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못할 것을 안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였다. 삶에 대한 의지만은 누구보다 강렬했다. 한순간에 진창으로 떨어져 모멸감을 견딜지언정 아득바득 살아남아 재기의 기회를 노릴 것이니, 이대로 난간에 올라선 것은 전혀 그녀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도 안다.
알기에 더욱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저주스러울 정도로 탐나는 이 세상, 빛나는 나의 삶과 차마 움켜쥐지 못한 것들. 퀴테리아는 한때 가졌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것들, 그리고 코앞에서 놓쳐야만 했던 궁극의 목표들을 멍하니 떠올려 보았다. 살다 보면 언젠가 다시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기회는 아니리라.
“내가 아는 예리엘이라면 곧 그대의 몸을 노릴 겁니다.”
내가 죽음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인 줄은 어찌 알고.
참으로 무서우신 분이 아니던가.
퀴테리아는 허망한 기분으로 스르르 눈을 내리감았다. 영광된 삶이 도래할지언정, 제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마찬가지로 육신이란 껍데기로만 남아 위대하신 분의 꼭두각시로만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셈이 빠른 만포르차의 퀴테리아.
제아무리 세상을 가질 수 있다 한들, 스스로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복잡하던 생각은 정리되었다. 며칠째 그녀를 괴롭히던 번민은 가라앉고, 짙은 체념만이 남았다. 퀴테리아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 세상을 눈에 담아 보기로 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탐하였으나 끝내 닿지 못했던 나의 꿈.
그러나 밝아지는 시야에 가득 들어찬 것은 시커먼 밤하늘이 아닌, 눈이 멀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이었다.
뜻하지 않게 홀려 버린 퀴테리아는 난데없이 사라져 버린 밤하늘의 부재를 뒤늦게 알아챘다. 그러자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시야가 확 넓어진다. 눈앞에서 날갯짓하는 하얀 비둘기. 퀴테리아는 그제야 시야를 가득 메웠던 황금이 바로 새의 눈알이었음을 깨닫는다.
찰나의 미련이 발목을 잡았구나.
퀴테리아는 한탄하며 다시금 눈을 내리감았다.
남의 육신을 훔치는 게걸스러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라발의 황태자, 티에리 장 오귀스트는 아침 댓바람부터 몹시 분노해 있었다. 이유인즉, 성도에서 날아온 피아제 백작의 서신이 실로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폐위? 폐위라고?!”
난데없는 고함 소리에 대낮부터 술병을 기울이던 지방 군벌의 막내아들이 표정을 굳히며 서신을 넘겨받았다. 고상한 척 수를 놓고 있던 황태자의 정부, 아말리아가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갔다.
“전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설마 폐하께서 진정 전하를 폐위하시겠다는….”
“낸들 어찌 알겠나!”
홧김에 서신을 빼앗은 티에리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방만하게 소파에 들어앉았다. 중앙 교회로 폐위 절차에 관한 문의가 들어왔다, 전하의 기를 꺾으려는 폐하의 수작임이 분명하니 이쯤에서 적당히 머리 숙이고 들어가라는 피아제 백작의 간곡한 잔소리가 그의 손아귀 아래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분명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지난해 단돌로 공작의 아들과 결혼했던 막냇동생마저 출산 중 태아와 함께 사망하면서, 황제에겐 하나 남은 아들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방계로 눈을 돌리자니 세잔의 의뭉스러운 크리상즈 공작이 버티고 있으며, 조모 되시는 디안드라 섭정을 끝으로 직계가 모두 사라져 버린 살레르티나 전(前) 왕조의 방계로까지 시야를 넓히자니 그러면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어 발루아 황가는 고작 한 대만에 끝나고 만다. 자신을 시조로 한 발루아 황가의 영광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황제께서 설마 그런 선택을 내리실 리 없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진정 새로운 후계자를 낙점하신 것이라면 어떡합니까? 크리상즈 공작이 황가의 가장 가까운 방계이긴 하나, 잘만 찾아보면 말 잘 듣는 먼 방계의 꼭두각시쯤은 세잔에서도 충분히 데려오실 수 있을 겁니다.”
“냄새나는 세잔의 농부가 누미디아에서 인정이나 제대로 받겠는가!”
지방 군벌의 끊이지 않는 우려에도 티에리는 코웃음이나 쳤다.
그의 말을 빌려 냄새나는 시골 바닥에서 왕 노릇이나 하던 것이 바로 발루아 황가이나, 누미디아에서 태어나 평생을 라발인으로 살았던 그는 스스로를 가문의 뿌리인 세잔과 분리시킨 지 오래였다. 라발에 완전히 녹아든 그의 모습은 선민의식 강한 누미디아 귀족들이 그의 황위 계승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 이유도 되겠지만, 한편으로 세잔인들에게 꾸준한 반감을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폐하께선 절대 나를 쳐 내지 못하신다. 공공연히 폐위를 문제 삼아 나를 겁주시려는 요량이겠지!”
“하지만 전하, 언제까지고 별궁에 눌러앉아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제와의 신경전에 지쳐 먼저 나가떨어진 것이긴 하여도, 이대로 별궁에서 꾸물거리다간 꼬리 말고 도망간 겁쟁이밖에 되지 않는다. 먼저 건 싸움인 만큼, 이기진 못하더라도 격렬하게 대항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알게 모르게 그를 경원시하던 누미디아의 귀족들도 생각을 달리할 것이었다.
