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0화 (320/328)

페기는 고개를 꺾어 올렸다. 뾰족한 지붕에 맞아 갈라지는 직사광선이 못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하얗게 가물거리는 시야를 애써 가다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황태자가 투항했어.”

다가온 예후르가 그녀의 옆에 섰다.

페기는 달싹거리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칼라브리아 대성벽을 지키는 인원이 없어 혹 수도 내에 함정을 파 놓았나 의심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누미디아 진입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백성들은 하나같이 집구석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으며, 병사들은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않고 백기를 들어 버렸다.

듣기로는 며칠 전 황위 찬탈에 동조했던 서부 군벌의 우두머리들이 황명을 받고 살라체 대궁전으로 들었다가 죄다 몰살당했다고 한다. 명령권자를 잃어버린 군대는 한순간에 오합지졸로 전락하였으며, 용 기병대가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도에는 온갖 흉흉한 말들이 나돌았다고 했다.

머잖아 용들이 나타나 누미디아를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 하니, 누미디아의 백성들이 겁에 질린 것은 당연지사. 혼란을 바로잡아야 할 황태자는 만사 퀴테리아에 의존하였으나, 정작 그 퀴테리아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으니 무패를 자랑하던 칼라브리아 대성벽조차 쉽게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토록 무방비해진 도시로 그들을 들인 퀴테리아가 저 안에 있다.

그녀가 홀로 성묘(聖廟)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페기는 예후르의 짐작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무력했던 저항, 스스로 와해시킨 군대…. 결국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을 성묘로 끌어들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대대로 라발의 황제들이 죽으면 묻히는 곳이야.”

라발에는 시신이 하늘과 멀수록 잡귀가 몰리지 않아 후손들이 안전하게 번영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다. 당연히 황제의 관은 가장 깊은 굴에 묻혔고, 그 위로 쌓아 올린 탑이 지금의 성묘였다.

“천사는 쉽게 죽지 않지.”

목이 날아가도, 심장이 꿰뚫려도 끊기지 않는 생명력.

“깊은 곳에 묻어 버리는 게 상책이야.”

이를테면 시신들이 가득한 굴속으로.

엄명을 내려 최소한의 호위 인력까지 뒤로 물려 버린 성묘 주변은 고요했다. 성묘는 창문 없이 까마득한 지붕 꼭대기에만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직접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퀴테리아가 반 시간 전 홀로 들어갔다는 증언만은 확실했다.

“…괜찮겠니?”

예후르가 나지막하게 물어 왔다. 페기는 대답을 하는 대신 성묘의 열린 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묘의 구조는 이미 듣고 왔다.

겉으로 보기에도 원통형의 건물.

내부의 중심에는 뱀이 똬리를 뜬 것처럼 원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으며, 그 계단을 에워싸듯 지상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걸어 둔 원형의 회랑이 마련되어 있었다.

입구는 하나,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마주할 갈림길.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 결국에는 입구로 다시 돌아올 구조이나, 선택에 따라 누가 먼저 예리엘을 맞닥뜨릴지 갈리게 된다.

중차대한 문제지만,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또 아니다. 페기는 어지럽게 얽혀 가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 내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다급하게 팔을 붙들어 오는 손길이 있었다.

“페기.”

“알잖아.”

“…….”

“나 이제 그리 쉽게 죽지 않아.”

페기는 불안하게 떨리는 예후르의 눈을 마주하며 엷게 웃었다. 팔을 붙든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예후르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곤 회랑의 오른편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페기 역시 회랑의 왼편으로 몸을 돌렸다.

두꺼운 벽돌을 쌓아 올린 내부는 늦저녁처럼 어두웠다. 창문 없이 답답하도록 위로만 뻗은 구조는 지붕에서 내려오는 한 줌 볕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벽에 간간이 걸려 있는 촛대에도 더러 촛불이 올라와 있곤 했다.

페기는 둥글게 굽어지는 길을 천천히 따라 걸었다. 세월에 퇴색된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가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마치 송장의 얼굴을 그린 것처럼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묘라는 이름에 걸맞은 엄숙함.

죽음과 맞닿은 곳다운 고요함.

경건하다 못해 사람을 무섭게 짓누르는 이 분위기는 아마도 외부와 완전히 단절시키는 두꺼운 석벽과 머리 위로 까마득히 이어지는 기형적인 구조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페기는 건물이 주는 위압감 사이로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생명의 바르작거림, 혹은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의 집념.

멀지 않았다.

직감하며 둥근 모퉁이를 돈 순간, 낡은 로브를 둘러 입은 퀴테리아와 맞닥뜨렸다.

당혹한 페기가 저도 모르게 발을 뒤로 끌자 뒷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퀴테리아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가만히, 그저 가만히 고개를 꺾은 채 서 있었다.

까마득한 천장에서 내려오는 한 줌의 볕.

볕이 닿은 이마는 하얗게 반짝이고, 높은 콧대 아래로 빛줄기가 갈라져 흐른다. 감은 눈 아래로 쏟아지는 속눈썹은 뺨 위로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갈래갈래 찢어져 흐르는 눈물 같기도 했다.

어째서일까.

홀린 듯이 그녀를 응시하던 페기는 불현듯이 들려오는 세찬 퍼드덕거림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제 보니 퀴테리아의 발치에 웬 새장이 놓여 있었다.

페기는 새장 속에서 날개를 퍼드덕거리는 하얀 비둘기들을 멍하니 들여다본다. 무덤과 새. 기이한 부조화다. 그러나 더 깊게 생각할 겨를 없이 곧바로 저를 향해 돌아오는 퀴테리아의 시선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금빛 눈.

