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0화 (310/328)

조금 전까지 시종장이 있던 자리를 향해 있던 황제의 살기 어린 시선이 삽시에 그녀에게로 꽂혔다. 단돌로 공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십수 년 가까이 라발의 재상직을 역임하고 있는 숙련된 정치가조차 여전히 저 무지막지한 황제 앞에서는 기를 못 폈다.

“이미 궁내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아말리아 양에게 황태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며 별궁에서 부부 행세를 하신다고….”

“해서.”

“듣기로는 아말리아 양의 아들은 벌써부터 걸음마를 한다고 합니다. 발육이 남달리 빠른 데다 보기 드물게 총명하다는 소리까지 있습니다.”

“해서.”

“언제까지 별궁에 머물러 계시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서!”

요앙 오귀스트가 시뻘게진 얼굴로 격분했다. 단돌로 공작은 본능적으로 떨려 오는 몸에 애써 힘을 주며 항변했다.

“화, 황태자비 전하의 상태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번에도 유산을 하신다면 다시는 수태하기 어려우실 것인데, 그때에는 폐하께서 바라지 않으신들 아말리아 양의 아들밖에는 대안이 남지 않습니다.”

“헛소리!”

“폐하,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사생아를 본처의 슬하로 들여 입양하는 것이 전례 없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이…!”

독이 잔뜩 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요앙 오귀스트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꽃병을 낚아채 냅다 던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작이 이마에 꽃병을 맞고 쓰러지자, 벽에 조개처럼 붙어 있던 시종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당장 저것을 끌어내!”

고개를 조아린 시종들이 피를 흘리며 좀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공작을 싣고 나갔다. 그러고도 한참을 씩씩거리던 요앙 오귀스트는 조심스레 부축을 권해 오는 시종을 날파리처럼 쫓아내곤 성큼성큼 제 발로 소파에 가 앉았다.

화를 못 참고 단돌로 공작에게 패악을 부리긴 하였으나, 기실 그가 칼로 쑤시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티에리 장 오귀스트.

하나뿐인 그의 자식이자, 그의 뒤를 이을 라발의 황태자.

어릴 때부터 되바라지긴 하였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아들을 떠올릴 때마다 명치가 꽉 막혀 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아둔하고 미련한 것이야 타고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니 마땅찮긴 하여도 이토록 분노를 일으키진 않았으나,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공공연히 아비에게 내보이는 적개심은 실로 머릿속이 아득해질 만한 것이었다.

대관절 녀석에게 무슨 볼 것이 있다고.

사람은 자고로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자식새끼는 주제를 몰라도 한참을 몰랐다. 아비에겐 불운이요, 아들에겐 천운으로 감히 황실의 핏줄을 타고나는 경사를 누렸으나, 고귀한 혈통을 제하거든 녀석에게서 그나마 볼 만한 것은 그럭저럭 반반한 상판과 멀쩡한 허우대가 전부였다.

백 년 묵은 능구렁이 같은 누미디아의 귀족들과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는 지방의 군벌들, 천년 제국 라발을 위협하는 북방의 신흥 강호 탐보프와 고루하기 짝이 없는 교회의 늙은이들을 통솔할 재능은 조금도 갖추질 못했다.

하물며 발루아 황실의 뿌리인 세잔에서마저 황태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는 실정이었다.

황제의 장자로 태어나 날 때부터 황태자의 관을 쓰고 있었으면서, 어찌 된 것이 서른 해가 다 되도록 독자적인 세력 기반 하나 다져 놓질 못했다.

그나마 외사촌지간으로 젖먹이 시절부터 함께 자랐던 피아제 백작이 있을 적엔 허울이나마 누미디아의 고위 귀족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백작이 성도로 떠난 뒤에는 그마저 물거품이 되었다.

이제 와 황태자가 어울리는 무리들이란 들개처럼 후원가를 찾아다니는 예술가들,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리는 하급 귀족들이나 속에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모를 지방의 군벌들이 대다수였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배자가 반드시 만인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타고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나길 범재라 하여도 혹독한 교육과 노력을 통해 그럭저럭 괜찮은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남들보다 배로 열중하는 성실함과 강력한 자기 통제력, 무엇보다도 아랫사람들을 품을 줄 아는 포용력이었다.

