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황제 폐하로부터 원군 요청이 왔습니다.”
순간 이시도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그대로 숨이 멎어 버린 사람처럼 미동 없더니,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엘피도 공작 전하를 뵈어야겠습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백작.”
“지금 시간이 문제입니까! 라발이 지금 두 개로 절단 나게 생겼는데…!”
그러자 클레멘스가 손을 들어 이시도르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덜컥 말을 멈춘 그를 응시하는 클레멘스의 눈빛이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견고했다.
“기다리십시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차례로 부름이 올 것입니다.”
“…….”
“그리고 백작, 이번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엘피도 공작 전하가 아니라 카타리나 공작 전하십니다.”
이시도르는 반문조차 잊은 듯이 굳어 버렸다. 말없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클레멘스가 그대로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야속한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밤새도록 클레멘스 사택의 접견실에서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있던 이시도르는 입궁하라는 전갈을 받기 무섭게 말에 올라탔다. 아직 동트지 않은 이른 새벽녘. 고요하게 잠든 도시를 가로질러 성궁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 수도사들이 다가와 그를 서관으로 이끌었다.
엘피도 공작의 명령으로 클레멘스가 카타리나 공작의 집무실을 꾸미고 있다는 소리를 언뜻 듣긴 하였으나, 직접 걸음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보여 주기 위한 명목상의 집무실이겠거니 여겼는데, 결국에 중요한 결정은 엘피도 공작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들어와 보는 카타리나 공작의 집무실은 정작 서류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이른 새벽녘임에도 불구하고 중앙 행정 부서의 관료들이 정신없이 드나들고 있었으며, 카타리나 공작은 그 가운데 앉아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시도르는 문득 저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몹시 생소해졌다.
“…아, 피아제 백작.”
그를 발견한 페기가 가만히 웃는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이시도르는 목 끝까지 들어차는 당혹스러움을 애써 삼켜 내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사이 페기는 중요한 서류들을 정리하는 한편, 보고를 올리던 관료들을 잠시 집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이른 시간부터 불러내어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불러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시도르는 그답지 않게 빳빳해진 몸으로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라발의 소식은 들었겠죠.”
이시도르는 발끝, 손끝부터 긴장감으로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회는 지금뿐.
조금 전 우르르 집무실을 빠져나갔던 중앙 교회의 관료들은 바쁘긴 움직이긴 하였으나 충격에 빠진 기색은 전무했다. 라발의 동태를 다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클레멘스의 말대로 오늘 당장이라도 출병 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황제 폐하로부터 원군 요청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페기는 말없이 손끝으로 자신의 턱을 감쌌다. 지극히 여유로운 동작에 이시도르는 남몰래 떨리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누미디아로 가 황태자 전하를 설득하겠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전하, 제발…. 교국이 참전한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교국의 참전은 곧 교회가 황제의 손을 들어 준다는 것.
교회에게 인정받지 못한 권력자의 말로란 대개 처참하다. 더욱이 건국부터 교회와 함께였던 라발은 지난 천 년간 교회의 질서가 아주 뿌리 깊게 내려 있었으므로, 만일 교국이 참전한다면 누미디아의 민심은 바로 돌아설 것이었다. 분노한 누미디아의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최악의 상황마저 상정해야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비록 미욱하시지만 이렇게 갑자기 모반을 꾀하실 분은 아닙니다. 저에게조차 비밀로 하신 것을 보면 어떤 사특한 이의 꾐에 잘못 넘어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제발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전하. 황태자 전하께서도 제 말은 들어 주실….”
“퀴테리아입니다.”
“예?”
“황태자를 꾀어낸 사람. 탈주한 퀴테리아라고요.”
페기는 턱을 감싸고 있던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본디 교국은 타국의 정세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깁니다. 군사적인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교회의 오점이 관련되어 있다면 달라집니다.”
퀴테리아는 사형이 언도된 죄인.
하물며 단순 흉악 범죄인도 아닌, 교회에 막중한 혼란을 가져왔던 정치범이다.
그녀의 친자매인 알비야 공작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고, 그들의 세력 기반인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이 힘겹게나마 버티고 있는 이상 퀴테리아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인물이었다.
