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8화 (318/328)

초안은 건국 왕 도미티아누스 1세가 구상했되, 현실적인 사정들로 인해 백여 년이 흘러 건축이 시작된 칼라브리아 대성벽은 심미를 일절 제하고 오로지 방어에만 초점을 맞춘 건축물이었다. 대도시를 에워싸면서 높이는 여타 다른 성벽들의 두세 배까지 올라가야 했으므로, 건축 재료를 충당하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따라서 재료는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시공은 효율적인 건축을 위한 수학자들의 계산에 의존하여. 수도를 둘러싼 대성벽이 평생의 염원이었던 도미티아누스 1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 시작된 건축은 또다시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나 완공되었다. 자연히 그때부턴 소규모 정변이 벌어질지언정, 외세의 침입에 수도 누미디아가 짓밟히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여 막바지까지 몰린 서부 군벌 세력이 저렇듯 칼라브리아 대성벽 안에 꽁꽁 숨어 나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요앙 오귀스트에게로 완전히 승기가 기울어진 지금도 누미디아의 함락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장군들 사이에서는 공성전을 펼치기보단 장기적인 포위전으로 항복을 유도해 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마저 조심스레 나오고 있었다.

“일단 우리 측과 교섭할 의사는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앙 오귀스트의 막사에서 열린 회의.

날이 밝기 무섭게 누미디아로 보냈던 사자가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오자, 막사의 분위기는 다시금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평범한 성도 단단히 걸어 잠그면 아군의 열 배 남짓한 적군을 능히 막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칼라브리아 대성벽. 공성전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아무래도 빈틈없이 성곽을 포위하여 누미디아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요앙 오귀스트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회의의 결론은 점차 포위전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었다. 그런데 회의에 참관하러 들어와 여태 입 한 번 열지 않았던 엘피도 공작이 불현듯 목소리를 냈다.

“포위전으로 가도 괜찮겠습니까. 누미디아의 식량이 고갈되기까지 최소 반년은 여기서 버텨야 한다고 들었는데.”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어투에 장군들이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익히 소문만으로 들어 왔던 교회의 영웅은 각지에서 모인 연륜 깊은 장군들에게도 어려운 상대였다.

“곧 가을이 오면 추수철이 됩니다. 이만한 숫자의 장정들을 죄다 끌고 왔으니, 특히 라발의 동남부 밀밭에는 수확할 일꾼이 부족해지겠지요. 무엇보다도 수확량이 줄어들면 겨우내 대군을 먹여 살릴 군량부터 부족해집니다.”

라발의 겨울은 그리 혹독하지 않다. 겨울을 버텨야 한다는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적을지 모르나, 군량 문제에서까지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특히 지난해와 지지난해 수해를 입어 연속으로 흉작을 기록했던 라발의 동남부 곡창 지대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칼라브리아 대성벽은 역사상 그 누구도 공략에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애당초 함락이 불가능한 도시임은 일평생 칼라브리아 대성벽을 지켜 왔던 제가 보장합니다.”

“아군의 규모가 크다곤 하나, 실패가 뻔한 공성전에 아까운 장정들을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장정들을 투입한다고 했나요?”

예후르가 설핏 고개를 기울였다. 당황한 장군들은 말이 목에 걸린 것처럼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사이에 예후르는 물 흐르듯 대답을 이어 갔다.

“용 기병대가 있지 않습니까.”

“…전하. 라발은 사막과 성전을 치렀던 나라입니다. 용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는 이골이 나도록 잘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남부 국경은 물론이요, 누미디아를 지키는 칼라브리아 대성벽에도 당연히 용을 상대하는 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거리가 길고 조준이 간편하여 용들도 쉽게 접근하기는 힘들 겁니다.”

“포가 있으면 무엇합니까. 조준을 하고 불을 붙일 포병이 있어야 하는데.”

“…….”

“아침에 누미디아를 다녀온 사자도, 어제와 엊그제 다녀왔던 사자도 사람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좌우지간 승기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에서 내전을 이어 가는 것은 아군이나 적군 모두에게 실익이 없는 일이었다. 도미티아누스 가도를 빠르게 타고 내려가면서 요앙 오귀스트는 끊임없이 누미디아로 항복을 독촉하는 사자를 보내었다. 대군이 곧 도착하니 서부 군벌 세력은 알아서 찬탈자 티에리의 목을 베어 바치라는 함의가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자들은 요앙 오귀스트의 뜻을 전하지 못했다. 누미디아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자들은 목이 쉬도록 외쳐도 칼라브리아 대성벽의 문이 열리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돌아가라는 축객령조차 듣지 못했다고 하였다. 꽉 닫힌 성문 앞에는 문지기조차 서 있지 않았다.

“침묵이 곧 적의 대답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항변하는 장군조차 크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방만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예후르는 그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의 백룡은 불을 뿜습니다.”