황태자는 그중 무엇도 갖추질 못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일깨우는 쓴 말은 멀리하고 오직 듣기 좋은 단 말만을 가까이했다. 아비의 특출난 점은 하나도 물려받질 못했으면서 변덕스러운 성정만은 쏙 빼닮아서 성실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진득하게 책상에 앉아 있지 못하고 매사 밖으로만 도니,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지방 군벌 따위와 엮인 것이었다.

심지어는 그런 주제에 오만방자하기까지.

황태자가 그나마 간언에 귀 기울여 주는 인물은 이모 되는 선대 피아제 백작뿐이었다. 일찍 죽은 황후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황태자의 양육을 담당했던 탓도 있겠으나, 사실상 외가인 피아제 백작가야말로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 줄 뒷배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선대 피아제 백작은 지병이 악화되어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귀향한 지 오래였다. 새로운 피아제 백작은 재주 많은 젊은이지만,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고삐 풀린 황태자를 완전히 제어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그런 피아제 백작마저 사라지자, 황태자의 주변은 간신들로 가득 차고 말았다. 자신을 칭송하는 허황된 소리들만 들으며 분노만 키워 나가던 황태자는 결국에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아비에게까지 날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멍청하고 멍청한 것.

뼛속까지 제왕의 자질을 타고 태어난 요앙 오귀스트는 제 자식이라 하여 무한한 애정을 베풀지도, 제 후계자라 하여 무한한 인내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자식들에게 더 높은 기준을 요구했고, 후계자에겐 심지어 경계심마저 보였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어미였던 디안드라 섭정과 각을 세웠었던 요앙 오귀스트는 권력 앞에서 피를 나눈 가족이 얼마나 무의미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니 이제 와 아들 새끼가 아비에게 불손하다 하여 새삼스럽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아들놈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저를 폐위하고 기어이 제좌를 탐했다면, 그는 한바탕 욕을 퍼부으면서도 결국에는 잘해 보라며 덕담 한마디 해 주었으리라.

하지만 황태자는 그러지 못했다.

재주도, 사람도, 하물며 끈기도 없는 놈이 쓸데없이 콧대만 높다. 가진 능력이 부족하면 아비에게라도 빌붙어 아비의 세력을 무사히 넘겨받을 생각이나 해야 하는데, 그딴 건 안중에도 없었다. 가장 잘난 점이 아직도 황제의 장자로 태어난 것인 주제에 정작 아비를 깎아 내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쿵!

화를 못 참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친 요앙 오귀스트가 씩씩거리며 깃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 와 후계자를 교체하긴 늦었다.

자식에 한하여 박복했던 그는 첫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을 제각기 다른 이유로 잃었다. 그나마 무사히 성장하여 지난해 단돌로 공작의 아들과 결혼했던 막내딸은 출산 중에 아이와 함께 죽었다. 기가 막히게도 아들 새끼의 사생아가 그의 유일한 손주였다.

그렇다고 함부로 방계로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면 사촌인 세잔의 크리상즈 공작이 일 순위가 되는데, 그놈은 어릴 적부터 성질머리가 아주 돼먹지 못한 놈이었다.

세잔의 소년 왕이었던 요앙 오귀스트가 운 좋게 라발의 제좌를 받들어 고향을 떠난 뒤로, 크리상즈 공작이 호시탐탐 세잔의 왕좌를 노리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태자 그 미련한 천성을 뜯어고쳐야 한다.

고심 끝에 결심한 요앙 오귀스트가 깃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말의 첫머리는 게을러빠진 외알박이 클레멘스, 였다.

***

“겉으로 보기엔 황태자 전하께서 마냥 떼를 쓰고 계신 것으로 보이지요.”

클레멘스는 그렇게 운을 뗐다.

“라발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인 몬테베르디의 장녀를 비로 두었고, 심지어는 그 비 전하께서 출산을 앞두신 상태인데 난데없이 출신도 변변찮은 정부에게서 낳은 사생아를 황실 계보에 들여 황태손으로 삼으시겠다니요. 누미디아가 발칵 뒤집힐 만도 합니다.”

“…….”

“하지만 황실의 사정을 깊숙이 파고들어 보면 마냥 간단하게 정리될 일만도 아닙니다.”

