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앞으로는 전하의 개로 살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정말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 성궁 꼭대기에서 깨끗하게만 사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시키시는 더러운 일, 제가 다 도맡겠으니, 제발….”
본시오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피투성이 더러운 몸뚱이가 구차하게 그녀의 발아래에서 뒹굴고 있었다. 분명 그 언젠가 이 악물고 고대했던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심경에는 별반 동요가 없었다.
저자를 피 토하며 증오하던 때가 있었다.
뼈에 각인된 죽음의 기억, 목 끝까지 치밀던 억울함, 무엇보다도 한순간에 부서졌던 음악의 꿈. 본시오는 그 모든 비극의 집합체였다. 그에게 당한 걸 모조리 갚아 주어야만 지난날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난 두어 달 만에 그녀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순식간에 넓어진 인식의 장은 도리어 지난날에 무섭도록 집착했던 사안들을 사소하게 만들어 버렸다. 미친 듯이 타올랐던 복수심과 바라던 모든 것을 이루어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녀는 아예 제3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본시오의 낯짝을 보고도 미칠 듯이 화가 나지 않는다. 빛이 없는 지하로 끌려 내려가 죽음보다 더한 것을 보고 돌아온 그녀에게 더 이상 지난날의 죽음은 악몽이 되지 못했다. 본시오를 떠올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나날들과 심지어는 이렇게 그를 마주하고 있는 시간조차 몹시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런 보잘것없는 자에게 할애하기에 나의 시간은 너무나도 귀중하다.
페기는 불현듯 깨달았다.
“형은 언제 집행할 예정이죠?”
불안한 눈으로 그녀와 본시오를 지켜보던 왈테르가 어물거리며 대꾸했다.
“이… 일단 죄목을 더 추가한 이후에….”
“어차피 지금의 죄목만으로도 충분히 사형감일 텐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페기는 하녀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양손을 닦았다.
“오늘 집행하도록 하죠.”
“예?”
“끌고 가게.”
그녀의 눈짓에 병사들이 달려와 본시오의 양팔을 붙들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본시오가 뒤늦게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곤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핏대 오른 목으로 본시오가 무어라 악을 쓰든 신경도 쓰지 않던 페기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그리고.”
본시오를 끌고 나가던 병사들이 일제히 멈추어 섰다. 페기는 벌게진 본시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싱긋 웃었다.
“목을 치기 전에 손부터 박살 내는 것이 좋겠어.”
고개를 숙여 복종한 병사들이 다시금 본시오를 끌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먼 복도에서부터 본시오의 고함 소리가 고래고래 울려 왔지만, 식당 안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왈테르는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페기의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에게 카니나의 페기란, 음악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던 조용한 소녀.
아무리 많은 일을 겪었다 한들 사람 천성이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는 종종 먼발치서 그녀를 볼 때면 측은한 표정을 짓곤 했다. 저분도 원해서 저러시는 건 아니겠지. 다시 제자리로 복귀만 하시면 예전처럼 원하던 대로 조용히 살아가시겠지.
하지만 눈앞의 여인에게선 그가 알던 모습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레오폴트의 손을 잡고 쭈뼛거리며 성궁으로 들어왔던 여섯 살 어린아이가 자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십수 년의 성장을 지켜보았던 사도는 더 이상 그가 알던 수줍음 많은 소녀가 아니었다.
“사흘 뒤에 출병이니 부단장도 미리 준비해 두세요.”
난데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왈테르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예?”
“미란테 경에게 아직 듣지 못했나요? 이번 참전에는 나와 엘피도 공작이 함께합니다. 병력의 대부분은 용 기병대일 테지만, 나와 엘피도 공작을 호위할 인력은 필요하니까요. 미란테 경이 그대를 추천하더군요.”
왈테르는 멍하니 눈만 껌벅였다. 당혹감이 차올라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했다.
“부단장.”
“…….
“왈테르 부단장.”
“예, 예?”
“그대에게 내 호위를 맡겨도 될까요?”
그의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닌,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투였다.
왈테르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졌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거나 성궁 내 복잡한 정치판에 뛰어드는 일엔 비록 쥐약일지 몰라도, 나가서 검을 들고 싸우는 일에는 아직도 그를 능가하는 기사가 없었다. 호승심에 불타는 왈테르는 본시오 일당의 죄목을 정리하여 진상한 뒤 그간 무능력했던 행적을 반성하는 의미로 은퇴를 청하려던 계획을 그만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맡겨만 주십시오!”
식당이 떠나갈 듯 우렁찬 외침이었다. 조금 놀랐던 페기는 이내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옮겼다. 식당을 나와 햇살 들이치는 복도를 걸어 나가는데, 소리 없이 뒤를 따라오던 마샤가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클레멘스 추기경이 벌써 서관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해요. 점심에는 탐보프 대사와의 점심 만찬이 예정되어 있고, 오후에는 중앙 법무처에서 면담을 청해서… 어휴. 일정이 너무 고되어요, 전하.”
“급한 일은 다 마무리 짓고 떠나야 하니까.”
“…꼭 가셔야 하는 거예요?”
페기가 힐끗 눈길을 주자, 마샤가 손가락을 맞잡으며 어물거렸다.
