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3화 (303/328)

그러나 워낙에 광활하여 대륙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간 사막과 달리, 다그마르 산맥은 불행히도 새로운 문명을 꽃피우기엔 조건이 좋지 못했다. 험준한 산세나 협소한 농토 같은 지리적인 조건도 그렇거니와, 애당초 주어진 인구부터 달랐다.

자연스레 다그마르 산맥의 원주민들은 도태되기 시작했다. 발전되지 못한 문명은 대륙이나 사막에 비하면 수준이 한참 뒤떨어졌으며, 수 세기에 달하도록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자식을 먹이기 위하여 자존심을 접고 용병 노릇을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 도태된 적이 사막이 아닌 다그마르 산맥에 자리했다는 것은 대륙에겐 아주 커다란 이점이었다.

대체로 분열되어 있긴 해도 힘을 합하면 신성 제국 라발조차 위협할 수 있는 사막의 부족들은, 그러나 광활한 사막에 가로막혀 사실상 대륙과는 단절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반해 다그마르 산맥의 원주민들은 북쪽과 서쪽으로 언제든 침입해 내려올 수 있지만, 조악한 문명 수준으로 인하여 대륙에 큰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예리엘은 이마저 내다보고 자신이 세운 질서에서 다그마르 산맥을 배제하였으리라, 미할리나는 생각했다.

흔히들 간과하지만, ‘우리’가 뭉치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 ‘적’의 존재가 필요하다. 적이 강대할수록 위협감은 커지고, 적이 위협적으로 다가올수록 우리는 끈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면에서 사막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할 적이었다. 독자적으로 발전된 사막의 문화는 이질적으로 다가올 것이며, 이질감은 곧 적대감으로 변질될 것이다. 비슷한 수준으로 진화한 사막의 문명 역시 대륙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는 조건이었으나, 문제는 지리적인 분단으로 인하여 그 위협감이 막연하게 다가올 때였다.

다그마르 산맥은 그럴 때를 위한 대비책이었다. 대륙에 큰 피해를 주진 못하지만, 늘 코앞에 있어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적. 하물며 산세가 워낙에 험해 한낱 인간들의 힘으론 완전히 정복하기 어려운 것 역시 이점이었다. 미력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을 적은 어쩌면 사막처럼 비등한 적보다 더욱 만들기 힘든 것이었다.

그런 예리엘의 예상은 적중했다.

대륙은 먼 데 자리 잡은 강대한 사막과 가까운 데 박혀 있는 다그마르 산맥의 위협을 언제나 느껴야만 했다. 가시지 않는 위협감은 자연스레 교회를 중심으로 대륙을 모이게 하였으며, 그런 과정 속에서 교회는 별다른 반발 없이 세를 넓혀 나갔다. 예리엘이 치밀하게 계획했듯 평화로운 정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천사들은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처음은 아마도 환희의 천사 릴라.

계승의 천사 아델람과 자비의 천사 올샨스카도 차례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미할리나도, 심지어 예리엘마저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지상은 예리엘의 뜻대로 나뉘어 서로 창검을 겨누고 있었으나, 천사들의 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전쟁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들은 짙은 권태감과 무료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낙이 없는 세상을 등지고 깊은 심연 속으로 빠지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렇게 천사들이 잠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지상은 여러 차례 격변을 맞이하였다.

시발점은 대륙과 사막의 충돌이었다.

예리엘은 특유의 고견으로 대륙과 사막을 영원히 충돌하지 않을 적으로 설정해 두었으나, 천 년의 세월은 천사의 강고한 뜻마저 거스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대를 걸친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용을 제어할 수 있게 된 사막의 민족들은 광활한 사막을 가로질러 신성 제국 라발을 침공해 왔다. 예상치 못한 북침에 라발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듯하였으나, 곧 대비책을 마련하여 용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어진 백여 년의 전쟁은 곧 성전(聖戰)이라 불리었다.

종교와 종교의 충돌.

이는 곧 전혀 다른 세계관끼리의 충돌이나 다름없었다.

충돌과 분열이 일상적으로 반복되어 오히려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드문 일인 사막이야 생소한 문화와의 접촉에도 곧잘 적응하였으나, 천 년 가까이 고립되어 있었던 대륙은 사정이 달랐다.

오직 여덟 천사만을 신봉하며 교회의 단일한 질서에 익숙해져 있었던 대륙의 사람들은 사막에서 모시는 수백 신의 존재와 다양하다 못해 부족별로 제각각인 사막의 문화를 체험하곤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륙의 시각에서 보자면 사막은 다그마르 산맥의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야만인이어야 하는데, 정작 그들의 무기나 문화의 수준은 대륙과 엇비슷했다. 하나의 질서 아래 단일화되지 않고도 저만치 발전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자각은 대륙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그토록 맹신했던 교회가 실은 유일한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

때는 알게 모르게 교회의 세가 약화되던 시기였다.