클레멘스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어느새 엷은 잿빛 먹구름이 모여든 창밖으론 부슬거리는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선 불운히도 그다지 사이좋은 부자지간은 아닙니다. 폐하께선 오래전부터 황태자 전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셨고, 황태자 전하께선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과 분노를 밖으로 나돌며 해갈하셨지요. 엘베트라 황후께서 병으로 쓰러지신 뒤로 황태자 전하께선 쭉 외가에서 성장하신 터라 가족으로서의 연도 상당히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페기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라발의 요앙 오귀스트가 후계자와 계속 삐끗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성도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라발쯤 되는 대제국 황실의 불화에도 호사가들은 크게 입을 놀리지 않았는데, 요앙 오귀스트에게 불화란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단어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의 어머니였던 디안드라 섭정.

한낱 세잔의 왕이었던 그에게 라발의 황위를 안겨 준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부터 무척이나 되바라졌던 요앙 오귀스트는 곧잘 어머니와 각을 세웠다고 한다.

귀족들의 견제 속에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어린 아들에게 황위를 빼앗겨야만 했던 디안드라 섭정은 주제도 모르고 기어 오려는 제 아들을 몹시 증오했고, 요앙 오귀스트는 그마저 역으로 이용하여 누미디아의 귀족 세력들을 포섭했다.

그렇게 섭정과 어린 황제로 양분되어 있었던 누미디아의 권력 투쟁은 어느 날 갑자기 디안드라 섭정이 숨을 거두면서 다소 시시하게 끝을 맺었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호사가들은 황제가 섭정을 독살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패륜적인 발언을 일삼아 댔는데, 섭정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바로 황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앙 오귀스트의 불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태자의 모후인 엘베트라 황후, 그녀의 사후 약 10년 가까이 살라체 대궁전을 지켰던 메리알라이데 황후, 3년 전 다소 불투명한 이유로 친정과 함께 몰살당한 시스지에 황후까지. 그의 배우자들은 하나같이 황제와의 불화로 누미디아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다가 어느 날 급사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황제의 사적인 관계는 거의 말살되었다 해도 좋았다.

“폐하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황태자 전하께서 본인과 같은 황제가 되리란 기대는 접으셨습니다. 그래도 다른 대안이 없으니 폐하께서 평생을 바쳐 다져 놓으신 세력 기반을 그대로 물려주고자 하셨지요.”

“그게 몬테베르디 가문인가요?”

“예.”

요앙 오귀스트에게는 충성스러운 두 개의 측근 가문이 있다.

하나는 단돌로, 다른 하나는 몬테베르디.

단돌로가 행정을 담당하고 있다면, 몬테베르디는 군무를 도맡았다. 요앙 오귀스트가 일찌감치 몬테베르디의 장녀를 황태자비로 낙점하여, 유산을 반복하는 지금까지도 계속해 싸고도는 것은 단순히 며느리를 예뻐해서가 아니었다. 혼맥이야말로 가문 간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에도 황태자비 전하께서 유산을 하신다면, 폐하께선 어떻게든 교회로부터 혼인 무효를 받아 내실 겁니다. 그러고는 몬테베르디의 차녀를 며느리로 들이시겠지요. 중요한 것은 훗날 황후가 될 자리에 몬테베르디의 아가씨를 두는 것이지, 몬테베르디의 어떤 아가씨인지가 아니니까요.”

“몬테베르디 후작은 딸들을 굉장히 아낀다고 들었어요. 그런 사람이 과연 동의할까요?”

“가문의 명운이 달린 일입니다. 동의할 수밖에요.”

차를 한 모금 마신 클레멘스가 어딘지 불편한 기색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라발은 수없이 왕조가 교체되어 왔던 나라지만, 그 근간에는 여전히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정변을 일으켜 제좌에 오르셨던 드라기우스 황제 역시 방계의 일족이었고, 디안드라 황녀의 피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도 가장 가까운 방계의 자격으로 제좌를 차지하신 셈이니까요.”

한마디로 황가와 방계로조차 이어지지 않았다면, 라발에서 제좌를 넘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역사적으로 제좌를 탐했던 유력 귀족 가문들이 끝내 전국적인 반발을 이기지 못하고 초라한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발루아 황가는 손이 드뭅니다. 기껏 이어진 방계는 세잔 쪽에 남아 있어 라발과는 큰 연이 없지요. 게다가 제 조카와 혼인하셨던 막내 황녀님마저 돌아가신 탓에 폐하의 직계는 황태자 전하밖에 남지 않은 상황입니다. 더 올라갈 곳이 남지 않은 몬테베르디 같은 가문에게 황태자비의 자리는 차마 꿈도 꾸지 못했던 하늘로 이어지는 사다리 같은 존재일 겁니다.”