쏟아지는 찬물을 맞은 것처럼 깨닫는다.

눈앞의 존재는 퀴테리아의 거죽을 쓴 절대자임을.

…또각.

들려오는 발소리에 페기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했다. 그러자 눈앞의 존재는 더 다가오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하기만 한다. 페기는 손끝이 파르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사막처럼 건조해진 입 안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바로 그 순간, 예리엘의 입술이 벌어지며 끔찍한 소음이 밀어닥쳤다.

페기는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철퍼덕 쓰러졌다. 정신없이 귀를 틀어막아 보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마치 그날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중한 음악 소리를 듣고 사도가 되었던 그 순간처럼….

그리고 어느새 그녀에게로 다가온 예리엘이 살며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린다.

“나의 못된 종.”

소음이 걷힌 귓속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목소리.

“이제야 내 말을 좀 듣는구나.”

페기는 눈물 젖은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속에 자리한 금빛 눈이 찬란했다. 마치 우주의 모든 비밀을 간직하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롭다.

“천사… 님….”

“그래.”

“왜… 저였나요…?”

만날 수만 있다면.

저를 선택한 천사를 만날 수만 있다면 꼭 한번 묻고 싶었다. 왜 하필 저였는지. 많고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쓰레기 더미 사이를 뒹굴던 한낱 시궁쥐였는지.

애정이었길 바라지 않는다.

연민이었길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저를 선택하고도 끝내 저를 저버렸던 천사의 의중을 알고 싶었다. 뱀에게 먹혀 버린 성화를 외면하며 저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던 진의가 궁금했다.

어리고 나약했던 그녀는 기어이 뱀에게 물려 버리고 말았지만, 죽기 전의 그녀는 그 사실을 조금도 몰랐을뿐더러 자부하길 누구 못지않게 신실한 신도였다. 맹세컨대 이토록 못된 종이 되고 싶진 않았었다.

“저를 선택하시고 저를 버리신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에요. 말씀해 주세요. 왜 그러셨어요, 왜….”

멎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샘솟았다. 흐느끼며 매달려 오는 그녀를 예리엘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건조하게 관찰하는 시선으로.

“네가 착한 종이 될 줄 알았단다.”

“…….”

“그렇지 못한 듯하여 너를 버렸고.”

차가운 손끝이 끊임없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쳐 낸다.

“죽었던 네가 살아 돌아온 것을 알자,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지.”

페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는 채 지워 내지 못한 절망감이 묻어난다. 그쯤에서 무릎을 짚으며 일어난 예리엘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반 바퀴를 돌아온 예후르가 먼발치에 서 있었다.

“나는 말이야, 미할리나. 네가 왜 하필 이런 아이에게 목을 매는지 모르겠다.”

느긋하게 페기의 뒤로 걸어온 예리엘이 그녀의 턱을 억세게 잡아 올렸다.

“어디 하나 특별한 구석을 찾을 수 없는 버러지잖니. 뱀에게 물렸다지만 이전의 뱀들이 지녔던 힘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실상 다른 인간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땅을 기는 버러지들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그러는 너는.”

날카롭게 돌아오는 반문에 예리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예후르는 나지막한 조소를 흘리고 있었다.

“턱없이 낮아진 너는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페기의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리엘은 부러 입꼬리를 끌어 올렸으나, 외려 눈은 웃고 있지 않는 기이한 표정으로 변모하였다.

“여긴 곧 무너져 내릴 거다.”

“…….”

“지하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어. 너희의 발소리가 울리는 순간 불을 붙이라 하였으니 머잖아 폭발할 거다. 그렇게 우리 셋은 영원히 이 깊디깊은 지하에 파묻히게 되겠지.”

예리엘의 긴 소매 속에서 예리한 칼날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움켜쥔 칼날을 페기의 목 끝에 들이댔다.

“그 전에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어. 나의 형제, 나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싸울 수 없는 것이겠지. 네가 나와 다투어 이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던가.”

“오, 미할리나. 도발은 통하지 않아.”

“도발이 아니라면?”

별안간 시퍼런 냉기가 발치에서 피어올랐다.

예리엘은 번개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마귀의 손이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동시에 페기가 숨겨 왔던 단도를 꺼내 그녀의 옆구리로 힘껏 찔러 넣었다.

순간적인 고통에 턱을 붙들던 손아귀의 힘이 잠시 약해졌다. 페기는 그 틈에 재빨리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예리엘의 칼날이 어김없이 그녀의 목을 훔쳤다. 후드득, 핏물이 떨어진다. 페기는 갈라진 목을 움켜쥐며 무릎걸음으로 간신히 예리엘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러길래 왜 죽음을 자초하나.”

예리엘은 단도가 박힌 옆구리를 짚으며 미간을 구겼다. 요란하게 달려온 예후르가 쓰러지는 페기를 다급히 끌어안았다. 중요한 혈관이란 혈관은 죄다 잘려 나갔을 테니 아마도 즉사하지 않았을까. 칼날을 내던진 예리엘이 신경질적으로 피 묻은 손을 로브에 닦아 냈다.

그러나 예리엘은 곧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죽었어야 마땅한 페기가 예후르의 부축을 받아 조심스럽게 일어서고 있었다. 잘린 목을 움켜쥔 손가락 사이사이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온다. 예리엘은 핏기 가신 아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미할리나, 너 설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