성 나르세스 광장을 둥글게 감싼 여덟 대성당의 문이 모두 열려 있던 것은 어느덧 백여 년 전의 일이 되었고, 이제는 서너 명의 사도들이 교회를 지키는 모습이 익숙해졌다. 사도의 수는 교회가 누리는 권세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나, 그럼에도 교회의 권력이 눈에 띄게 축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수백 년 가까이 고착화된 교회의 질서가 너무나도 단단했으므로.

성전은 그 질서에 최초로 금이 가게 한 장본이었다.

라발을 필두로 한 대륙의 사람들은 이제 교회만이 유일한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리적인 이유로 망망대해에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고립되어 살았던 그들은 저 사막 너머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숫자도 권능도, 더 이상은 옛날의 영광에 비할 수 없는 사도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고 싶지 않아졌다.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여 교황 앞에 스스로 머리를 숙였던 라발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교회는 유일한 질서가 아니지만, 여전히 대륙의 유일한 질서는 교회였다. 교회의 영향력은 국가를 초월하므로, 만약 교회를 손아귀에 넣는다면 국경을 초월한 그 막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대륙의 남방을 지배하였으나 새로이 북방을 통일한 탐보프의 도전을 받고 있던 라발로선 군침이 나는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교황 제네로사가 선수를 쳤다.

백 년 가까이 성전이 치러지는 동안 이미 교회에는 라발의 영향력이 위협적일 만큼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라발 말고는 달리 기댈 구석이 없었던 전임 교황들과 달리 제네로사에겐 북방의 새로운 강자 탐보프가 있었다. 그녀는 빠르게 탐보프와 손을 잡고 라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것이 바로 오스피나 참극.

비록 라발의 섭정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곤 하나, 그 사건은 천 년 역사를 통틀어 교회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역사의 산증인이던 성도 오스피나는 용병들의 군홧발 아래 무참히 짓밟혔고, 무엇보다도 교황 제네로사가 단칼에 목이 잘려 죽었다. 교회의 권위가 하룻밤에 진창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파국 속에서 깨어난 예리엘은 당연히 분개했다.

300년 가까이 잠들어 있었던 그는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참상에 실로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당장에 그의 힘만으로 이를 타개할 방안도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예리엘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험준한 산맥, 열기가 끓어오르는 사막…. 온 세상을 속속들이 뒤지고 다니던 그는 마침내 외딴 호숫가에서 평화로이 지내고 있던 미할리나를 발견해 냈다.

“네가 필요하다.”

예리엘은 날개를 접고 내려오자마자 그리 말했다.

“네가 인간의 몸으로 강림해다오. 그리고 천 년 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등불을 잃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저 무지한 자들을 이끌어다오.”

미할리나는 그저 물끄러미 예리엘을 응시하기만 했다.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예리엘은 갑갑해졌다.

“빛이여. 이유 없이 은둔하던 그 긴 세월에 목소리마저 잃은 것인가.”

“나는 더 이상 그 무엇과도 관계하고 싶지 않다.”

“관계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는 앞에서 걸어만 다오. 신앙을 잃어 가는 이 땅에 새로이 빛이 되어 달라는 말이다.”

“네가 일군 땅이다. 어찌 수습을 나에게로 미루는가.”

“나는 빛이 될 수 없으니까.”

예리엘은 그러고 한참을 침묵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수치심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다. 어느 순간 사라져 묻혀 버린 벗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권능은 쇠하고 있어. 어쩌면 땅으로 내려왔던 그 옛날에 이미 정해져 버린 운명일지도 모르나, 내 힘이 닿는 데까진 지금의 파국을 되돌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너의 조력이 가장 필요해. 너는 아직 옛날의 신성을 간직하고 있지 않나.”

“궤변이다. 옛날의 네가 아니라 한들, 천하의 예리엘이 고작 반백 년 넘게 사는 인간들을 두려워하겠는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알지 않는가, 미할리나여. 내가 강림한다면 이슬라는 결코 돕지 않을 것이다.”

천사 예리엘이 사도 로살레다였던 시절, 과거 죽어 갔던 동족들의 기록을 말살해 버린 일로 예리엘과 이슬라의 관계는 완전히 어그러졌다.

예리엘은 천사들의 주적으로 지목된 뱀이 실은 같은 천사였다는 것이 밝혀지면 지상에 막중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해명했지만, 추모마저 허락되지 않는 현실에 이슬라는 크게 상처 입고 말았다. 짐작건대 이슬라야말로 예리엘이 세운 작금의 질서에 가장 반감을 가진 존재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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