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같은 자세였던 몸이 뻐근했다. 밖으로 나가 굳어 있는 관절이나 풀 생각이었는데, 팔을 꿈틀거리기 무섭게 은근하게 몸을 덮어 오던 무게감이 쑥 내려가 버렸다.
그녀는 의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검은 모피로 만들어진 외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아연하게 눈만 깜박이던 페기가 천천히 손을 뻗어 외투를 집어 들었다. 한눈에도 몹시 값나가 보이는 모피. 아마도 곰 가죽일 것이다. 부드러운 털가죽을 멍하니 매만지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틀어 보았다.
마차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 밖으로 펼쳐져 있는 드넓은 평원.
모피를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싶더니, 결심한 듯 허리를 숙여 마차를 빠져나왔다. 발을 내딛기 무섭게 웃자란 들풀이 발목을 간질여 오고, 시원한 저녁 바람이 머리칼을 한껏 흩트려 놓았다. 온통 하늘을 뒤덮은 노을빛에 잠시 황망해 있던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뒷모습을 발견하곤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널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정신없이 세투발을 떠나오며 아주 많은 생각을 했지만, 여태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물음은 그것 하나였다. 너는 알았을까. 다 알아서, 내가 뱀이라는 걸 알아서 널 죽이라고 했던 걸까. 그렇다면 내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 또한 너의 의도였을까.
이 고단한 길의 끝에서 너는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그녀의 한계를 뛰어넘은 질문은 그저 아무런 소득 없이 빙빙 돌기만 할 뿐이었다. 수천수만 년을 살아온 그의 생각을 한낱 그녀가 어림짐작해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그럼에도 그녀는 알고 싶었다. 최대한 이해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어디 잘못된 일이던가.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달아나 보았자 끝이 나지 않을 결말이었다. 언젠가는 그와 마주하여 끝을 보아야만 했다. 그 끝이 그토록 그녀가 바라 왔던 행복일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만 있다면 거머쥐고 싶었다. 이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주어지는 행복을 믿지 않았다.
나의 구원.
나의 절망.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 그는 여전히 역광을 머금은 뒷등으로만 존재했다. 페기는 네댓 발자국쯤 남겨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먼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를 지나 그녀를 덮쳐 왔다. 바람결에서 메마른 냄새가 났다. 용을 타고 창공을 날아다니는 그에게선 늘 그런 마른 바람 냄새가 났다.
“저 하늘에 있어.”
불현듯 그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의 고개가 묘하게 위로 들려 있음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나의 그리운 고향.”
“…….”
“불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겠지.”
그의 목소리에는 들어 본 적 없는 짙은 애수가 어려 있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몰라. 이제 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는 전무하니, 그렇게 불은 영원히 안전할 테니까.”
페기는 그의 말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기실 그조차 이해를 바란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답을 바란다기엔 홀로 하는 넋두리에 가까웠으므로. 선뜻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던 그녀는 뒤이어 제게로 돌려지는 그의 얼굴을 보곤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잿빛으로 그늘진 그의 얼굴.
아름다운 금안이 휘어진다.
“…안녕, 페기.”
그것은 반가움의 인사인지, 아니면 작별의 인사인지.
페기는 불현듯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지금껏 아무런 의심 없이 반가움의 표현이라고만 받아들였던 그의 모든 인사말들이 돌연 작별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죽음을 입에 담았기 때문인가.
그녀는 순식간에 당혹스러운 감정에 휘말려선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어떤 말이든 좋았다. 그를 붙잡아 두어야만 했다.
“내가 뱀인 것 같아.”
성급하게 입술이 움직였다.
“너는… 알고 있었던 거지.”
또다시 먼 데서 바람이 불어와 그들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페기는 이리저리 흩날리는 은빛 머리칼 사이로 미동 없이 선 그의 전신을 애써 주시했다. 그의 등 뒤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한입에 그를 삼켜 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응.”
“언제?”
“…문도성에서.”
생각지도 못한 시기였다. 페기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북방에서 그를 피해 달아나다가 화살을 맞고 쓰러진 뒤, 그의 손에 이끌려 간 문도성에서 그녀는 감금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었다.
“사술이 벗겨진 너의 민낯을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 죽은 자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명제는 여전하니 너는 죽은 페기가 아니어야 했지만, 아무리 봐도 너는 내가 알던 페기였으니까.”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시선은 묘하게 그녀를 비켜 나가 있었다.
“…그래도 너였으면 했어.”
“…….”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이길 바라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설들을 세워 봤어. 당연히 성립할 수가 없는 가설이었지. 그렇게 또다시 불가능을 제하고 또 제하다 보니, 그거 하나 남더라.”
페기, 네가 뱀이라는 것.
“불가능하다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했으니까….”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길이 넌지시 그녀의 발목으로 와 닿았다. 페기는 순간 꿈에서 수없이 물렸던 발목의 자국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작 점 두 개로 남은 그녀의 비밀, 그녀의 원죄.
“네 발을 씻기면서 확신했어.”
“…….”
“내가 알던 네가 돌아온 것이 맞다는 걸.”
