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모두를 먼지로 되돌릴 것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빛의 창이 지상을 휩쓸었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날아오르던 도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창에 꿰뚫려 추락했고, 도둑의 일부분으로 떨어져 나간 조각들 역시 처참하게 난도질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의 태양이 세상 만물을 가리지 않고 보듬어 살피듯, 냉엄한 빛의 창날 역시 적과 적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 도둑을 관통한 창살은 그대로 지상의 산천으로 내리꽂혔고, 도둑의 조각들을 난도질한 창은 바다를 갈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초의 먼지로 돌아간 것은 도둑만이 아니었다.
다시금 희부연 모래 먼지로 뒤덮여 나가는 지상을 굽어보던 그와 동족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하늘의 고향에선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가 열렸고, 수일이 지나도록 나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향기로운 술과 아름다운 음악에 흠뻑 취한 동족들은 모래 먼지 휘날리는 지상을 끔찍이 여겨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고귀한 그들이 눈길을 주기에는 지상은 너무나도 비천하고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픔이 없어 기쁨도 없던 그는 왁자지껄한 동족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태초의 불을 섬기러 갔다. 승리에 도취한 동족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으나, 빛의 창을 꺼내 들기에 앞서 도둑이 토해 냈던 절반의 불씨를 찾아 품었던 그는 불씨를 온전하게 되돌릴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온전한 되돌림이란 무엇인가.
강고하게 타오르는 태초의 불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망설였다.
저 막연하도록 강대한 불에 비한다면야 그가 품고 있는 불씨는 너무나도 약하고 여리게만 보였다. 되돌리려 한다면 그대로 불에 먹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불씨 또한 그가 수호해야 마땅한 태초의 불이거늘, 이대로 사라지게 두는 것이 옳단 말인가.
최초의 망설임, 혹은 최초의 연민.
요는 그의 마음속에서 최초로 피어난 감정이었다. 당시의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잡초 하나 자라나지 못하던 황량한 그의 벌판에 채 삼켜지지 못한 불씨가 뒹굴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험하지 못한 혼란에 휩싸인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도로 불씨를 끌어안고 태초의 불 앞을 떠났다. 승리를 자축하는 나팔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불을 수호하는 천사들의 웃음소리는 백방으로 퍼져 나갔다. 모래 먼지 휘날리는 저 지상으로 가 닿을 만큼.
그리고 그곳에는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도둑이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꾸역꾸역 삼킨 불씨에 매달려 가까스로 숨을 이어 가던 도둑이 마침내 결심했다.
“나는 진화할 것이다.”
도둑은 다리에 꿰뚫린 창을 뽑아냈다. 부서진 어깨를 추켜올리고, 발톱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돌보았다.
그러나 뜯겨 나간 날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도둑은 하늘을 포기하고 짙은 모래 먼지 속에 상처 입은 몸을 숨기기로 했다. 더는 저 아름다운 창공을 탐할 수 없겠으나, 그에겐 두 다리로 정복할 수 있는 드넓은 땅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도둑은 땅을 기는 버러지가 되었다.
인간이 되었다.
모래 먼지 아래 참상이 드러나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늘의 천사들은 발아래 땅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땅과 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래 먼지가 아주 짙었기에. 덕분에 지상의 인간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도둑의 지도 아래 인간의 문명은 삽시간에 꽃을 피웠다.
지상의 이상 징후가 하늘까지 전해진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지상에 무관심하던 천사들이 변덕이 끓어 발아래를 굽어보았다가 사태를 깨달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정확히는 동족의 이탈이 먼저 있었다. 사라진 이들의 자취를 쫓다 보니 어느덧 지상으로 가 닿은 것이었다.
“도둑이 살아 있다.”
지상을 살펴보고 돌아온 동족이 말했다.
“사라진 몇몇은 도둑에게 가담한 것 같다.”
불씨를 탐했던 파렴치한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던 때였다. 천사들은 의아한 기색으로 하나둘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수한 빛의 창날에 사정없이 난도질당했던 지상은 어느새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지상을 가득 뒤덮은 미물들.
“스스로를 인간이라 부르더군.”
천사들은 이제 인간과 그들을 부리며 왕으로 군림하는 도둑의 존재를 알았다. 도둑 하나라면 큰 문제가 아니 될 것이나, 동족들이 자꾸 이탈한다면 훗날에 화근이 될 것이었다. 다시 토벌대를 꾸려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는 가운데, 지상을 살펴보고 돌아온 동족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도둑이 하나가 아니야.”
