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앙 오귀스트는 먼동이 터 오는 언덕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다.
걸릴 것 없이 드넓게 펼쳐진 평원. 한여름 잡풀이 움터 무성해진 그곳으로 새벽녘 옅은 안개와 아스라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평상시였다면 밤낮없이 오가는 행인들로 가득했을 도미티아누스 가도가 어쩐 일로 텅 비어 있었으나, 그렇기에 도리어 지난 세월을 증명하듯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천 년을 견뎌 온 나라.
아들딸의 아들딸에게로 무수히 전해져 내려온 나라의 역사는 어느덧 라발의 근간이 되어 버렸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불과 반백 년도 장담하지 못하는 짧은 생을 살아가고 있었으나, 까마득한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천 년의 역사는 그들과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 년의 무게를 가장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역시나 권력의 정점에 오른 요앙 오귀스트였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발루아 황가를 융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지난 천 년의 무게를 받들어 이 오래된 제국의 수명을 이어 나가야 한다는 사명에 짓눌려 있었다. 전자가 개인적인 욕망이라면, 후자는 황제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같은 선을 달리던 욕망과 책임이 별안간 방향을 바꾸어 서로 충돌하려 들고 있었다.
요앙 오귀스트는 탐욕스럽고 막돼먹은 인간일지언정, 일생일대의 기로에서 그릇된 선택을 내리는 천치는 아니었다.
그는 일생의 명운을 걸었던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일평생 몸을 갈아 세웠던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를 제 손으로 무너트려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뼈 아플 뿐이었다. 멍청한 아들을 향한 노여움,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을 향한 원망, 풀릴 길 없는 엉킨 실타래를 향한 괴로움은 강고했던 황제를 한낱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시켰다.
그럼에도 무정한 날은 속절없이 밝아 온다.
요앙 오귀스트는 엷은 안개 속에서 부옇게 흐려지는 먼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지평선 어드메, 천 년 도시 누미디아를 오래도록 수호해 왔던 칼라브리아 대성벽의 웅장함이 푸른 서광 속에 얼핏 드러나고 있었다. 건국 이래 칼라브리아 대성벽은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고, 그렇기에 천 년 도시 누미디아는 누구에게도 함락된 전적이 없지만, 무패의 영광은 머잖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었다. 아니, 사라져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핏줄을 고집하던 욕심을 버리고 제국을 선택해야 하는 황제가 내려야 하는 생애 마지막 결단.
끝내 제 손으로 핏줄을 끊어 내야 하는 이의 서글픈 한탄이었다.
***
교국의 참전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기껏해야 세잔 정도나 참전하리라 여겼던 세간의 예상은 완전히 틀려먹었다. 사람들은 교회가 타국의 일에 간섭한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고, 다음으로 엘피도 공작의 용 기병대에 경비대 일부를 차출하여 원군으로 보낼 것이란 발표에 두 번 놀랐다. 탐보프에서 짧게나마 보여 주었던 용 기병대의 활약상은 가히 반백 년 전 성전의 악몽을 되살릴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명분은 요앙 오귀스트에게로 쏠렸다.
신성 제국 라발의 황위는 교회가 그 권위를 보장하는 만큼, 교국이 요앙 오귀스트에게 원군을 보낸다는 것은 즉 그의 황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곧 황위를 찬탈한 티에리 장 오귀스트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어지니, 서부 군벌을 등에 업은 황태자 티에리의 반정은 순식간에 명분 없는 찬탈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데없는 교국의 참전 소식으로 각국의 궁정이 소란스럽던 때, 엘피도 공작의 용 기병대가 포위된 요앙 오귀스트를 구출하기 위해 먼저 라발의 땅에 당도하였다.
요앙 오귀스트가 문을 걸어 잠근 낡은 요새를 포위한 채 느긋이 백기가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던 서부 군벌들은 별안간 지평선 너머에서 날아오는 용 떼를 발견하곤 소스라칠 것처럼 놀랐다.
용의 악명을 바람결로만 들었던 탐보프인들과 달리, 라발인들은 반백 년 전의 성전에서 직접 사막의 용과 부딪혔던 이들이다. 몸을 숨길 수 없는 평야에서 용과 대등하게 맞서려면 수만 대군도 족히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따라서 용 기병대가 낡은 요새에 도착했을 때, 서부 군벌 세력들은 황급히 짐을 챙겨 꼬리 말고 달아난 뒤였다. 부연 흙먼지만 휘날리는 텅 빈 평야로 용들이 하나둘 내려앉아 투정하듯 길게 울어 댔다. 황망히 요새 위로 올라선 요앙 오귀스트는 원군을 요청한 주제에 정작 열댓 마리의 용들을 직면하곤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실 요앙 오귀스트가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로 전서구를 보냈을 때, 그가 기대했던 최대치는 아들의 찬탈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명분은 요앙 오귀스트에게 기울 것이므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세잔이며 라발의 지방 세력들이 그에게로 모이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었다.
그러나 교국은 그의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려 대륙에 단 둘뿐인 용 기병대를 보내왔다.