일순 페기는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성에서 달아나려다 도리어 붙잡혀서 무참히 끌려갔던 성의 꼭대기 방. 무덥던 여름의 열기와 창가에서 살랑거리며 흔들리던 흰 커튼. 조심스레 그녀의 발을 들여놓았던 물의 미지근한 온도와 발목 부근에서 움츠러들던 그의 손끝.
그때의 너는 어떤 표정이었나.
페기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찾아 헤맸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발치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모습만이 머릿속을 뒤덮을 뿐.
굳어 버린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예후르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설핏 웃었다.
“네가 뱀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어. 어차피 모든 인류는 최초의 도둑에게서 파생되어 퇴화한 존재니까…. 뱀에게 물렸다 한들, 네게 뱀으로서의 기억이 전무한 것을 보면 뱀이 너를 집어삼킨 것이 아니라 네가 뱀을 흡수한 것이겠지.”
“뱀을 흡수했다고…?”
“그래. 마치 내가 그러했듯이.”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점차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등지고 선 그는 여전히 까마득한 먼 옛날의 존재처럼 아득하고도 멀게만 느껴졌다. 도저히 그녀와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가 없다.
“실은 남아 있는 줄도 몰랐어.”
“…….”
“이젠 내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허약해졌으니까…. 몇몇 남아 있다 해도, 오래지 않아 다른 이들에게 흡수되든 밟혀 죽든 그렇게 사라질 줄만 알았어. 그게 너에게로 간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할지….”
예후르가 조금 슬프게 웃었다.
뱀은 죽지 못한다. 천사들의 주박이 걸려 있기에.
4년 전 심장이 꿰뚫린 채 죽었던 페기는 그래서 남들처럼 사라지지 못하고 영혼이 묶여 지하로 끌려 내려가야만 했으며, 다른 뱀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불살라지는 형벌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수천 일, 수만 일이 지나거든 다른 뱀들이 그러했듯 그녀 역시 이성을 잃어버리고 분노만이 남은 마귀가 되었을 터.
하지만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가 뱀을 흡수하고 말았다.
현존하는 천사들 중 가장 높고 가장 고고하던 이가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수천수만 년 동안이나 빛을 잃지 않았던 권능이 시들었고, 가까스로 마귀들을 억제하던 주박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애당초 천사들이 고작 여덟 남고 그마저 하나둘씩 권능을 잃어감에 따라 미할리나 혼자서 감당하던 주박이었다. 파멸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러자 마귀들은 몸을 옥죄던 주박에서 해방되어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에 이지를 잃은 그들은 이제는 뱀이 되어 버린 미할리나를 따르기 시작했지만, 페기는 그러지 않았다. 지하로 떨어진 뱀 중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육신만이 지상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본능이 이끄는 대로, 텅 비어 버린 육신을 찾아 빛 들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맨 것이 장장 3년.
돌이켜 보건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녀가 뱀이었고, 하필이면 그가 확신조차 없는 상태로 뱀에게 몸을 내주었고, 하필이면 그녀의 육신이 불에 타거나 썩어 한 줌의 흙이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하필이면 그녀가 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둠 속을 헤쳐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왔고.
무엇 하나라도 삐끗했다면 아귀가 맞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서도 그녀는 돌아오지 못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그는 수없이 감사하고 수없이 감격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하여 그런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나리란 보장은 없다.
뱀을 죽지 못하게 했던 천사의 주박은 이제 거의 풀린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만일 4년 전과 같은 일이 한 번 더 발생한다면 그녀는 기어이 죽을 것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녀에겐 그와 같은 생명력도, 그와 같은 강함도 없었다. 그녀를 물었던 뱀은 한낱 어린애에게도 흡수당할 정도로 약해진 존재였기에.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였다.
먼저,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위치로 그녀를 올리자.
“라발은 이제 네가 아니면 다른 패가 없고, 동서로 분열된 탐보프는 내정에 역량을 기울이는 데만도 바쁠 뿐 아니라 빌헬미나의 공식적인 후계자인 도미에 변경백이 널 따르지. 귀족들을 완벽하게 포섭하지 못한 변경백에게 교회는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될 테니, 앞으로도 너에게 반기를 드는 일은 없을 거야.”
“…….”
“게다가 경비대와 성도의 시민들이 너를 숭배해.”
도미에 변경백과 마찬가지로 경비대에겐 다른 수가 없었다. 오래전 레오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여 살길을 도모했던 그들은 이제 페기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터전을 마련할 것이었다.
반면 성도의 시민들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오스피나 참극의 고초를 함께 겪고, 무너진 교회를 작금의 위치로 되돌린 교황 레오폴트를 아주 애틋하게 생각했다. 그 애정이 고스란히 예후르에게로 이어지기엔 그의 인간미가 덜했고 비올라에게로 흘러가기엔 지나치게 외부인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으나, 페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성도에서 자라난 익숙한 존재.
무엇보다도 성도의 시민들은 한때 무고했던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는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부활이라는 전례 없는 기적을 선보이기까지. 비록 그녀에겐 레오폴트와 같은 동지애나 애틋함은 없었으나, 그 빈자리를 죄책감과 경이로움이 메워 주고 있었다. 이제 시민들은 공공연히 정신적인 지주로 그녀를 추켜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