“하나가 아니라니?”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여럿이었다. 날개가 뜯겨 나가 땅을 기어 다니는 모양새가 마치 뱀과 같았지.”
죽은 줄 알았던 도둑이 뱀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심지어는 하나가 여럿이 되어.
“…불은 곧 생명의 원천.”
침묵하던 미할리나가 그제야 입술을 뗐다.
“불씨를 삼켰으니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금의 도둑은 죽여도 죽지 않는 상태겠지.”
탄생이란 불이 켜지는 것.
죽음이란 불이 꺼지는 것.
모든 생명체에 내재된 불이란 생명력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무리 강대한 천사들도 죽음을 완벽하게 회피할 수는 없으니, 상식을 뛰어넘은 뱀의 생명력은 그가 삼킨 불씨의 덕이라 보는 것이 옳았다.
“하기야 태초부터 지금까지 타오르고 있는 불이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니 그 작은 조각이나마 삼킨다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힘을 얻게 되겠지.”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태초의 불이 모셔진 곳으로 향했다.
“불씨를 삼킨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까?”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천사들은 토벌대를 꾸려 지체 없이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상에서 두 가지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첫째는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뱀을 따르지 않습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뱀을 숭배하진 않는다는 것.
조각조각 잘려 나간 도둑의 일부분에서 태동했되, 세월이 흐르고 대가 이어지면서 뱀의 본질을 상당수 잃어버린 인간들은 제각기 생각할 줄 알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였다.
하물며 지상에 흩뿌려진 밀알처럼 많은 그네들은 그 머릿수만큼이나 추구하는 바도, 목표하는 바도 달랐다. 진심으로 뱀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 반면, 뱀의 막강한 힘에 그저 굴복한 이들도 있었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욕이든 뱀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든 제각각의 이유로 뱀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들은 뱀과 비등한 힘을 지닌 천사들을 보곤 그들을 섬기길 청하였다. 천사들은 수락하지 않았으나, 뒤로 따라붙는 인간들의 행렬까지 거부하진 않았다. 천사들의 눈에 인간이란 땅을 기는 벌레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이 무얼 하든 철저히 그들의 관심 밖이었으나, 배반한 동족들은 사정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두 번째 깨달음이었다.
“나는 뱀이다.”
어떤 동족은 그리 말했고,
“나는 힘을 원했다.”
어떤 동족은 그리 말했으며,
“혼란스럽다.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
또 어떤 동족은 그리 말했다.
토벌대를 자청하여 내려온 천사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배반자는 뼛속까지 뱀인 것처럼 말하고, 어떤 배반자는 막대한 힘을 선사하는 불씨를 스스로 탐하였노라 자백하는데, 또 어떤 배반자는 자신이 뱀인지 천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적인가.
우리는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려야 하는가.
“모두 죽여야 하네. 하다못해 뱀의 찌꺼기인 저 인간들마저 모조리.”
예리엘은 말했다.
“빛이여. 나는 되도록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아.”
이슬라는 말했다.
모두가 제각각의 의견을 밝혔으나, 미할리나는 모든 결정을 유보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사안이 아니거니와, 섣불리 결심하기엔 아직 그들이 아는 바가 너무나도 적었다. 배반한 동족들에 대하여, 뱀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하여. 더 이상의 동족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아내야만 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안 돼!”
뱀의 무리와 맞붙은 국지전에서였다.
수세에 몰린 동족들 중 하나가 뱀의 칼을 맞아 피를 뿜어냈다. 기함한 형제가 그를 구하러 채 달려가기도 전에 뱀이 쓰러진 동족의 몸으로 달려들었다.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송곳니가 죽어 가는 동족의 살갗을 삽시간에 찢고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동족의 몸이 난데없이 발작하듯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은 까뒤집히고, 입에서는 흰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가 위태롭게 끓어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발작이 멈추었다.
동족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집요하게 그의 몸을 물어뜯던 뱀은 어느새 싸늘한 송장이 되어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천사들은 섣불리 다가가지도 못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돌아서는 동족의 눈이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미할리나는 직감했다.
뱀이구나.
“그토록 작은 불씨의 조각이 나를 영속하게 만들었다.”
동족의 육신을 입은 뱀이 양팔을 벌렸다.
“어떠한가, 빛이여. 너도 이 힘이 탐나느냐.”
남의 육신을 빼앗는 힘.
미할리나는 그제야 배반한 동족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죽어 가던 이들은 저렇게 맥없이 잡아먹힌 것이고, 불씨의 힘을 탐한 이들은 먼 옛날 도둑이 그러했듯 자진하여 타락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