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5화 (305/328)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함께 나들이를 가길 원하니 동행해 주면 된다.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대의 거짓은 때에 따라 속아 주기도,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숭배하는 자들과 경계하는 자들과 두려워하는 자들을 동일하게 대해야 하며, 이상하게 쳐다보는 안드레아의 시선은 모르는 척 넘어가면 그만이었다.

굳이 그들의 감정까지 알 필요는 없다.

그런 것 몰라도 충분히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아프지 마.”

그 한마디에 눈앞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그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애가 귀찮았을 뿐인데.

지난 세월 무수히 많은 숭배자들을 거느렸던 그에게 그런 어린애는 길가의 조약돌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다만 하필 제가 데려온 사도이고, 나이 어리단 핑계로 레오폴트가 유독 각별히 여기는 것이 그를 번거롭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손끝에 불을 틔웠다.

겁 많은 어린애니 이 정도면 부리나케 달아나리라 여겼다. 그를 하늘처럼 숭배하던 이들도 그가 조금만 경이로운 일을 벌이면 두려워 엎어지곤 하였으니, 크게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그 어린애였다.

아직 말도 어눌한 주제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덥석 제 손을 붙잡아 왔다. 손끝에 매달린 불씨가 두렵지도 않은지 거리낌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고는 불이 너를 아프게 한다며 엉엉 울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나 놀랐던지, 그는 실수로 불씨를 날려 버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가물어 바싹 말라붙었던 산이 덕분에 활활 타올라 민둥산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를 더욱 당혹케 했던 것은 자신의 실수였다.

도대체 얼마만의 실수였던가.

경악스러운 자각은 자연스레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어린애에게로 쏠렸다.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 희게 살이 올랐으나 여전히 여윈 얼굴과 하도 울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코끝.

무엇보다도 그를 볼 때마다 환하게 피어오르는 눈빛.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것은 숭배도 경배도 아닌, 애정이라는 것을.

사랑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감정. 당연히 그도 사랑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으나, 온전한 애정이 자신을 향하는 것은 지난 세월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늘 숭배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

가까운 벗들에게나 존경에 가까운 친애를 받았던 그.

같은 사도라 한들 레오폴트는 그의 숭배자나 다름없었으며, 안드레아는 순수한 우정으로 그를 대했다. 맹세컨대 그 긴 세월 누구도 감히 그를 사랑할 생각을 못했다. 온전한 사랑만을 주기에 그는 지나치게 높고 경이로운 존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기에 가능한 일인가.

그는 미묘한 기분으로 어린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이름을 떠올린 것도 아마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는지.

그 뒤로도 크게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때로는 훌륭한 사도로, 때로는 숙련된 정치가로, 때로는 정중한 신사로 변하여 능수능란하게 눈앞의 과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파탄 났던 교국의 재정은 어느덧 예전의 수치를 회복했으며, 라발의 영향력은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었다. 엇나간 안드레아와 종종 마찰이 빚어지는 것을 제하면 성궁의 내전 역시 평화롭기만 했다.

그렇게 그는 그도 모르는 사이 인간들과 얽히며 여러 관계를 맺어 나가고 있었다.

이를테면 누군가와는 가족, 누군가와는 동료, 누군가와는 신뢰하는 주종, 또 누군가와는….

그렇게 땅에 가까워지는 줄도 모르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면서.

무엇과도 관계하고 싶지 않다던 오랜 신념은 어찌 되었는지. 오래전 예리엘에게 그토록 강경했었던 그는 자신이 왜 그토록 고집스럽게 세상을 등지고 살았었는지 잊고 말았다. 인간들과 섞여 살며 저도 모르게 한껏 취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한순간에 깨어질 가련한 찰나의 행복인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페기의 죽음을 자각한 그날.

그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잊고 있었던 고통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덧없이 가 버린 나의 벗들, 나의 페기.

깨닫건대, 그것은 상실의 고통이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고 한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어서 애가 타는 것이지.”

언젠가.

적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한 벗의 시신을 묻을 때, 이슬라는 그리 말해 주었다. 이슬라는 허투루 말을 하는 이가 아니었지만, 당시의 그는 이슬라의 저의도, 왜 그런 말을 제게 해 주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되돌아오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고 질서이므로, 죽은 자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 역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자를 왜 보고 싶어 하고, 왜 보고파 애가 탄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항변을 듣고서도 이슬라는 그저 한없이 딱하다는 눈으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더 이상의 설명도 사치라는 듯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나, 묘하게 한숨처럼 흘리던 말이 유독 뇌리에 깊게 남았다.

“고통의 이름을 아는 것이 과연 네게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

모든 감정에는 나름대로의 이름이 있다.

