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을 품을 겨를도 없이 쇠사슬에서 불씨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의 온몸을 휘감은 쇠사슬을 타고 불길이 번져 나간다. 페기가 눈을 부릅떴다. 본능적으로 벌어지는 입을 타고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려 했다.
“그만.”
나를 꺼내 줘.
“더 깊은 심연 속으로.”
제발.
밑바닥인 줄 알았던 곳은 밑바닥이 아니었고, 그녀는 다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온몸을 옥죄었던 쇠사슬이 조각조각 부서져 흩어진다. 순식간에 그녀의 뼛골로 침투했던 불길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넋을 놓고 맥을 잃었다. 금방의 충격적인 기억을 되짚을 겨를도 없었다. 다만 차오르는 숨을 껴안고 아득바득 무덤가를 기어올랐던 그때처럼 기진맥진했을 뿐이다. 그녀는 한없이 지치고 고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주 먼 길을 돌아온 과거의 기억 앞에서도 그녀는 오랜 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지막이 잦아드는 숨결, 힘없이 가라앉는 모든 생각과 감정들. 어린애들이 한바탕 휘저어 놓았던 흙탕물도 마침내 고요하게 진정되듯 그녀 역시 그러했다. 휘몰아쳤던 죽음의 기억에서 조금씩 벗어나며 그녀는 무뎌진 감각을 하나씩 일깨우려 했다. 여기는 또 언제이고 어디이기에….
제일 먼저 인지한 것은 악취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코를 찔러 온 것처럼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달갑지만도 않다.
그다음으로 느낀 것은 숨 막히는 무더위였다.
단순히 목이 마르고 땀이 흐르는 여름철 더위가 아니었다. 바닷가 특유의 습기 찬 공기에 끔찍한 불볕이 더해져 사람을 죽이는 혹서가 이어지고 있었다. 내륙에 위치한 성도 오스피나의 사람들은 전혀 상상도 못 하겠으나, 세상에는 더위에 숨이 막혀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페기는 그곳의 이름을 잘 알았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나의 고향, 나의 지옥.
감은 눈 안으로 펼쳐지는 세상은 머나먼 향락의 도시 카니나였다.
진주를 으깨어 바른 듯 새하얀 궁전과 끊임없이 파도치는 연옥색 바다. 하늘은 사시사철 구름 한 점 없이 맑으며, 뒤를 장식하는 돌산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바닷가와 기묘한 대치를 이루는 땅.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휴양지이나, 정작 돈 있는 자들에게만 문이 열리는 곳.
단 한 번도 카니나의 유려한 경관을 직접 보지 못했던 페기에게 도리어 고향이란 악취와 무더위로 얼룩진 곳이었다. 조각난 그 시절 기억이란 죄다 그런 식이었다.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단 더러운 쥐새끼에 가까웠던 그녀는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조차 병적으로 기피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기억을 외려 타인의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관조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감각을 지배하는 것은 그저 극심한 악취와 무더위. 낡은 나무판자에 가로막힌 시야는 갑갑하기 그지없으나, 헐거운 판자 사이로 가늘게 드리워지는 불볕이 못 견디게 따가운 것을 보면 차라리 바깥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이 나을 성싶었다.
쓰레기 더미에 몸을 기대어 그녀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어느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온 걸까.
그녀가 카니나의 뒷골목에서 구출되어 사도로 임명된 것은 고작해야 예닐곱 살의 일. 이전에는 기억할 만한 일도, 기억할 수 있는 일도 전무했다. 앞서 언급했듯 그 시절 그녀는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고, 부모는커녕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적도 없으므로.
다만 그 무엇보다 찬란했던 것은 구원의 순간.
겁에 질려 숨어 있었던 쓰레기통의 뚜껑이 불시에 열리자, 쏟아지는 빛과 함께 내려오던 그의 손길을 기억한다. 그 순간에 비로소 그녀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단순히 새로운 사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짐승의 탈을 벗겨 한 명의 인간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사람으로서 온전한 그녀의 기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렴풋한 감각만으로 남은 그 이전의 파편들은 기억이라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되감긴 기억을 이런 식으로 마주해 본들, 타인의 기억을 엿보는 것 같은 생소함은 여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악취, 이 무더위, 이 갑갑한 시야.
페기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오래전의 감각을 되새겼다.
처음에는 마냥 생경하다고만 여겼던 감각들이 묘하게 익숙했다. 코를 틀어막아도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악취는 깔고 앉은 쓰레기 더미에서 올라왔고, 끔찍한 무더위는 몸과 정신을 흐물흐물 녹이고 있었다. 숨 쉬기조차 버거워지며 의식이 다 혼미해질 지경이다.
그럴 리가… 하지만 어쩌면.
설마설마하던 의심은 점차 그럴싸한 추측으로 바뀌어 나갔다. 페기는 되돌아온 지금이 바로 예후르와 만났던 그 순간임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지금 이곳은 예후르와 최초로 조우했던 쓰레기통이었다.
늘 그렇듯 사람을 죽이는 무더위에 지쳐 골목을 헤매고 있었을 때.
