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오스피나의 날이 밝았다.
요 며칠 먹구름으로 꽉 차 있던 하늘은 어느새 맑게 개었으며, 부쩍 뜨거워진 햇볕이 성벽 안으로 내리꽂혔다. 장이 서지 않아 한가로운 오전의 성도에는 광장에서 노래하는 음유 시인의 목소리만이 나직하게 퍼지고 있었다. 느리고 여유 있는 풍경. 평화로운 한때.
그런데 갑자기 남쪽 성문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길 가던 행인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쭉 빼 대로의 남쪽을 힐끔거렸다. 누가 통행 거부라도 당한 것인가. 라발과의 교류가 재개된 이후 남쪽 성문은 불가피하게 통행량이 급증한 탓으로 하루걸러 한 번씩은 꼭 저런 사달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행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황급히 대로에서 비켜선 행인들은 쏜살같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두 명의 기수를 목격했다. 하나는 엘피도 공작을 상징하는 용 깃발을 들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카타리나 공작을 상징하는 세 개의 별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러자 행인들의 눈이 대접만큼 커다래졌다. 주인을 잃은 것처럼 적막하던 성도로 드디어 그분께서 돌아오시는 건가. 쿵쿵거리는 맥박을 따라 커져만 가던 말발굽 소리는 머잖아 남쪽에서부터 달려오는 화려한 마차로 달하였다.
“카, 카타리나 공작 전하시다!”
행인들이 제자리서 뛰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선잠에 들어 있던 성도 오스피나가 막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예후르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오던 페기가 곧장 눈가로 들이치는 직사광선에 얼굴을 구겼다. 순백으로 칠해 놓은 앙겔리카 성궁은 여름만 되면 이렇듯 반사광에 눈앞이 하얘지곤 했다. 익숙한 불편함마저 감회가 새로워 뚫어져라 하얀 성벽을 올려다보던 페기는 문득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양산에 고개를 돌렸다.
자색 추기경 의복을 차려입은 클레멘스가 늘 그렇듯 고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하.”
“…오랜만이에요, 클레멘스 추기경.”
그녀의 화답에 클레멘스는 남부식으로 우아하게 팔을 휘두르며 허리를 숙여 보였다.
“동관에 전하의 집무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최대한 전하의 취향을 반영하려 해 보았습니다만, 제 안목이 부족한 터라 자신할 수가 없군요. 부디 직접 발걸음 하셔서 평을 내려 주시지요.”
“내 집무실이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 명하신 바입니다만….”
페기가 놀란 눈으로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예후르는 빙그레 웃으며 서관 쪽을 눈짓할 뿐이었다.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던 페기는 일단 클레멘스를 따라 자신의 집무실이란 곳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수도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고했다.
“에, 엘피도 공작 전하! 부디 내전으로 와 주십시오. 성하께서 지금….”
숨 가쁘도록 이어지는 수도사의 말을 손짓으로 끊어 낸 예후르가 몸을 돌려 페기를 마주 보았다.
“뒤따라갈게. 집무실에 먼저 가 있겠니?”
“…응.”
예후르는 페기의 머리에 살짝 입을 맞추곤 수도사를 따라갔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페기가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성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청백회와 함께 레오폴트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극 정성으로 아끼던 비올라가 죄인으로 잡혀 들어간 것도 그렇거니와, 사력을 다해 재건하였던 성도 오스피나에 다시금 창칼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울리고 핏물이 터진 것만으로도 그에겐 족히 충격이었다. 수십 년 전 오스피나 참극의 충격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성도를 떠나기 전까지는 시름시름 앓기만 했을 뿐이다. 지금껏 그녀가 보아 왔던 레오폴트는 늘 병세가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했으므로 별일이 아니라 여겼건만, 어쩐지 이번에는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병세는 크게 변함이 없습니다만….”
클레멘스가 보기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페기가 가만히 그를 쳐다만 보자,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고르던 클레멘스가 목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십니다. 갑자기 열 살 먹은 어린애가 되시다가도, 어느 순간 제정신을 되찾곤 하시지요.”
“…….”
“그래도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다행입니다. 고드릭 수도사의 말론 어린아이로 돌아가신 교황 성하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엘피도 공작 전하뿐이라고 하시더군요.”
클레멘스는 그러면서 요전번 성하께서 쾌차하시리라 예후르가 단언했다며 크게 걱정하진 말라고 했다. 예후르의 장담이라면 믿을 만했으나 마음 한편이 쓰라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페기가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선 비올라가 사라져야 했다.
이제 와 깨닫기로 비올라 역시 천사 예리엘의 선택을 받은 사도였지만, 그녀를 거짓된 사도로 몰아 쫓아낸 데는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어차피 정치판의 싸움이란 다 그런 것이 아니겠나. 비올라 역시 기회만 있었다면 그녀와 예후르를 몰아내어 권력의 정점에 섰을 것이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다르다.