“탐보프에서도 전장에서 험한 일을 겪으실 뻔했잖아요. 왜 굳이 전하께서 그 먼 곳까지 가셔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샤의 입을 빌려 나오는 말이긴 하여도, 사실상 저것이 성궁의 여론이었다. 요앙 오귀스트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까진 이해하여도, 명실상부 교회의 최고 권력자로 발돋움한 엘피도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이 모두 라발까지 행차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
뒤숭숭한 성궁의 공기를 모르는 바 아니나, 페기는 일부러 그것을 무시해 왔다. 그녀와 예후르에겐 반드시 라발로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으나,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설득시킬 수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현명했다.
그래서 페기는 이번에도 말없이 미소만 지어 주곤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마샤가 얕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어느새 싸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라발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전능한 존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살라체 대궁전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을 죽은 자의 석관.
페기는 너울지는 창틀의 그림자를 밟으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주저함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
“제발 고정하십시오, 전하!”
발아래 내팽개쳐진 단돌로 공작이 울면서 고하였다. 제좌를 차지한 티에리는 다리를 꼬며 이마를 짚었다. 하도 시끄럽게 굴며 알현을 청한다길래 불러들였더니, 골만 더 아파지게 생겼다.
“제국이 분열되어선 안 됩니다! 폐하께 후계자는 전하 단 한 분뿐이신데 어찌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셨단 말입니까!”
“공작, 듣기에 과히 불쾌하군. 지금 이 제좌에 앉아 있는 것이 누구인지 눈에 뵈지도 않는 건가?”
“전하!”
단돌로 공작이 또다시 한바탕 곡할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티에리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새겨졌다.
공작의 이복 오라비인 클레멘스 추기경은 아비인 황제의 수족으로 익히 악명을 떨쳤다. 이참에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는데, 별안간 누군가 허락도 받지 않고 알현실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날 선 눈으로 불청객을 확인한 티에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퀴테리아 추기경!”
얼굴을 반쯤 가리던 낡은 로브를 벗어 내린 퀴테리아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제좌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당장 내려오고 싶어 하는 티에리를 진정시켰다.
“폐하. 송구하오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송구할 일이 무언가! 거기, 당장 공작을 끌고 가거라!”
헐떡거리며 곡소리를 내던 단돌로 공작이 맥없이 병사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티에리는 그제야 안절부절못하며 황급히 제좌 아래로 내려왔다. 퀴테리아도 더는 그를 막지 않았다.
“그대가 친히 아뢸 정도면 대단한 정보라도 입수한 것이겠지? 무엇인가? 혹 부황께서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보이고 계시던가?”
현재 요앙 오귀스트는 아뎃사 근방의 요새에 갇혀 있었다. 원래는 서쪽의 세잔으로 건너갈 의도였겠으나, 불운하게도 티에리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 세력이 서부에 근거지를 둔 군벌들인지라 미처 서쪽으로 통하는 길을 뚫지 못했다. 그 와중에 누미디아에서부터 추격해 온 군사들이 턱 밑까지 치달아 근처 낡은 요새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아비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야 빤했다. 세잔에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라발 남부와 동부 세력에게도 구원병을 재촉하는 것. 그러나 사실상 세잔의 실권자인 크리상즈 공작은 이 틈에 세잔의 왕위를 탐하려 들 것이며, 라발 남부와 동부 세력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누구의 편을 들지 정할 것이었다.
티에리로선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아비의 신병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촌티 나는 세잔의 왕위쯤이야 크리상즈 공작에게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천 년 제국 라발의 황위였다.
“곧 교회에서 원군을 보낼 겁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예상 밖이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티에리를 보곤 퀴테리아가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탈주한 죄인인 제가 이곳에 있지 않습니까. 엘피도 공작이라면 능히 저의 위치를 파악했을 것이니, 저를 잡기 위해서라도 폐주를 돕겠지요.”
“하지만 지금 교회에 그럴 여력이….”
“병력의 머릿수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교국에는 용 기병대가 둘이나 있지요.”
티에리의 안색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무자비한 짐승인 용 앞에서는 라발의 대군도 큰 의미가 없었다. 지난해 엘피도 공작의 용 기병대가 탐보프의 정예 부대를 무참히 짓밟았다는 소식은 라발에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교회는 명분 그 자체. 교국이 만일 폐주의 편에 선다면 세잔은 물론이요, 라발 남부와 동부의 세력들도 더는 상황을 관망할 수 없게 됩니다. 게다가 백성들의 민심도 온전히 폐주에게로 기울어지겠지요.”
“그, 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티에리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퀴테리아가 문득 가느다란 미소를 지어 올렸다.
“폐하께선 부디 강건하게 버텨 주십시오.”
“…….”
“교회의 참전 소식이 퍼지면 누미디아의 민심도 흉흉해질 것입니다. 불온한 종자는 미리 솎아 내는 것이 올바른 길이니, 지금부터라도 병사들을 풀어 누미디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의 동태를 살피고 감시하셔야 합니다.”
티에리는 자신 없는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퀴테리아의 말이 더 빨랐다.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추기경이 알아서…?”
“예, 물론이지요.”
티에리의 눈에서 조금씩 초점이 사라져 갔다. 마치 약에 취하기라도 하듯이.
“폐하께선 그저 제 목소리만 잘 듣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퀴테리아는 마치 어린아이를 재우듯 가만가만 속삭인다.
“그것이 바로 폐하의 소명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