엷은 안개 사이로 얼핏 드러나는 대성벽의 붉은 빛깔.
새벽녘 차디찬 서광은 우뚝 솟은 대성벽의 위용을 더욱 배가시키고, 그 안에 똬리 틀고 있을 찬탈자의 존재는 한층 위축시켰다. 천 년의 역사를 짊어진 도시의 무게에 비하면 황태자의 그릇은 너무나도 작았기에. 황제는 제 아들이 작금의 누미디아로 진격해 오는 소식들을 결코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왜 그리 아둔한 짓을 하였는지. 진실로 탈주한 죄인 따위의 말에 홀려 이리도 제국을 망치려 든 것인지.
밤낮없이 골몰하였던 속앓이는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문제였다. 수없이 분노하며 가슴을 때렸던 요앙 오귀스트는 어느덧 바닥을 보이는 양초가 되어 버렸다. 머잖아 대가 끊길 사내는 평생의 염원마저 꺾여 한낱 늙고 노쇠한 이로 전락할 것이었다.
“곧 엘피도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당도하신다고 합니다.”
언덕 위에 버티어 선 그에게로 누군가 건조한 소식을 전해 왔다.
요앙 오귀스트는 점차 밝아 오는 누미디아를 흐린 눈으로 바라본다.
아름답고 강고한 나의 도시.
늙어 약해진 황제는 서서히 직감하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도망쳐 왔으나 이리 붙잡혀 버렸으니, 저 도시가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올 일이 없으리란 것을. 코앞에 꽃을 두고 잡혀 버린 나비처럼, 영원히.
***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작열하는 뙤약볕이 들이닥쳤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페기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눈앞의 전경을 훑어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이글거리는 태양,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듬성듬성한 잡풀들 사이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붉은 땅의 속살.
경험해 본 적 없는 남방의 더위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머리 위에선 한여름 불볕이, 발아래선 끓어오르는 지열이. 장장 반나절 만에 땅을 딛고 선 그녀는 스스로 녹아내리는 얼음이 된 줄만 알았다. 비 오듯 땀을 흘리니 달리 이상한 비유도 아니었다.
오래지 않아 황제의 시종이라는 자가 마중을 나왔다. 고위 대신으로 보이는 자들도 여럿 섞여 있었으나, 오랜 마차 생활에 이어 한여름 불볕까지 맞게 된 페기는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황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였다. 페기는 예후르와 팔짱을 끼고 시종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난데없는 사도의 등장에 병영 내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부활한 사도…. 경악과 경탄과 경외감이 뒤섞인 수군거림이 끈질기게 그녀의 꽁무니로 따라붙었다.
황제의 막사는 병영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살라체 대궁전의 귀한 보물들은 모조리 내버리고 맨몸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들었는데, 명색이 황제의 막사가 지방 군벌의 것보다도 못했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는 막사의 끝자락을 눈여겨본 페기가 이윽고 막사의 그늘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임시로 둔 책상 앞, 한결 서늘해진 공기 속에 잿빛 곱슬머리를 어깨 너머로 늘어트린 장년의 사내가 보였다.
앉은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였다. 걸친 옷은 수수하다 못해 초라했으나,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엿보이는 안광은 한낱 범부의 것이 아니었다. 왕관을 잃어버리고 흙먼지 속을 뒹굴지언정, 그는 여전히 대제국 라발을 호령하는 황제였다.
그는 말없이 맞은편 자리를 권하였다. 걸음을 옮기려던 페기가 멈칫했다. 맞은편에는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요앙 오귀스트는 당연히 예후르에게 앉을 것을 권하였겠으나, 정작 아무렇지 않게 책상으로 다가간 그는 손수 의자를 빼 그녀를 돌아볼 뿐이었다.
페기는 그제야 발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자, 마주 앉은 요앙 오귀스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페기는 기꺼이 웃어 주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소.”
매처럼 날카로운 황제의 시선이 그녀와 예후르를 느릿하게 훑어보았다.
“직접 와 주시라 청한 적은 없으나, 그럼에도 두 분의 존재만으로 군의 사기는 찌를 듯 높아질 것이오. 고작 말뿐인 감사로는 이 은혜를 갚을 수 없겠지.”
한마디로 원하는 것을 어서 말하라는 뜻이었다. 페기 역시 이 초라한 막사에서 돌리고 돌려 말하는 화법을 구사할 의사는 전혀 없었으므로, 별반 개의치 않고 말문을 열었다.
“세피로스 협약을 파기했으면 합니다.”
뜻밖이라는 듯 요앙 오귀스트가 짙은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나 이는 페기와 예후르가 오래전부터 상의했던 문제다. 기회가 왔을 때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세피로스 협약.
이는 초대 교황 야누비타 1세와 라발의 건국 왕인 도미티아누스 1세의 거래에서 출발한다.
도미티아누스 1세는 대를 이어 사도들을 보좌했던 알바누스 가문의 후계자로, 뱀이 봉인된 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라발이란 새 나라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야누비타 1세는 알바누스 가문이 보여 온 헌신에 감명받아 도미티아누스에게 손수 관을 씌워 주기까지 했으니, 훗날 라발이 신성 제국으로 격상된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야누비타 1세는 사망 직전, 도미티아누스 1세에게 밀서를 보내 라발의 황제 자격으로 사도들에게 작위를 내려 줄 것을 청했다.