사랑이면 사랑, 우정이면 우정, 기쁨이면 기쁨, 슬픔이면 슬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제 감정일진대, 수천수만 년을 살아온 그에게만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감정이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세상의 모든 색이 뒤섞여 거멓게 되어 버리고 만 검정에서 오직 그만은 이름 하나를 건져 올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땅으로 내려가 도둑을 벌하고 돌아왔던 언젠가, 도둑이 채 삼키지 못하고 토해 냈던 작은 불씨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지 못하여 전전긍긍했던 찰나의 망설임.

이미 그때에 그의 안에도 작은 검정이 싹을 틔웠다는 것을.

어쩌면 강렬한 빛에 밀려 그대로 산화했을지도 모를 일이나, 불행히도 영원히 땅에 발붙이고 살게 되면서 작은 검정은 사라지긴커녕 점점 더 몸집을 불려 나갔다.

그리하여 벗들을 한 명씩 잃을 때마다 둔중하게 그를 덮쳐 왔던 정체 모를 고통.

이슬라가 친히 그리움이라 알려 주었건만, 아둔하게도 그때에 바로 깨닫지 못했던 그는 이렇게 긴 세월을 돌고 돌아서야 간신히 자각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 그리움이구나.

그리고 새로운 자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그리움이란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어서 애가 타는 것.

나는 이제 너를 볼 수가 없나.

수없이 떠나갔던 나의 벗들이 그러했듯, 나는 또다시 홀로 남겨지며.

그제야 그는 지난 천 년 홀로 지내 왔던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느껴 본 자유, 뱀을 봉인하여 생존이란 최후의 목표를 이루고 나자 사라져 버린 삶의 목적, 이런 건 모두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얼마 남지도 않은 벗들을 외면하면서까지 구태여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으로 숨어든 결정적인 이유가 분명히 그에겐 존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두려움.

또다시 소중한 누군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뱀이 봉인된 세상에는 몇 남지 않은 동족들이나마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더 이상 새로운 관계를 맺지만 않는다면, 또다시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일 없이 안전할 수 있었다. 수많은 벗들을 떠나보내며 느껴야 했던 그 끔찍한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간절했던 마음을 한순간에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누군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서로 엮이며 살아가는 사회가 심히 복잡하여.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한 일상에 나름대로 정신없이 적응하느라.

혹은, 온전한 사랑만을 받는 것이 처음이어서.

달콤했던 한 철의 꿈은 참혹하게 끝이 나고야 말았다.

그는 그토록 잊고 싶었으나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상실의 고통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다. 제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어둠의 소용돌이가 꿈틀거리며 안간힘을 다해 울부짖는 것이 느껴졌다. 흐르지 않는 눈물 대신에 짓이겨진 심장에서 핏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그는 그제야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찬란하도록 눈부신 빛.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거든, 뼛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 버린 어둠이 있다. 속으로 무수히 많은 가지들을 내뻗었으나, 찬란한 빛에 가려 오래도록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나의 어둠.

깨닫건대, 하늘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 높았던 권능은 기세가 꺾였고,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고향에 닿을 줄 알았던 날개는 힘을 잃었다. 다른 벗들은 진작 수없이 거쳐 갔던 쇠퇴의 시기가 그에게도 엄습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제 진창을 뒹구는 낙엽보다 초라해진 스스로를 끌어안고 길을 걷는다. 그 누가 고통도 겪다 보면 무뎌진다 하던가. 그는 지금껏 수없이 겪어 왔던 상실의 고통을 그 어느 때보다도 처참하게 앓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여 주었던 무수한 상처들과 보답하지 않았던 애정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그에게로 쏟아졌다.

어쩌면 그래서 정신이 나가 버렸는지도.

“시신은 보았는가.”

그러지 아니하였다면, 제 발로 뱀을 찾아갈 일이 없지 않았겠는가.

그는 당장이라도 눈앞의 뱀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다가도, 그 앞에 무릎 꿇어 빌고 싶기도 했다. 뱀은 단순히 그녀의 죽음에 연관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순간의 분노로 일을 그르친다면 영원히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너의 몸을 원해.”

한쪽에선 뱀이 속삭이고.

“미치광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한쪽에선 이성이 속삭인다.

말도 안 되는 짓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뱀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거짓을 일삼는 존재인 데다, 심지어는 되살릴 수 있다는 확신조차 주지 못했다. 애당초 죽은 자가 어찌 되살아난단 말인가. 곧 죽어도 변치 않을 질서란 사실은 세상 누구보다도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하다고.

그는 스스로 일직선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으나, 이제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상실의 고통은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지독한 자기 검열은 더 이상 기능하지 못했다. 끝없는 슬픔과 충동만이 무성하게 가지를 뻗는 가운데, 그는 거리낌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냥 그런 것이었다.

늘 떠나보내야만 하는 이 삶에 더는 미련이 없노라고.

“너만이 유일한 등불이다.”

나의 심연이여.

“너는 항상 그곳에서 빛나다오.”

결국은 나도 이렇게 길을 잃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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