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2화 (302/328)

“내일 그이를 만나면 정녕 맞서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던 그는 이미 죽었다.”

“나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동족을 빼앗길 때마다 이슬라는 죽을 것처럼 슬퍼했다. 전장에서 동족의 몸을 빌려 입은 뱀을 벨 때도, 이제는 마귀라 이름 붙여진 괴물들을 상대할 때도 그에겐 슬픔뿐이었다. 용맹한 마그누스는 사라진 벗들을 기리는 그를 보며 쓸데없는 짓이라 일축했지만, 미할리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슬픔을 알고 싶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빛이여. 우리의 고향을 기억하는가.”

언젠가 동족이었던 누군가 물어 왔다.

“나는 더 이상 기억이 나질 않는다네. 온 하늘에 널리 퍼져 나가던 나팔 소리가 어떠했는지, 목을 적셔 주던 술이 어떠했는지, 우리가 섬기던 태초의 불이 어떤 모양으로 타올랐는지.”

사기는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아군은 적을 죽일 수가 없는데, 적은 아군을 빼앗아 갈 수 있으니 처음부터 예상된 결과였다. 천사들은 최선을 다해 항쟁하였으나, 길고 긴 이 전쟁에도 끝은 보이기 시작했다. 한계로 몰린 아군의 진영. 늘어나는 탈주병들과 야밤에도 끊이지 않는 곡소리.

“빛이여, 너는 고향에 닿을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암울하게 드리운 패배감.

이미 마지막을 직감한 동족들은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길 종용했다. 미할리나, 그의 권능은 약해졌으나 고향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안간힘을 다한다면 고향에 닿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할리나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고향이 무슨 소용일까. 돌아간다 한들, 그는 영원토록 혼자일 것이었다. 그가 있으나 없으나 영원토록 타오를 태초의 불을 지키는 것이 그의 길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의 길은 땅으로 열려 있었다.

미할리나는 늘 그렇듯 일직선으로 펼쳐진 길을 보았다. 그를 빼곡하게 둘러쌌던 수백의 동족들은 어느덧 단 일곱만이 남아 있었다. 상처 입고 쇠락하여 너덜너덜해진 그들에게로 기꺼이 걸어가고자 했다.

하여 그는 은밀히 숨겨 왔던 불씨를 내놓았다.

오래전 땅으로 떨어졌되, 도둑이 탐하여 절반만 삼키고 토해 낸 나머지 절반의 불씨.

“미할리나, 설마.”

동족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미할리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눈앞의 길은 이것뿐이었다.

“도둑은 이것으로 무한한 생명을 얻었다.”

“해서 똑같이 뱀이 되자는 소리인가.”

“어차피 우리가 패배하면 뱀의 세상이 될 것이다.”

동이 트고 있었다.

“다른 수가 없구나.”

예리엘은 한탄했다.

“그때, 땅으로 내려와선 아니 되었어.”

불씨는 여덟 조각으로 잘렸다.

그리고 뻗어 오는 서광과 함께 여덟 천사들이 뱀의 진영을 덮쳤다. 죽여도 죽지 않는 무한한 생명력을 얻은 그들은 수십 수백 번째로 들어간 인간의 몸으로 마침내 왕 노릇을 하던 뱀을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전쟁의 마침표였다.

“나는 뱀의 잔당들을 처리하겠다.”

왕 노릇을 하던 뱀은 봉인되었으나, 도둑의 일부로 조각조각 잘려 나간 나머지 뱀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가장 강력한 뱀마저 사라진 마당에 불씨를 삼킨 천사들에게 대항할 수는 없겠으나, 수많은 동족들과 고향을 잃은 천사들은 가시지 않는 복수심에 목이 말라 있었다.

그렇게 몇몇 천사들이 떠나자, 이번에는 이슬라가 말했다.

“나는 세상을 떠돌며 죽은 벗들을 추모하고 싶다네. 예리엘은 이곳에 남아 미래의 기틀을 다진다는데 자네는 어찌할 텐가. 나와 함께 갈 텐가.”

“…나는.”

미할리나, 그러나 육신의 이름인 야누비타로 더 자주 불리게 된 이가 완공되어 가는 성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이 갑갑한 몸에서 벗어나고 싶군.”

그렇게 미할리나는 인간의 몸을 벗어 던지고 하늘을 나는 새의 몸에 올라탔다.

한정된 보폭에 답답하였던 마음은 순식간에 족쇄를 벗어 던진 죄인처럼 가벼워졌다. 인간의 다리로는 오르기 어렵던 험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이 새의 날개로는 가뿐했다. 미할리나는 아주 오래간만에 자유를 만끽했다. 뒤따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된 몸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기분은 짜릿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과거와 멀어지는 기이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 창공을 휘젓는 날개 아래서 지상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우선은 그동안 한 덩어리로 간주되었던 대륙과 사막의 교류가 끊기기 시작했다.