사도들의 작위는 교국의 땅을 기반으로 하는 바, 야누비타 1세의 요청은 사실상 교국의 영토를 라발의 황제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야누비타의 사후 교국의 영토를 교황에게 귀속한다는 것이 사도 로살레다에 의해 성문화되어 라발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세속의 작위는 세속의 황제에게 받는 것이 옳다는 주장에 따라 라발의 황제가 사도들에게 작위를 내리는 전통은 천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기실 무늬만 남은 협약이었다. 관례적으로 라발의 황제는 인장만 찍어 줄 뿐 작위 수여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으며, 대공의 작위가 존재하지 않던 천 년 전에 체결된 협약이기에 사도들은 공작의 작위를 받으면서도 전하란 칭호를 듣게 되었다. 사도를 제국의 황태자 아래에 둘 수 없다는 교회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리엘이 하도 욕심을 내기에 제동을 걸어 주고 싶었어.”
예후르는 당시 도미티아누스 1세에게 협약을 청했던 이유를 단순하게 설명했다. 우려스러울 정도로 지상에 욕심을 보이는 사도 로살레다에게 침착하게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세피로스 협약은 당시의 목적에 제법 부합하였으나, 불행히도 천 년이 지난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협약이 되었다.
오스피나 참극이 발생한 뒤 라발이 일방적으로 교국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힘이 있었기도 하거니와, 힘없는 교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빙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피로스 협약이 좋은 근거가 되어 주었음은 당연하다.
모든 교국인들이 그러하겠지만, 페기는 제2의 오스피나 참극이 발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비극은 한 번으로 족했다. 평생을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레오폴트를 생각해서라도 세피로스 협약은 지금 여기서 막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이는 절벽으로 몰린 요앙 오귀스트가 선뜻 수락할 수 있는 조건이다.
페기는 고심에 잠긴 늙은이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클레멘스는 황제를 두고 지나치리만큼 실속을 추구하는 부류라 하였다. 한낱 낡은 협약 따위에 얽매일 리 없다.
“…좋소. 당장 파기하도록 하지.”
“또 하나.”
기다렸다는 듯 페기가 말을 이었다.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을 원합니다.”
일순 요앙 오귀스트의 눈빛에 날이 섰다. 페기가 태연히 그 시선을 마주하자, 독이 오른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요앙 오귀스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입는 수가 있소.”
“지금 급한 쪽은 제가 아닐 텐데요.”
“…….”
“내어 주지 않으시겠다면 당장 용 기병대와 함께 철수하겠습니다.”
탁상에 올려져 있던 요앙 오귀스트의 손이 움찔했다.
서부 군벌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들이 그의 이름 아래 뭉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교회가 세워 준 명분과 용 기병대의 파괴력 덕분이었다. 그런데 누미디아를 목전에 둔 지금, 교회의 가호가 사라진다? 지금의 연합군은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수가 있었다.
“…어린 사도께서 거래를 할 줄 아시는군.”
요앙 오귀스트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입으로는 웃으면서 정작 두 눈에는 독기 서린 노여움만이 가득했다.
“내어 준다 해도 비공식적으로만 가능하오. 공식적으로 디안드라 섭정의 유골은 영원히 살라체 대궁전 지하에 안치되어 있을 것이며, 만에 하나 이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갈지라도 라발은 부인할 것이오. 그래도 괜찮겠소?”
“네.”
페기 역시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잠시 그녀를 노려본 요앙 오귀스트가 양피지를 꺼내 협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날인을 마치자마자 페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예후르와 함께 막사를 빠져나가려는데, 요앙 오귀스트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 왔다.
“죽었다 되살아났다고 들었소만.”
페기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늘에 반쯤 잠긴 황제의 몰골이 유달리 수척하게 보였다.
“죽음은 어떠하오? 견딜 만은 한가.”
그늘진 그의 얼굴이 문득 죽음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선 듯했다. 페기는 그제야 요앙 오귀스트에게 지병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문제를 일으키기 전까지 별궁에서 요양 중이었다 들었으니, 그리 가벼운 문제는 아닐 터.
라발과 같은 대제국을 발아래 둔 황제에게도 죽음이란 결국 해결하지 못한 과제요, 두려워하며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페기는 죽음에 다다른 늙은이에게 어찌할 수 없는 연민을 느꼈다. 생의 끝자락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았다. 그러나 실제 완벽하게 죽어 보지 못한 그녀는 두려워하는 늙은이에게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어쭙잖은 위로 몇 마디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글쎄요.”
하여 페기는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예리엘께서도 거기까진 인도해 주시지 않더군요.”
***
수도 누미디아.
오래전 교황 야누비타 1세가 죽기 전 왕궁을 세우기 적당한 땅이라 짚어 주었다는 이곳은 그의 예언대로 천 년을 가는 도시가 되었다. 비록 중앙 언덕 위에 세워진 왕궁은 여러 차례 화재를 입어 소진과 재건을 반복해 왔으나, 채 타지 못한 과거의 흔적들은 여전히 살라체 대궁전 아래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라발 건축의 정수를 보여 주는 살라체 대궁전, 이제는 궁전에 버금가는 역사를 지니게 된 누미디아 귀족들의 저택과 시가지 곳곳에 남아 있는 옛 시대의 흔적들.
그야말로 라발 천 년 역사의 산증인인 누미디아는 수십 년 전 라발 용병대의 군홧발에 짓밟혀 지난 역사를 잃어버린 성도 오스피나와는 달랐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도시. 과거를 껴안고 미래로 나아갈 누미디아.
이를 가능케 했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리라 확신할 수 있는 까닭은 오래도록 누미디아를 보호해 왔던 칼라브리아 대성벽이 건재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