 물기가 번졌다. 불타오르던 야밤의 성도, 요란하게 울리던 용병들의 군홧발 소리와 머리채가 잡혀 질질 끌려 내려오던 제네로사… 데구루루 굴러가던 그녀의 목.

일평생 그를 괴롭혀 왔던 악몽이 드디어 끝났다. 이런다고 죽은 제네로사가 되살아날 것도 아니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영원히 남을 그날의 비극이 사라지는 것도 아닐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제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성도를 짓밟았던 용병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도 가시지 않던 원한으로부터.

라발을 미워하며 보냈던 수십 년의 세월로도 가시지 않던 집착으로부터.

이 사달을 내고도 평온히 석관 속에 잠든 섭정의 목을 잘라 기어이 제네로사와 똑같은 꼴을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던 것은 끝내 해소되지 못한 울분의 잘못된 분출이었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알면서도 부릴 수밖에 없었던 고집.

복수는 그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잿더미로 내려앉았던 성도가 원상 궤도를 되찾은 그 순간부터 그는 불가능해 보이던 복수 하나만을 바라보며 이 괴롭고 고단한 삶을 이어 왔다.

“그러니 제발….”

“…….

“저를 놓아주십시오….”

섧은 눈물이 가면 바깥으로 끓어 넘친다.

“제게 주셨던 은총…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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