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9화 (319/328)

“하기야 의심하실 만도 합니다. 제위를 찬탈한 황태자 전하와 저희 가문을 어찌 따로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저 다시는 누미디아로 불려 올 일 없겠구나 싶을 뿐이지요.”

“…아직 젊지 않습니까, 백작은.”

클레멘스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시선은 무너지는 칼라브리아 대성벽을 떠나지 않은 채로. 이시도르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젊다고 폐하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여기 일이 마무리되는 즉시 신변의 안전을 위해 성도로 피신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망명을 요청한다면 고려는 해 보겠습니다.”

“…예하께선 본인의 안전부터 신경 쓰셔야 할 텐데요.”

그제야 클레멘스의 시선이 의아함을 담고 이시도르를 향했다. 흘끗 그를 내려다보는 이시도르의 표정이 묘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폐하를 배신하신 겁니까?”

안대에 가려지지 않은 클레멘스의 유일한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 순간 이시도르는 클레멘스가 대답을 회피하리라 직감했으나, 클레멘스는 오히려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 올릴 뿐이었다.

“그보단 폐하께 진심으로 충성을 바친 적이 있느냐 묻는 것이 올바른 순서겠군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이시도르가 불현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성도로 파견되어 클레멘스와 동고동락했던 4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넝마 조각으로 변해 버렸다. 계산적으로, 이해타산적으로 살고 있다 자부했던 그는 실상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

“폐하께서도 아십니까?”

“글쎄요, 저도 일이 터진 후로는 뵙지 못한 터라.”

“…….”

“그래도 이쯤 되었으면 아시지 않겠습니까?”

클레멘스가 상냥한 표정으로 이시도르의 어깨 너머를 눈짓했다. 이시도르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의 오른편으로 우뚝 솟아 있는 절벽. 까마귀 한 마리가 요란하게 울며 배회하는 그곳에 요앙 오귀스트가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시선은 역시나 먼발치의 누미디아에 못 박힌 채로.

이제 북문의 포는 모두 녹아내렸다. 포문은 일찌감치 박살이 났으며, 흉포한 용들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성벽을 죄다 갈아 버리고 있었다. 엘피도 공작은 작전을 잘 수행해 주었다. 교회가 세워 준 명분 아래 모여든 대군은 지키는 이 없는 성문을 열고 위풍당당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는다.

분명 빼앗긴 성을 탈환하려는 시도임에도 자꾸만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다. 응당 되찾아야 할 자신의 것인데, 마치 도적놈에게 눈 뜨고 보물을 빼앗기는 기분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 손으로 성을 갖다 바치는 느낌이었다. 탈환을 코앞에 둔 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도록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폐하.”

기다리다 못한 장군이 재촉을 해 왔다. 요앙 오귀스트는 경련하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안다. 수만 대군이, 장군들이, 용들이, 엘피도 공작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명령이 없다고 이 전투가 멎을 것인가.

요앙 오귀스트는 멍하니 눈을 껌벅였다. 뒷머리를 후려 맞는 듯한 충격이 엄습했다.

기뻐해야 마땅한 상황을 앞에 두고 불유쾌한 기분만을 곱씹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 대군의 유일무이한 구심점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병사들이, 대군을 통솔하는 지휘관들이, 스쳐 지나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숭배하는 존재란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것은 때로 황제 자신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용이고 때로는 사도이기도 하였다.

마른바람 같은 웃음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의심 많은 성정에 고관대작들을 믿지 못하여 몇몇 측근들만 초대했던 밀실 정치가 결국은 탈을 내고 말았다. 단돌로와 몬테베르디, 두 측근을 잃어버린 순간부터 견고했던 그의 권력에는 금이 갔다. 코앞에 다다른 승기를 의도적으로 잡지 않는 이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옹호해 줄 세력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없었다.

폐하, 어서 명을 내려 주십시오. 예상했던 것처럼 독촉해 오는 목소리에 점차 힘이 실린다.

요앙 오귀스트는 그저 흐느끼듯 웃었다. 휘청거리는 그의 몸짓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장군이 병사를 시켜 뿔피리를 불게 하였다. 진군 신호다. 고민의 여지 없는 하극상이었으나, 요앙 오귀스트는 개의치 않았다. 황제의 노여움이라는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시기는 불행히도 이미 지났다.

진군 신호에 화답하듯 먼 데서 뿔피리 소리가 여럿 들려왔다. 동시에 수만 대군이 진군하는 발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거대하게 울려온다. 진동하는 땅, 놀라 까무러치듯 날아가는 새 떼. 요앙 오귀스트는 신발 밑창을 뚫고 전해지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여 휘청거린다. 갑자기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심장이 덜컥 무거워졌다.