용 열댓 마리라면 누미디아의 칼라브리아 대성벽을 무너트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으나, 과도한 친절은 먼저 의심하고 보는 것이 순서였다. 받은 것이 클수록 훗날에 갚아야 하는 양도 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 요앙 오귀스트는 복잡한 셈으로 골치가 아파졌다. 그러나 그를 혼란케 하는 것은 용 기병대뿐만이 아니었다.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이 직접 오고 있다고?”
용 기병대 단원들이 전하는 소식이란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요앙 오귀스트는 그답지 않게 정중한 어투로 두 공작의 방문을 거절하려 했으나, 용 기병대 단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은 소식을 전할 뿐이라 하였다. 이제 요앙 오귀스트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두 명의 사도가 무엇을 바라 이 전쟁터까지 오겠다는 것인지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복잡하던 대륙 남방의 정세는 빠르게 질서를 되찾아 나가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미적거리기만 하던 라발의 남부와 동부 세력들은 교국의 용 기병대가 라발에 안착했다는 경악스러운 소식에 서둘러 병력을 모아 요앙 오귀스트에게로 보냈다. 기회를 노려 세잔의 왕위를 탐하던 크리상즈 공작 역시 교회의 참전에 부담을 느꼈는지 일단은 고개를 숙이기로 한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근위대 일부만을 데리고 간신히 수도를 탈출했던 요앙 오귀스트는 어느새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심지어는 세잔의 원군까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용 기병대의 활약으로 도미티아누스 가도를 탈환한 상태였다. 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데다 제국의 남부와 동부, 세잔까지 척을 지게 된 서부 군벌 세력은 구심점을 잃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요앙 오귀스트는 안심하지 못했다.
사방에서 몰려들어 혼잡해진 군대를 재정비하기 위해 하루 이틀 쉬어 가자는 휘하 장군들의 간언에도 그는 쉼 없이 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누미디아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하루빨리 누미디아를 되찾아야 한다.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과도 같았다. 이제 쫓기는 입장은 그의 아들이 되었음에도, 도통 조바심을 놓지 못하는 모습은 얼핏 기이하게까지 보였다.
“엘피도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마차로 이틀 거리에 계신답니다. 이왕이면 합류하여 함께 누미디아로 가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
잊을 만하면 쫓아오는 바로 그 말이 요앙 오귀스트를 못 견디게 초조하도록 만들었다.
엘피도 공작이라면 수없이 들어 본 이름이다.
그의 대표적인 수족이었던 단돌로의 클레멘스는 엘피도 공작을 두고 ‘확실하게 인간을 초월한 듯한 인물’이라 묘사했는데, 그럴 때면 요앙 오귀스트는 엘피도 공작과 동년배인 제 아들을 떠올리며 입을 다시곤 했다. 그러나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고, 그만한 인재가 세잔이나 탐보프가 아닌 교국에서 나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했다.
반면에 카타리나 공작에 대해선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기껏해야 4년 전 뱀으로 몰려 죽은 사도. 그러나 지난해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위스누아의 비올라를 물리치고 다시금 제자리로 생환한 인물.
그러고 보면 클레멘스는 엘피도 공작이 어렸던 시절부터 그에 대한 보고를 정기적으로 세밀하게 올렸던 것과 달리, 카타리나 공작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질이 없었다.
4년 전까지야 전면에 나선 적 없는 인물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지난해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부턴 특유의 집요한 뒷조사를 통해 보고를 올렸어야 마땅하다. 라발의 황제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남들과 별다를 바 없다는 자각은 못내 생소하고도 위험한 것이었다.
설마 클레멘스가 배반한 것인가.
불쑥 치솟은 의문은 그의 초조함을 배가시켰다.
어머니인 디안드라 섭정을 독살한 뒤 비로소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가 선택했던 최측근이 바로 단돌로의 클레멘스다. 클레멘스는 중앙 교회에서 제지가 들어올 때까지 라발의 재상직을 역임하였으며, 이후로도 꾸준히 황제의 눈과 귀가 되어 봉사해 왔다. 인질 삼아 누미디아에 묶어 두었던 그의 식솔들의 안전이 바로 충성이 되어 돌아왔었다.
하지만 만일 그 클레멘스가 고국을 배신하였다면, 그렇다면.
요앙 오귀스트는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전해 듣기로는 클레멘스와 피아제 백작이 두 공작과 함께 달려오는 중이라 하였다. 황태자의 가장 큰 뒷배였던 피아제 백작이 두 공작에게 붙었다는 것은 곧 황태자를 버리고 교회가 택한 황제에게로 줄을 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클레멘스와 마찬가지로 밀서 하나 보내오질 않는다. 분명 알고 있는 것이 있을 텐데.
바라지도 않던 용 기병대를 보낸 이유와 구태여 두 공작이 라발까지 내려오는 까닭.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요앙 오귀스트는 처음으로 스스로의 사고 영역이 협소하다는 것을 느꼈다. 만국의 자질구레한 정보까지 모두 꿰뚫고 있는 그가 당최 추측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렇기에 앎으로써 자신만만했던 늙은 황제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엇을 바라 보냈는가.
무엇을 바라 오는가.
무엇을 바라 이곳으로….
시시각각 합류하는 병사들을 재촉하여 정신없이 도미티아누스 가도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지평선으로 누미디아의 칼라브리아 대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