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1화 (301/328)

“그 힘으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

“이 땅을 정복할 것이다.”

“그리고.”

“날개를 되찾았으니 하늘을 넘봐야지.”

뱀이 새로이 얻은 날개를 펄럭이며 탐욕스럽게 웃었다.

“불씨의 조각만으로 이토록 강대해졌다. 고향의 불을 모조리 삼킨다면 나는 얼마나 더 강대해질 것인가.”

미할리나는 뱀의 목을 베어 냈다. 그럼에도 숨이 다하지 않은 뱀의 목이 데구루루 굴러가며 소리 높여 웃어 댔다. 그러자 미할리나는 거침없이 불을 지폈다. 순식간에 뱀의 웃음소리가 잦아들며 귀 째지는 비명이 솟구쳤다.

“모두 죽여야 한다, 빛이여.”

예리엘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슬라는 여전히 만류했다.

“아직 뱀에게 완전히 먹히지 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스스로 뱀인지 천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뱀에게 물렸으나 뱀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도리어 뱀을 흡수한 자들이었다. 자백하길 뱀이 죽어 가는 상황이었거나, 상처 입지 않은 온전한 상태에서 물어뜯긴 경우였다. 남의 육신을 훔치는 전무후무한 힘도 본인보다 강한 상대에겐 완벽하게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원해서 저리된 자들이 아니지 않나. 부디 자비를 베풀게.”

“아니, 보다 냉정해져야 할 때다. 빛이여, 너의 눈에는 저들의 본질이 보일 것인데.”

미할리나는 뱀이되, 뱀이지 않은 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둡구나.”

“빛에서 멀어진 자들이다. 죽여야 한다.”

“예리엘, 그런 질서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것을 정의라 하겠다.”

예리엘의 눈이 번뜩였다.

“정의로운 세상은 마땅히 빛으로 충만해야 한다. 어둠으로 타락한 존재를 살려 두어 분쟁의 화근을 남겨 두어서는 아니 될 일이야.”

“제발 자비를 베푸시게.”

“자비가 비수가 되어 날아오는 날에야 후회할 것인가. 뱀은 간사하고 사특한 도둑이다. 나는 뱀이 되길 원하지 않았노라, 세 치 혀로 우리를 속여 살아 나간다면 그 불똥이 누구에게로 튀겠는가. 진정 다른 동족들이 더 죽어 나가는 꼴을 보아야 알겠는가.”

예리엘의 말은 타당하게 들렸다.

따라서 뱀이되, 뱀이 아닌 자들은 그날에 모조리 불태워졌다.

전쟁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전사자들의 자리를 충원하기 위해 하늘에 남아 있던 천사들이 하나둘 내려오자, 하늘은 점차 비기 시작했다. 태초의 불을 수호한다는 이들이 정작 그곳에서 없어졌다.

하지만 토벌대가 그리 증원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뱀에게 물리면 타락했다고 간주되어 즉살 처분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탐욕에 눈이 멀어 제 발로 타락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예리엘은 본보기가 없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공포보다 더 효과적인 수는 없다. 앞으로는 뱀을 잡는 족족 빛이 닿지 않는 저 지하에 가두어 영원히 불타는 형벌을 내리자.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고통을 선보인다면 허튼 생각을 하는 자들은 사라질 것이다.”

“예리엘.”

“이것이 정의다.”

“네가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예리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을 따라 다오, 미할리나.”

“…….”

“너는 어둠을 모르지 않나.”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어둠.

오롯이 빛에서 태어난 그는 어둠을 모른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그의 앞에는 일직선의 길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질서고 진리였다. 예리엘은 늘 올바름이나 정의로움 따위를 설파하였으나, 그에겐 크게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결국에 예리엘의 정의도 일직선의 길에서 파생된 일개 샛길이었을 뿐이므로.

그렇다면 어둠은 무엇인가.

빛에서 태어나 빛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었으나, 다행히 그의 곁에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늘 헤매고 있는 장본인이 있었다. 바로 심연의 천사 이슬라. 그림자의 그림자, 또다시 그림자의 그림자로 겹쳐져 가장 어둠이 짙은 그림자 속에서 탄생한 이슬라는 태생부터 방황하고 배회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그가 보아 왔던 이슬라는 역시나 방랑자였다. 눈앞에 일직선의 길이 곧게 놓여 있는 그와 달리, 이슬라의 눈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보인다고 했다. 기로를 어렵사리 넘기면 또다시 세 갈래, 네 갈래로 꺾인 길이 나온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이슬라의 생은 선택의 연속.

그러나 선택의 어려움보다 이슬라를 더욱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그가 내려 왔던 무수한 선택들이 과연 옳았는지, 여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미할리나는 태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참함이 그에겐 평생의 괴로움이었다.

“너만이 유일한 등불이다.”

언젠가 이슬라는 말했다.

“내 눈은 언제나 부예.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아득한 먼 곳에서 빛나고 있는 너의 존재만은 느낄 수 있다. 나는 평생에 걸쳐 너에게로 날아가고 있어. 갈림길을 헤매고 가시밭길에서 주저앉을지언정 날갯짓을 멈추지는 않겠으니, 너는 항상 그곳에서 빛나다오.”