애당초 광활한 사막을 문제없이 오갈 수 있었던 천사들이 있어 가능했던 교류였다. 그러나 여덟 천사들이 본래의 육신을 버리고 인간과 짐승의 육체를 자유로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사막이 다시금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새삼스러우나 인간의 두 다리로 사막을 넘나들기란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그렇게 교류가 끊겨 가면서 대륙과 사막은 점차 각자의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사막을 버리고 대륙을 본거지로 삼은 사도 로살레다-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뜻에 따라, 대륙은 성도 오스피나를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종교 세계관으로 통합되었다. 남쪽의 라발을 신성 제국으로 삼아 힘을 실어 주었으나, 그마저 교회를 영구히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라발이 강력해질수록 라발이 모시는 교회의 권위는 덩달아 높아졌다.

반면에 사막은 천사들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짐승의 몸을 오가는 천사들은 미할리나가 그러하듯 사막에 닿을 수 있었으나, 예리엘을 제외하면 한낱 인간들의 생태에 깊게 관여할 의지가 없었다. 대륙에서조차 그들은 적당한 대리인을 뽑는 것으로 그쳤다. 예리엘이 한 땀, 한 땀 만들어 놓은 체계는 일명 사도라는 천사의 대리인을 매개로 나날이 고착화되고 있었다.

그런 예리엘마저 외면하는 사막은 자연스레 인간들의 손아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서쪽에서 일어난 누군가가, 때로는 동쪽에서 일어난 누군가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백 년마다 왕좌는 교체되었으며, 그때마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낭자하였다. 심지어는 열기를 즐기는 용들이 사막에 터를 잡으면서, 재앙처럼 몰려오는 용들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죽이고, 살기 위해 투쟁하는 사막의 이야기는 굼뜬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대륙으로도 흘러들었다.

그럴 때면 대륙의 반응은 늘 정해져 있었다.

‘야만스러워.’

교회의 질서 아래 단일화된 대륙의 사람들에게 갈래갈래 찢겨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막의 모습은 실로 야만스럽기 짝이 없게 보였다. 그들에겐 일원화된 질서가, 숭배해야 할 단 하나의 대상이, 국적과 신분을 초월한 종교의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시되었다. 나라가 아닌 부족별로 갈라지다 못해, 각 부족마다 모시는 신이 달라 수백의 신들이 난립하는 사막은 그야말로 무질서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야만은 대륙에도 숨어 있었다.

사막과는 멀리 떨어진 곳.

비교적 산세가 완만한 남쪽으로는 깊은 늪지대가 퍼져 있어 접근이 어렵고, 다른 방면으로는 지독하리만큼 가파른 산세에 가로막혀 외지인은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

일명 다그마르 산맥이라 불리는 그곳은 일찍이 대륙의 질서를 세워 나가던 천사 예리엘의 눈 밖에 난 곳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왕 노릇을 하던 뱀이 봉인되고 부리나케 도망친 잔챙이들이 숨어 지내던 피신처가 바로 그곳이었기에.

“눈에 띄는 것들은 모두 사살하고 왔다.”

달아난 뱀들을 죽이기 위해 떠났던 천사들이 돌아와 말했다.

“나머지는 처리할 가치도 없는 미물들이다. 산속에는 이미 불씨의 힘을 잃고 퇴화하여 일개 인간으로 전락한 이들도 많아.”

“다그마르 산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아난 뱀들도 결국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겠지.”

왕 노릇을 하던 가장 강력한 뱀은 이미 성검에 찔려 봉인되었고, 조금이나마 위협이 될 만한 싹은 사전에 모두 정리되었다. 뱀에게는 이제 쇠락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도둑의 조각들이 퇴화하여 인간이 되고, 일부 천사들이 권능을 잃고 용으로 퇴화하였듯이.

“그런데 산맥에 이런 풀이 있더군.”

단죄의 천사 마그누스는 톱니 모양으로 생긴 나뭇잎을 내밀었다.

“냄새를 맡아 보면 알겠지만, 우리를 겨냥한 풀이다. 날개 달린 족속들에겐 독이나 마찬가지지.”

코 밑에 대고 풀의 냄새를 맡던 천사 예리엘이 질색하며 손목을 튕겼다.

“뱀이 즐겨 사용하던 것이다. 배양하던 밭을 다 태운 줄 알았는데 그곳이 남아 있었군.”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니다. 멋모르는 산맥의 원주민들이 산신이 내린 은혜라 하여 손도 대지 않아 온 산맥이 저것으로 뒤덮이고 있다.”

“실로 아둔하기 짝이 없구나.”

예리엘은 표정을 구겼다. 땅을 기는 벌레들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천사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예리엘은 특별히 인간을 더 멸시하고 같잖게 보았다. 그런 예리엘이 무너진 대륙의 질서를 세우는 데 가장 열성이라는 사실은 못내 아이러니했다.

“다그마르 산맥은 앞으로도 배제하겠다.”

그 한 마디로 대략 천 년 가까이 대륙의 질서에서 다그마르 산맥은 완전히 제외되었다.

사막과 교류가 끊어진 것처럼 다그마르 산맥도 그리된 것이다. 대륙의 사람들은 사막을 야만의 땅이라 비웃는 것처럼 다그마르 산맥 역시 야만인들의 소굴이라 손가락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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