네모진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장군들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발은 백 년 가까이 사막의 저주받을 이교도들과 싸워 왔던 나라. 용에 대해서라면 끔찍하리만치 이골이 나 있었으나.

“불을 뿜다니요? 그런 용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대들은 백룡도 처음 볼 텐데요.”

정곡을 찔린 장군들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어물거렸다. 교국에서 날아온 용들이 하나 빼고 모두 검은 것처럼, 성전에서 그들이 상대했던 사막의 용들 역시 모두 까맸었다. 불을 뿜는 용이 생소한 것처럼, 백룡 역시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탐보프에서도 용을 상대하기 위해 라발의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완성한 포를 선보였었습니다. 평범한 용들에겐 위협적이었을지 모르나, 불 앞에선 무용지물이었지요. 라발이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진 않군요.”

탁자 위로 장군들의 불안한 시선이 오갔다.

“그럼… 용 기병대가 선두로 날아가 포를 파괴한 뒤, 남은 군사들이 진군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용에 대항하기 위해 개량되었다지만, 포는 당연히 군사들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특히 사거리가 길어 성벽으로 쉽게 접근할 수 없으니, 공성전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포를 부수는 것이 시급했다.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몫이다.

장군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품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엘피도 공작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황제가 안정적인 포위전을 선택하여 주길, 그러나 추수철을 놓치고 싶지 않은 동남부 곡창 지대의 영주들은 하루빨리 누미디아를 점령하여 고향으로 떠날 수 있도록 용 기병대를 잘 활용하여 주길.

요앙 오귀스트는 장군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 내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두꺼운 손바닥에 닿아 오는 것은 불규칙적이고 갈수록 얕아지는 심장 맥박. 그는 생각한다. 약해진 심장이 언제까지 버텨 줄지. 또한 평생을 바친 이 나라가 다시금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는 것을 보고 죽을 수 있을는지.

오른 가슴에 얹혔던 주름진 손이 차츰 주먹을 쥐었다.

요앙 오귀스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부우우!

진군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 라발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인다. 전투를 앞두고 열을 맞추어 선 병사들의 얼굴에는 어찌할 수 없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는데, 첨예하게 날이 선 공기조차 위로 굴러가는 병사들의 눈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붉은 평원.

백마를 탄 사령관의 머리 위로 열댓 마리의 거대한 용들이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참전을 결정한 엘피도 공작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백룡에 올랐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따가워지는 불볕이 유독 그에게로 몰리는 것인지 그의 뒷등이나마 훔쳐보려던 병사들은 부신 눈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곤 했다. 가뜩이나 새하얀 용에 올라타 가감 없이 볕을 내리받는 그에게는 형언하기 어려운 신성함이 감돌고 있었다.

부우우!

전열에 선 기수가 다시금 뿔피리를 불었다.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기다렸다는 듯 엘피도 공작이 고삐를 풀자, 백룡은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머지 용들도 호기롭게 목청을 돋우며 힘찬 날갯짓을 한다. 멀어지는 용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병사들은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으로 창대를 꽉 말아 쥐었다.

수만의 함성도, 땅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도, 부딪히는 창칼의 소음도 없는 고요한 진군.

공중에 일직선으로 떠서 칼라브리아 대성벽으로 나아가는 용들의 날개가 마치 가닥가닥 이어진 쇠사슬처럼 견고해졌다. 지난 전투에서 몇 번이고 목도했던 광경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전율은 좀체 줄어들지 않는다. 멀어지는 용 기병대를 지켜보던 병사들이 남몰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곧 대성벽에 설치된 포의 사정거리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포는 작동하지 않았고, 대성벽은 여전히 고요하다.

적요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수군거림이 번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대성벽을 지키는 자가 없는 것인가. 돌멩이를 맞은 호수처럼 파문이 빠르게 퍼져 가는 가운데, 쏜살같이 허공을 갈라 대성벽에 다다른 용들이 끼아아악 날카롭게 울었다.

진동하는 공기.

찰나에 치솟는 긴장감.

마침내 백룡이 불을 내뿜었다.

“여기 계셨군요.”

야트막한 언덕 위에 걸터앉아 있던 클레멘스에게로 이시도르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러자 언덕 아래로 탁 트이는 시야. 먼발치에서 보이는 칼라브리아 대성벽에는 어느덧 검은 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시도르는 그 광경이 마치 꿀단지에 달라붙은 벌 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면서 칼라브리아 대성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용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구잡이 헤집는 성벽 아래로 붉은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허공에서 날갯짓하던 백룡은 기어이 아가리를 찢어 화염을 내뿜었다. 검게 그을리는 성벽과 질질 녹아내리는 포가 과히 보기에 좋지는 않았다.

“성도 생활을 마치고 누미디아로 돌아올 때는 곳곳에서 환영받을 줄 알았죠.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촌이 기어코 일을 쳐서 모든 것을 망가트리게 될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

“심지어 폐하께선 절 보려고도 하지 않으시더군요.”

이시도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