페기는 레오폴트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접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떳떳했지만 단 한 사람, 레오폴트에게만은 떳떳하지 못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부모와 같은 존재에게서 원망스러운 눈빛을 받고도 의연하기에는 아직 그녀도 여물지 못했다.
“…안드레아와 차라는요. 먼저 성도에 도착하지 않았나요?”
페기는 자꾸만 진창으로 빠져드는 생각의 방향을 돌리기 위하여 화제를 바꾸었다.
“마가 공작 전하께선 성하를 뵙고는 바로 성도를 떠나셨습니다. 차라 도련님은… 글쎄요, 성도를 떠나셨다는 소식은 없으니 아마 북방에서 온 공자와 함께 이리저리 쏘다니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차라의 성인식이 곧이에요.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일은 없었나요?”
아, 실은 그게…. 막 운을 떼려던 클레멘스가 저만치서 다가오는 사람을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페기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서관에서 바삐 달려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피아제 백작 이시도르였다.
라발의 외교 대사가 성궁에 있는 것은 달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늘 세련된 차림을 추구하는 사람답지 않게 풀어헤친 소매나, 한눈에도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페기는 오래지 않아 이시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시도르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황급히 가슴을 짚으며 인사를 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예. 오랜만이군요, 백작.”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뵈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이시도르는 정신이 다른 데 팔린 것처럼 몹시 부산스러워 보였다. 그러자 페기는 예의상 엷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공무 중에 괜히 방해한 것 같군요. 회포는 다음번에 풀도록 합시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빠르게 속삭인 이시도르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딱딱하게 굳어지는 그의 표정을 확인한 페기가 다시금 넌지시 클레멘스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요하는 눈빛에 클레멘스는 여전히 난처한 기색으로 안대를 긁적였다.
“일이… 하나 터지긴 했습니다.”
“…….”
“라발에서요.”
***
라발의 수도 누미디아.
이 오래된 천년 도시에는 여섯 개의 높고 낮은 언덕들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 아래는 상대적으로 습하고 빗물에 잠기기 일쑤인지라, 자연스럽게 언덕 위는 지체 높은 귀족들이 점하게 되었다. 그중 가장 높은 언덕, 가장 중심의 언덕이 황제에게로 돌아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가운데 언덕의 이름을 따 살라체 대궁전이라 이름 지어진 황제의 거처는 거대한 돔과 가장자리를 둘러싼 여섯 개의 첨탑 그리고 궁전 내부를 장식하는 정교하고도 화려한 세공으로 유명했다.
현존하는 라발 건축 양식의 모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대궁전은 지금도 천년 제국 라발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살라체 대궁전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지 못했다. 변덕스러운 황제의 성정에 따라 휙휙 바뀌는 것이 대궁전의 분위기라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심했다. 늘 자잘한 갈등을 빚어 왔던 황제와 황태자가 서로 조금도 물러설 수 없는 난제를 맞닥뜨린 까닭이었다.
때는 대략 반년 전.
속을 썩이던 지병으로 한적한 곳에서 요양 중이던 황제는 어느 날 수도에서 날아온 소식을 듣기 무섭게 격분을 참지 못하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태자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 누미디아의 귀족들은 이번에야말로 저 절치부심했던 황태자가 아비의 쇠고집을 무참히 꺾게 되리라며 흥미진진하게 사태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회하였어도 평생 거뜬하게 제좌를 지켜 왔던 황제 요앙 오귀스트의 정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으니. 결착이 나지 않은 채 지지부진하게만 이어지던 부자지간의 신경전은 결국 갑갑증을 참다못한 황태자가 대궁전을 뛰쳐나가면서 일단락되고 말았다.
명색이 황태자인데 꼴이 안타깝게 되긴 하였어도 어찌하겠는가.
누미디아의 귀족들과 대궁전의 시종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내심으로는 안도했다. 꼴 보기 싫은 아들을 쫓아내고 황제는 다시 배부른 사자처럼 느른해질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람 잘 날 없던 이 대궁전에도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터.
하지만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아, 저 멀리 별궁에서 날아온 서신 한 장에 궁전의 평화가 산산조각 깨어질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이 돼먹지 못한 놈이!”
서신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싶더니, 곧이어 요앙 오귀스트가 목에 벌건 핏대를 세우며 서신을 내동댕이쳤다. 조마조마하게 그를 지켜보던 시종장이 헐레벌떡 달려와 서신을 주우려 하였으나, 벌떡 일어난 황제가 홧김에 서신을 마구 짓밟는 것이 더 빨랐다.
“폐, 폐하!”
“시종장, 이 잡스러운 쓰레기를 당장 불 싸지르도록 해라!”
“하오나…!”
“당장!”
서릿발 같은 하명에 시종장은 하릴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엉망진창으로 찢겨 나간 서신을 모아 나갔다. 아직도 채 분이 풀리지 않은 요앙 오귀스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거칠게 씨근덕거리고 있자, 기겁하여 멀찍이 피해 있던 단돌로 공작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