“황가와의 혼맥…. 제좌를 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최선이겠군요.”

“맞습니다.”

클레멘스가 팔을 뻗어 페기의 빈 찻잔에 조르르 차를 따라 주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페기가 가볍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황태자는 왜 반대하는 거죠? 몬테베르디와의 혼맥으로 이득을 얻을 것은 황태자도 마찬가지일 텐데.”

“폐하를 향한 적개심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 등등 이유야 많겠지만, 하나로 요약하자면 주도권 싸움일 겁니다.”

“주도권 싸움이요?”

“현재 누미디아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 중에서 온전히 황태자 전하의 편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전하의 외가인 피아제 백작가뿐입니다. 단돌로와 몬테베르디를 포함한 가문들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대놓고 전하를 반대하지 않을 뿐이지요. 아무리 황태자 전하께서 못나셨다 한들, 마흔 넘은 세잔의 크리상즈 공작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세잔의 소년 왕이었던 요앙 오귀스트가 라발의 제좌를 차지했을 때도 불만은 터져 나왔었다. 고귀한 천년 제국의 제좌를 어찌 저 시골 바닥에서 굴러먹다 온 망아지에게 넘기냐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들려왔으니, 일평생을 그 시골 바닥에서 산 것으로 모자라 적통도 아닌 크리상즈 공작에게 기회가 돌아갈 리 없었다.

“요는 황태자 전하께서도 본인의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아신다는 겁니다.”

유일한 적통.

대안이 없는 후계자.

자질과는 관계없이,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황태자는 단숨에 라발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요앙 오귀스트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시점에서 그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평생 본인을 무시하셨던 폐하께는 인정을 바랄 것이며, 이후 함께 정국을 운영해 나갈 몬테베르디에게는 굴종을 원하시겠지요. 기실 어느 정도 기 싸움이 필요한 단계임은 맞습니다.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이 어찌 순탄할 수만 있겠느냐만, 그 방법이 너무 치졸한 것이 문제겠지요.”

황태자는 정부로부터 본 사생아를 황태자비 슬하의 양자로 들여 황태손으로 임명하고자 한다. 황태자비가 아예 석녀가 되었다면 모를까,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었다. 요앙 오귀스트 역시 손안에 쥔 권력을 졸렬하게만 휘두르려는 아들의 작태에 가장 실망했으리라.

“피아제 백작이 정신없을 만하군요.”

“그러잖아도 요 며칠 밤마다 저를 찾아와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 어린 한탄을 늘어놓고 갔답니다. 하기야 백작도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황태자 전하의 뒷수습만 하다가 겨우 성도로 피신하여 인생을 즐기는가 싶더니, 본국에서 저리 말썽이시라니요.”

클레멘스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백작이 사색이 되어 달려 나갔으니 곧 새로운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새 소식은 입수하는 대로 바로 전해 드리겠으니, 그때까진 여독을 풀고 계십시오.”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클레멘스가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는 선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문득 고개를 들었다.

채도 낮은 하늘색으로 덮인 벽지와 화려하진 않아도 섬세하게 세공이 들어간 가구들. 그녀의 취향대로 꾸며졌으나 여전히 익숙지 않은 집무실의 풍경을 조금 어색하게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부슬거리는 빗소리가 들려오고, 사람 없는 복도는 어느덧 시원한 물비린내로 가득 찼다. 홀로 복도를 걷던 페기는 갈림길에 이르러 충동적으로 길을 꺾었다. 서관을 빠져나가는 방향이 아닌, 내전과 맞닿은 후원으로 들어가는 방향이었다.

양옆이 꽉 막혔던 복도는 어느새 한쪽 벽면이 뚫린 회랑이 되어 후원을 훤히 내보였다. 빗물을 머금은 수풀은 보다 울창해 보였는데, 인적이 드물기 때문인지 고요한 야생의 느낌이 팽배해 있었다.

회랑의 가장자리에서 물끄러미 후원을 내다보던 페기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보았다. 많이 약해진 빗줄기가 아프지 않게 그녀의 손을 때렸다. 그렇게 미지근한 빗물을 느끼다가, 거리낌 없이 후원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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