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라뿐만이 아니다. 네가 몸소 강림해야만이 남아 있는 벗들도 힘을 더할 것이야.”
“그래 봤자 절반이다.”
“절반이어도 필요하다. 지금의 교회는 병들고 어린 대리인이 홀로 지키고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를 면하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대리인들이 새로 등장해야만 해.”
환희의 천사 릴라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자비의 천사 올샨스카가 그 뒤를 이었고, 나머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미할리나는 자신의 강림만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나머지 천사들을 한데로 모을 수 있을 것이란 예리엘의 주장에는 동의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인간들의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이미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구태여 인간의 몸으로 내려가 부족한 미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다.
“예리엘. 어찌 그리도 지상에 집착하는가.”
기실 오래전에 물었어야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미할리나는 관심이 없었고, 다른 천사들은 지상에 애정이 없었기에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제 와 돌이켜 보건대, 인간들을 가장 멸시하던 예리엘이 오히려 그들의 세상에 가장 공을 들이는 모습은 일견 기이하게까지 보였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어.”
예리엘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수많은 벗들을 잃고, 그토록 충만하던 권능까지 잃었다. 나는 갈수록 바닥을 보이는 권능과 갈수록 낮아지는 나의 날개와 갈수록 땅에 가까워지는 내 모습을 보며 절망한다. 다른 벗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지능을 잃고 포악해져 한낱 짐승이 될 나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 너무나도 끔찍해.”
“…….”
“빛이여. 우리는 어쩌다 이리된 것인가. 도대체 무얼 얻고자 이렇게 된 것이지?”
미할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땅으로 내려왔을 때의 목표는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으므로.
“그토록 많은 것을 잃었으나, 남은 것은 이 땅뿐이다.”
낮게 읊조리는 예리엘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이 그뿐이라면, 나는 이것이나마 최선을 다해 가꿀 것이다. 그마저 엉망진창으로 되어 간다면, 고작 이 땅을 위해 희생되었던 우리의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지 않겠나.”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말이었다.
남겨진 땅이나마 아름답게 가꾸어 상실의 고통을 이겨 내고자 한다는 면에서는 이해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고작 그런 것으로 달래질 고통인가 싶기도 했다.
애당초 그들이 잃은 것들은 이 땅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해진 아름다운 고향과 덧없이 떠나 버린 벗들. 미할리나는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일전에 이슬라가 속삭이기를 그리움이라 하였다.
“나는 여전히 너를 이해할 수 없다.”
미할리나는 이윽고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부디 너의 말이 맞기를 기원하지.”
어차피 목표도, 의지도 사라진 생이었다.
만일 예리엘의 말대로 이 땅을 가꾸는 데서 위안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발견도 없을 것이었다.
미할리나는 이제 적당한 인간의 육신을 찾아 세상을 돌기 시작했다. 수백 년 가까이 멀어졌던 인간의 세상은 많이 진화했고, 또 많이 퇴화해 있었다. 문명의 수준은 보다 발전하였는데, 천사의 대리인이 될 만한 그릇조차 보기 드물어졌을 만큼 퇴화했다는 점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결국에 대륙에서 육신을 찾지 못한 그는 광활한 사막을 건너갔다.
사막 또한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변해 있었는데, 예리엘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는 대륙과 달리 오롯하게 인간들의 손으로 일구어 낸 모습이란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제 사막에 남아 있는 천사의 흔적이란, 종교의 기틀로 남아 있는 심연뿐이었다. 미할리나는 그제야 심연의 천사 이슬라가 먼 옛날 사막을 즐겨 찾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우습게도 그의 그릇이 될 만한 인간은 그를 모시는 대륙이 아닌 먼 사막에서 발견되었다.
미할리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날개를 단 새의 몸에서 벗어나 인간의 몸으로 내려갔다. 눈부실 정도로 쏟아지던 사막의 불볕…. 찰나의 시간이 흘러 그는 병든 몸으로 어렵사리 사막을 건너온 사도 레오폴트와 조우했고, 여전히 익숙지 않은 두 다리로 걸어 대륙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페기, 그녀와 만났다.
첫 만남은 어떠했던가.
페기는 그를 처음 본 순간에 마치 신이라도 영접한 것처럼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지만, 불행히도 그는 쓰레기통 안에 숨어 있던 꾀죄죄한 어린아이에게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사도란 덜 퇴화한 인간에 불과했으며, 개중에서도 하필이면 예리엘에게 선택된 대리인이란 가장 기대할 것이 적은 사도였다.