황제는 이미 패를 던졌다.
피아제 백작이 성도에 가 있는 만큼 황태자에게 소식이 들어갈 것쯤은 미리 예상했을 터. 폐위까지 거론된 상황에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누미디아로 돌아가? 아니면 저도 똑같이 교회를 끌어들여?
“저기… 전하.”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던 아말리아가 별안간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방해를 받은 티에리가 짜증스럽게 일갈했다.
“네 징징거림 들어 줄 시간 없다! 나가!”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울먹이던 아말리아가 갑자기 앗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그녀를 밀치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웬 더러운 비렁뱅이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지방 군벌의 아들이 당혹감에 목청을 높였다.
“밖의 호위 기사들은 대체 무얼 하길래 더러운 거지새끼를 들이나!”
“아, 아니에요, 이분은….”
“황위를 탐하신다고요.”
깊숙이 눌러쓴 거적 데기 아래서 매끄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순간 행동을 멈춘 티에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뭐?”
“황제 폐하의 권력은 안정되어 있으며 지지 기반은 여전히 굳건합니다. 수도 누미디아를 감싸고 있는 칼라브리아 대성벽이 무너지는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폐하께서 물러나실 일은 요원해 보이지요.”
“…….”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면요.”
여인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인상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그녀를 쏘아보던 티에리가 문득 표정을 풀었다. 거적 데기 아래 슬며시 드러나는 여인의 눈이 오묘한 금빛이었다.
“제 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먼 곳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와 같은 아득한 울림이 있었다. 티에리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여인, 퀴테리아의 거죽을 쓴 천사 예리엘이 얇은 입술 끝을 기이하게 말아 올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비밀리에 누미디아로 잠입한 라발의 서부 군벌 세력들이 야음을 틈타 살라체 대궁전을 점거하였다. 요앙 오귀스트는 간신히 누미디아를 빠져나가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몬테베르디 장군이 전사했다. 출산을 앞두었던 황태자비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사산했고, 곧이어 황태자가 정부의 손을 잡고 황위에 올랐다.
바야흐로 평화롭던 라발의 정국이 혼돈 속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
누미디아의 소식은 곧장 성도 오스피나로 전해졌다.
“예하! 클레멘스 추기경 예하!”
덜떨어진 외사촌이 걱정되어 며칠째 잠 못 이루던 이시도르는 누미디아에서 날아온 전갈을 받기 무섭게 한밤중 얇은 잠옷 차림으로 클리멘스의 사택에 들이닥쳤다. 마찬가지로 지금 막 누미디아의 소식을 전해 들었던지, 클레멘스 역시 잠이 다 깬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예, 예하… 이게 도대체….”
“일단 앉으세요, 백작.”
변함없이 차분한 태도로 자리를 권한 클레멘스가 손수 따뜻한 차를 따라 이시도르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병자처럼 창백해진 안색으로 손만 벌벌 떨던 이시도르가 간신히 마른침을 삼키곤 운을 뗐다.
“황태자 전하께선… 분명 누미디아로 돌아가 황제 폐하께 용서를 구하리라 하셨습니다. 불과 열흘 전 받은 서신에 그리 적혀 있었어요. 갑자기 모반이라니요, 그럴 리가….”
“백작. 열흘 전이면 이미 서부 군벌 세력이 누미디아로 잠입을 시도했을 시기입니다.”
“…예?”
일순 이시도르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딱하다는 듯 그를 응시하던 클레멘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달 전, 사형이 선고될 예정이었던 퀴테리아의 종적이 묘연해졌습니다. 계속해 그녀의 뒤를 쫓던 중 라발 서부 군벌 세력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보고가 올라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태자 전하의 동태를 은밀히 살피라 명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부 군벌들과 암호를 주고받고 계시더군요.”
“그걸 알고 계셨으면서 왜 이제야…!”
“더욱 면밀한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타국의 일이니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거니와, 퀴테리아로 추정되는 웬 정체 모를 수도사가 황태자 전하의 측근으로 있다는 보고까지 들어왔으니까요. 교회가 사형수를 놓쳐 라발에 큰 화가 닥친다면 가만 계실 황제 폐하가 아니시잖습니까?”
물 흐르듯 이어지는 클레멘스의 설명에 이시도르는 그저 황망한 기분을 삼켰다. 라발을 타국이라 칭하며 남 일처럼 얘기하는 추기경이 문득 몸서리치게 낯설었다. 성도로 가거든 클레멘스와 공조하라며 보기 드문 신뢰를 내비치던 오래전 황제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듯한 미소를 내건 클레멘스가 차갑게 식은 이시도르의 손등 위로 손을 겹쳐 왔다.
“라발은 지난 천 년 동안 교회를 수호해 왔던 가장 절대적인 아군. 교회는 결코 라발의 위기를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준비시켜 두었던 경비대가 출병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머지않아 라발의 혼란도 가라앉을 것입니다.”
“자, 잠시만요. 출병이라니요? 설마 교국이 라발의 문제에 개입이라도 하겠다는 뜻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