만일 라발의 황태자에게 빌붙어 다시금 위험인물로 부상하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교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지도 몰랐다. 교국의 참전은 단순히 요앙 오귀스트의 원군 요청만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퀴테리아와 같은 작자가 다시 세상으로 나와 라발에서마저 갈등을 빚은 것은 그녀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교국의 책임입니다. 그녀로 인해 작금의 사태가 촉발된 것이라면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겠지요. 그렇다면 현재 가장 막중한 피해를 입은 라발의 황제 폐하를 돕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이시도르는 차마 반론할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은밀히 다듬고 다듬었을 교회의 입장에는 흠결이 없었다. 지나치게 매끄러워 그조차 설득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가 밤새도록 성궁의 부름을 기다렸던 것은 달리 이성적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이성적으로만 움직이는 정치가였다면, 클레멘스에게 붙어 정보를 얻은 뒤 황제와 황태자 중 보다 유리해 보이는 쪽의 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막무가내로 황태자를 설득하겠노라 간청할 리가 없었다.
“…교회가 참전한다면 황태자 전하께선 돌아가실 겁니다.”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가 잘게 흔들렸다. 이시도르는 떨리는 목울대에 애써 힘을 주며 눈을 부릅떴다. 측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카타리나 공작의 동정에라도 빌붙어 기회를 얻어 내야만 했다.
“황태자와 사촌지간이라 했나요.”
“예.”
이제는 그 멍청함에 이가 갈릴 지경이나, 그럼에도 피를 나눈 사촌이었다. 더욱이 서른 해 가까이 황태자의 등극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왔던 피아제 백작가는 이제 황태자와 거의 명운을 함께하는 수준이었다. 황태자의 몰락은 곧 피아제 백작가의 몰락이나 다름없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황제 폐하께는 황태자 전하가 아닌 다른 대안이 없으며, 황태자 전하 역시 폐하의 세력 기반을 필요로 하십니다. 이해관계만 맞아떨어진다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간절하기 짝이 없는 호소였다. 고심에 빠진 페기의 대답을 기다리며 이시도르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길어지는 침묵에 참전으로 감당해야 할 교회의 경제적, 군사적 손실까지 언급할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는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웬 수도사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수도사가 허리를 숙여 페기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러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이시도르의 심장이 철렁했다.
“출병은 사흘 뒤입니다.”
“전하!”
경악한 이시도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이건 아닙니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교국이 군사를 일으키다니요! 훗날 좋지 않은 선례가 될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라발의 대사로서 주제넘은 발언이군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 부디 생각해 주십시오.”
책상을 꽉 부여잡은 이시도르의 양팔에 퍼런 핏줄이 섰다. 몸을 낮게 숙여 페기와 시선을 맞춘 그가 단어 하나하나 씹어 뱉듯 을렀다.
“무덤에서 올라와 다리 아래를 전전하시던 전하를 구한 것이 누구인지, 처음부터 의심 없이 전하를 믿고 지원했던 것이 과연 누구인지.”
“…….”
“그간의 제 노고를 아신다면 이러실 수가 없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교국과 라발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과감했던 그의 투자는 엘피도 공작이 훗날 교황의 자리에 오를 시 더욱 빛을 발할 예정이었다. 엘피도 공작을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카타리나 공작은 이시도르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어 줄 것이었으므로, 계획대로 황태자만 무사히 황위를 이어받는다면 그는 황제와 교회를 뒷배로 둔, 라발의 역사상 유례없이 강력한 정치가가 될 수 있었다.
그토록 장대한 미래가 스러지려 하고 있었다.
“압니다.”
페기는 차분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이시도르는 일말의 희망을 품을 뻔하였으나.
“아니까 미리 알려 주는 것이지요. 지는 싸움에서 빨리 발을 빼라고.”
“…….”
“망나니 사촌 하나로 그간의 노고와 가문의 영광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페기는 상냥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이시도르의 녹색 눈에 잔물결이 일었다.
시푸른 달빛이 파도처럼 밀려들던 야밤의 사창가.
포주에게 머리채가 잡혀 끔찍한 몰골로 뒹굴던 그녀를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았던 그는 이제야 벼락같이 깨닫는다.
자신과 그녀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역전되었음을. 그리하여 그녀가 생색처럼 베풀어 주는 자비조차 허겁지겁 받아먹을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
날이 밝기 무섭게 원탁회의가 소집되었다.
퀴테리아를 비롯한 반(反) 엘피도 공작파가 사라진 원탁에는 그의 뜻에 따라 거수기 노릇을 하는 추기경들만이 가득했으므로, 교국의 참전은 어렵지 않게 결정되었다. 황태자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열흘 전부터 이미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었던 파병은 그즈음에서 완전히 공언되었다.
그러자 평화롭던 성도 오스피나가 순식간에 전운으로 휩싸였다. 시민들은 불안감에 떨었으며, 성도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호사가들은 참전으로 교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과 손실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