지상이란 정원을 가꾸기에 혈안이 되었던 예리엘은 늘 순종적이고 맹목적인 이들을 선정해 왔으므로, 아무것도 모르는 저 어린애 역시 예리엘의 체스 말로 일생을 허비하리란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에 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어찌나 변화무쌍하던지, 그의 예상은 곧잘 빗나가곤 했다.
신실한 종인 줄만 알았던 레오폴트는 어느 순간 그에게마저 은근히 가족의 역할을 바라기 시작했고, 짐승처럼 사나운 구석이 있긴 해도 크게 엇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안드레아는 깜찍하게도 등 뒤에서 남몰래 뱀의 사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매일같이 접하게 되는 인간들의 면면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천 년 전 야누비타의 육신을 버리고 새의 몸으로 갈아탔던 그는 그 이전에도 이토록 인간들과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인간들 사이에 뒤섞여 살아가며 미할리나는 기존의 단조롭던 일직선의 길에서 조금씩 시야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본디 그의 눈앞에 놓여 있던 것은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질서.
사람들은 으레 착각하곤 하지만 실상 이 세상 유일하게 변치 않는 질서란 꽤나 단순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모든 생명은 신성한 불에서 기인한다.
천사는 최초의 신성한 불을 수호한다.
진화와 퇴화는 필연이다.
죽은 자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떤 사안을 두고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 주장은 애당초 질서일 수가 없었다. 질서란 그저 원래부터 그러한 것이고, 앞으로도 뒤바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당위성을 설파하는 것은 곧 정의이며, 이는 질서와 별 관련 없이 개인의 주관에 의존하는 주장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세상의 질서가 보인다고 하여 먼 하늘의 고향에서부터 그를 우두머리로 내세웠던 동족들은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었다.
동족들은 언제나 그에게 앞으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물었으나, 불행히도 당위를 가리키는 길은 그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둠 한 점 타고나지 않은 유일한 존재답게 매사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뿐이다. 어둠이 없는 그는 감정을 몰랐으므로, 한때의 충동에 휩싸여 그릇된 결정을 내릴 일이 없었다.
그러니 도둑을 잡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던 때부터 그가 내려 왔던 모든 결정은 그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어떤 거창한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것이 아니다. 도둑을 벌하겠다는 목표는 어느 순간 생존으로 바뀌었으며, 동족들이 점차 권능을 잃고 고향에서 멀어진 순간부터 뱀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살기 위하여 반드시 말살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뱀을 죽여 살아남겠다는 일념만으로 내렸던 모든 선택들은 결국에 그를 인간들의 틈바구니로 내몰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잃었으나, 남은 것은 이 땅뿐이다.”
예리엘.
과연 내게도 이 땅이 위안이 될까.
그러나 체념에 가까운 심정으로 내려온 인간들의 세상은 막연했던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바쁘게 돌아갔다.
이리저리 뒤얽힌 국제 정세나 성직자들 사이의 파벌 다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그런 문제들은 레오폴트가 아끼는 소장품들을 관람하며 적당한 감상평을 남겨 주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아직 세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교회가 각국을 넘나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일 정도야 기나긴 세월을 살아온 천사에게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
정말로 난감하고 까다로운 문제는 도리어 일상적인 시간에 숨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기로 했다며 넌지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레오폴트, 이유 모를 거짓말을 고하는 일꾼들, 가끔씩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안드레아와 까닭 없이 제 뒤로 따라붙는 묘한 시선들.
이를테면 그런 것이었다.
그는 태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
그는 레오폴트가 함께 나들이를 가자며 권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알지만, 어째서 자신에게까지 그런 것을 바라는지는 몰랐다. 그는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감이 좋은 안드레아가 종종 이질감을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만, 정확히 자신의 어떤 면에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는 숭배하고, 누구는 경계하고, 누구는 두려워하고.
아주 까마득한 옛날부터 느껴 왔던 시선이나, 그들이 어떤 연유로 자신을 숭배하고 경계하고 두려워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시선이 왜 그토록 다양한 것인지, 대관절 무엇이 숭배와 경계와 공포를 가르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남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그의 눈에 비치는 인간이란, 그저 어둡고 까말 뿐인 어둠.
그를 제외한 나머지 천사들이 그러하듯 한때에는 빛과 어둠이 혼재된 존재였으나, 욕심을 알고 타락하여 어둠으로 물들어 버린 뱀에게서 비롯된 것이 바로 인간이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가 없다. 빛마저 흡수하여 검게 변해 버린 색을 도저히.
물론 대처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아주 복잡한 듯 보여도 정작 다루기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기에. 다행히 그는 숙련된 경험으로 말미암아 눈앞의 인간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만은 제법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면 그것을 이루어 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