그의 세상은 사방이 안개로 가득한 벌판.

그리고 안개 속 세상에서 미할리나는, 이를테면 거리를 차마 가늠할 수 없는 먼 곳에서 뭉근하게 빛을 뿜어내는 태양.

복중에 든 태아처럼 존재감은 뚜렷하나, 언제 닿을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가 없다. 하물며 태양으로 가는 길을 누구도 알려 주지 않으니, 정처 없이 안갯속을 헤매고 같은 곳을 뱅뱅 돌면서도 한편으론 곳곳에 도사린 어둠의 늪을 조심해야 했다. 태양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난한데, 방랑자를 유혹하는 늪은 너무도 가까웠다.

그런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이슬라는 어쩔 수 없이 매일을 좌절하고 혼란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예리엘은 언제나 그런 이슬라를 답답하게 여겼지만, 미할리나는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이슬라는 느리고 더딜지언정 결국은 제 발로 산을 오르는 이였다. 남들이 쉽게 놓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그의 혜안을 미할리나는 높이 여겼다.

하지만 모두가 이슬라처럼 현명할 수는 없다.

너는 어둠을 모른다.

예리엘의 말에는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으나 채 감춰지지 못한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의연한 척으로는 미할리나의 눈을 속일 수 없다. 흔들리는 동공과 바싹바싹 말라 가는 입술에서 미할리나는 뚜렷한 공포의 징후를 감지했다. 역시나 그림자에서 태어난 존재인 예리엘의 세상에도 어둠의 늪이 산재한 것이었다.

그제야 미할리나는 어둠의 위험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저 콧대 높은 예리엘마저 두려워하는 것이 어둠이라면.

완전한 빛에서 탄생한 존재는 미할리나 혼자뿐이었다. 다른 존재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일정 정도의 어둠을 품고 있었다. 그는 어둠을 모르기에 어둠의 존재를 무시해 왔으나, 그리할 수 있는 것은 어둠을 모르는 그 혼자만이다. 예리엘이 드높은 자존심을 접고 저리 말할 정도면 다른 이들에게 어둠은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모두가 이슬라처럼 정도를 걷는 구도자일 수는 없다.

모두가 이슬라처럼 길을 잃더라도 끝끝내 빛을 향해 걸어오리라 막연히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형벌이란 공포로 휩쓸리는 자들의 목줄을 죄어야 한다.”

예리엘은 자기 자신마저 죄를 가늠하는 저울에 올렸다.

“그래야만 해.”

그렇게 빛이 닿지 않는 저 싸늘한 지하, 뱀을 가두는 감옥이 마련되었다.

잡는 족족 지하로 끌려 내려간 뱀들은 천사들이 속삭이는 주박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었다. 빛이 들지 않아 세상에서 가장 차디찬 그곳에 미할리나가 불을 지피니, 다른 천사들이 입김을 불어 불을 퍼트렸다. 주박에 사로잡힌 뱀들은 온몸이 불살라지는 고통을 영원토록 견뎌야만 했다. 천사들의 강력한 주박은 뱀들의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 죽음의 길로 나앉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예리엘은 그제야 안심했다.

눈에 띄게 줄어드는 배반자들을 헤아리며 미할리나 역시 예리엘의 소견이 옳은 줄 알았으나.

“…닿을 수 없다.”

하늘이 멀어졌다.

“고향에 닿을 수가 없어. 날개가 힘을 잃고 있다.”

“날개뿐인가. 우리의 권능이 약해지고 있어.”

땅으로 내려와 그들은 땅에 가까워졌다. 다리에 힘이 실린 것과 반대로 날개에선 힘이 빠졌으며, 온 세상을 호령하던 권능은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심지어는 도둑의 찌꺼기가 인간으로 퇴화한 것처럼 신성한 권능을 잃고 강력한 육체만이 남은 이들도 있었다.

바위도 꿰뚫는 날카로운 발톱과 창공을 가르는 날개.

인간들은 퇴화한 천사를 용이라 일컫기 시작했다.

“미할리나.”

문제는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주박이 약해졌다.”

주박을 걸었던 천사들의 권능이 약해지자, 자연스레 지하의 뱀들을 옥죄던 주박도 힘을 잃어 갔다. 사로잡혀 영겁의 고통을 견뎌 나가던 뱀들이 이제 어둠을 타고 하나둘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모진 고문을 못 이겨 이성을 잃고 분노만이 남아 버린 그들은 괴물의 모습으로 지상의 뱀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사들의 상대는 배로 늘어났다.

뱀의 심장에 아무리 칼을 꽂아 넣어도 과거의 주박이 발동하여 뱀들을 지하로 끌고 내려가니, 뱀은 죽이려야 죽일 수가 없었다. 권능이 약해져 주박은 약해졌는데, 약해진 권능으로는 주박을 완전히 풀 수가 없다. 천사들은 뱀을 죽일 수 없는데, 주박에 걸려 고문을 당한 뱀들은 차례차례 괴물로 변이해 지상으로 기어 올라온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물며 갈수록 악화되는 전황 속에서 뱀에게 육신을 빼앗기는 동족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빛이여, 오늘도 벗이 갔다네.”

그럴 때면 이슬라는 슬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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