“아들아, 너는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오래전 제 손으로 건넨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던 디안드라 섭정의 고고한 얼굴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요앙 오귀스트는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에 겨운 얼굴로 잘도 웃었다. 찬탈자가 되어 버린 그의 아들은 곧 목이 잘려 죽을 것이며, 황위를 이어받을 핏줄이 없는 발루아 황가는 한 대만에 끝이 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목전에 다다른 죽음의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대신, 신랄한 어조로 망령을 조롱한다. 내 비록 평생의 야심을 이루진 못하였으나, 죽어 백골이 되어서도 원수에게 갈가리 찢길 어머니 당신보다야 낫지 않겠소.

멀리서 울려오는 대군의 환호성.

누미디아와 라발을 부르짖는 늙은 장군들의 곡성.

뒤로 넘어가는 황제의 눈알을 따라 시야는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담는다.

빙글빙글 그의 머리 위를 배회하던 까마귀가 깍깍 참 음울하게도 울었다.

***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이 필요해.”

예후르는 결국 실마리를 찾아냈다.

“퀴테리아를 이용하자.”

당시 퀴테리아는 최종 판결만을 기다리며 변방의 탑에 갇혀 있었다. 예후르는 십중팔구 천사 예리엘이 그녀의 몸을 노릴 것이라 장담했다.

“원래 사도로 더 알맞았던 사람은 비올라가 아닌 퀴테리아야. 지나치게 자립적인 퀴테리아가 자신이 두고 부릴 사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비올라를 골랐을 테지만, 예리엘이 직접 지상으로 강림할 생각이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과연 지상으로 강림할까?”

“물론. 새의 몸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

페기는 그제야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을 가져오는 일에 왜 퀴테리아와 천사 예리엘이 언급되는지 이해했다.

“퀴테리아의 육신을 차지하게 두고….”

“라발로 달아나도록 유도하는 거지.”

예후르는 라발의 지도를 펼쳤다. 요앙 오귀스트와 불화를 일으킨 황태자 티에리가 머물고 있는 별궁은 누미디아의 북쪽, 즉 교국과의 접경지대와 가까웠다.

“예리엘은 황태자에게 붙을 수밖에 없어. 요앙 오귀스트는 경계 삼엄한 살라체 대궁전에 기거하는 데다 최측근이 아니면 대면조차 쉽지 않지. 게다가 모친의 실책으로 인한 교국과의 단교를 수십 년의 노력으로 간신히 원상 복구하였으니, 교국의 죄인이라면 만나 보지도 않고 바로 송환시킬 거야.”

라발의 황제와 황태자가 사이좋지 않다는 것은 익히 유명한 사실.

예리엘이라면 부황에 대한 황태자의 서러움을 자극하여 모반을 일으키리라. 라발을 집어삼키고 교회, 특히 예후르와 페기를 적으로 돌린다면 교국으로서도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퀴테리아로 인해 라발이 위험에 빠진다면, 탈주한 죄인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라발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돼. 게다가 어딜 날아다니고 있는지 모를 비둘기보단 차라리 퀴테리아의 육신에 깃든 천사가 붙잡기는 한결 수월하겠지.”

천사 예리엘과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

전혀 다른 문제를 하나로 엮어 두 가지를 모두 움켜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리엘에게 달렸어.”

예후르의 손바닥이 라발의 지도를 훑었다.

“만일 요앙 오귀스트를 죽이고 완벽하게 라발을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야. 라발의 국력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제2의 오스피나 참극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하지만 그것을 두고 볼 두 사람이 아니다.

“예리엘이 아무리 뛰어난 수완을 발휘한다 해도 대외적으로 보일 퀴테리아는 죄인이지. 교회는 당연히 반발할 것이며, 주변국들도 라발을 견제하기 위해 그녀를 돕지 않을 거야. 또한 퀴테리아에게 밀려날 누미디아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일뿐더러,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로 지방 구석구석까지 통치권을 발휘하기는 힘들겠지.”

“성공한다 쳐도 긴 시간이 걸리겠네.”

예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예리엘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개야.”

첫째, 불확실한 성공 가능성과 기약 없는 장기전에도 불구하고 라발을 전부 집어삼키는 것.

둘째, 도박을 자처하여 두 사람을 누미디아로 끌어들이는 것.

“누미디아로?”

“정확히는 살라체 대궁전으로.”

예후르의 손가락이 지도의 누미디아를 가리켰다.

“만약 이 길을 선택한다면 예리엘에게 심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겠지.”

“…….”

“살라체 대궁전에는 깊디깊은 무덤이 하나 있거든.”

예후르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러니 만일 예리엘이 우리를 누미디아로 끌어들인다면….”

조심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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