간절하게 빗방울을 바라던 하늘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것은 천사의 장중한 목소리였다.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우나, 그 어떤 벼락보다도 무시무시하던 것. 나중에 깨닫길 천사 예리엘의 사도로 각성한 순간이었지만, 이름조차 없던 한낱 더러운 뒷골목 쥐새끼에겐 그보다 공포스러울 때가 없었다.
하여 겁에 질린 그녀는 골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쓰레기통으로 숨어들었다. 썩어 들어가는 쓰레기들로 가득하여 악취가 실로 지독한 곳이었지만, 거기가 아니면 달리 몸을 숨길 구석이 없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생쥐처럼 작은 몸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수밖에.
바로 그 순간으로 그녀는 되돌아왔다.
페기는 마음속에서 살며시 피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구역질 나는 악취도, 사람을 말려 죽이는 무더위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뼛골에 새겨지고 뇌리에 각인된 순간. 그 찰나의 환희로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만 있다면, 조금 전 마귀들에게 둘러싸였던 끔찍한 기억도 까맣게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기대로 가득 부풀어 있을 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 뚜껑이 열리며 빛이 쏟아지기만을 하염없이 고대하던 그녀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여 본다. 깔고 앉은 쓰레기 더미 아래서 무언가 튀어 오를 것처럼 야트막한 진동이 전해지고 있었다. 무엇일까.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발아래를 지켜보던 그녀가 숨을 멈춘다.
꿈틀거리며 느리게 솟아오르는 무언가.
쓰레기를 비집고 올라온 것은 웬 가느다란 실뱀이었다.
길이는 어른 손바닥 한 뼘 정도. 색이 짙어 땅을 기거나 쓰레기 사이를 헤집고 다니거든 쉽게 발견하지 못할 테지만, 어찌 되었든 뱀은 뱀이었다. 저 머나먼 다그마르산맥에서 발견된다는 거대한 뱀처럼 사람을 칭칭 감아 압사시키진 못하더라도, 어쨌든 뱀은 뱀이다.
뱀.
뱀.
뱀….
전혀 예상치 못한 조우는 도리어 머리를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제 허벅지를 타고 느릿느릿 기어 내려가는 실뱀을 그저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분명 예후르와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일 텐데. 뚜껑이 열리면서 그의 손길이 내려와야 하는데 왜….
그녀는 예고 없이 등장한 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에겐 장중하게 울려 퍼지던 천사의 음성, 악취와 무더위를 견디며 숨어 있었던 쓰레기통과 찬란한 구원의 순간만이 전부였다. 그 시절 기억 어디에도 뱀은 없었다. 저 뱀은 여기 있어선 안 된다.
참을 수 없는 불길함이 어느새 목 끝까지 차올랐다. 얼어붙은 손끝이 움찔 튀어 오른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뱀 가죽이 닿는 곳마다 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다.
유려하게 다리를 감아 내려가던 실뱀은 어느덧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에 이르렀다. 스르르 올라오는 머리에 박힌 두 눈알이 검다. 반대로 날름 튀어나오는 기다란 혓바닥 위로 설핏 엿보이는 송곳니는 질리도록 희었다.
페기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생에 단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던 의혹이 부상한다.
“내 고향에서 발목에 점이 있는 여자를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
“사마귀.”
어쩌면.
“사마귀는 교미 중에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잖아.”
창백해진 그녀를 비웃듯 실뱀이 아가리를 쩍 벌린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부정하고 부정하는 그녀에게로 달려들어 발목을 콱 물어뜯었다.
아.
송곳니가 여린 살갗을 찢는 감각이 선연하다.
묵직하게 엄습하는 고통이 맹독처럼 그녀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손끝 발끝까지 치닫는 통증.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목에 굵은 핏대가 가닥가닥 선다. 비명 한 줄 흘리지도 못하면서 악다구니를 쓰는 병자처럼 사지를 마구 뒤틀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아픔에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 버릴 지경이었다.
아니야, 외치는 소리는 비명에 먹힌다.
그럴 리 없어, 발악하는 소리는 눈물에 지워진다.
시퍼렇게 벼린 칼날로 온몸을 난도질하듯, 혹은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내듯.
그러나 육신의 고통으로 한정되지 않는 그것은, 이를 테면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는 충격이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사람의 육신과 영혼이 뒤바뀌며, 너와 내가 도치되는 충격.
사람이 어미 배 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듯, 그녀 역시 지금 이 순간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구태여 파고들지 않았다면 평생토록 떠올리지 못했을 기억이 삽시간에 되살아나 온몸 구석구석으로.
그 역시 고통이다.
수천수만 번 내리치는 벼락이 되어 그녀를 하얗게 태워 나간다. 그녀의 육신을, 그녀의 영혼을. 그렇게 숨을 끊어 새로이 되살려내려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충격이 일시에 가셨다.
부릅 뜨인 눈이 멍하니 허공을 더듬는다. 안개처럼 깔린 부연 습기. 살갗에 와닿는 물은 따뜻하고, 싸한 유황 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그녀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놀란 눈으로 절 응시하는 한 여자를 보았다.
낯선 얼굴. 이민족.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