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5화 (295/328)

그리 익숙하게 길을 잡아 나아가던 신관은 곧 태피스트리를 걷으며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르던 페기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촛불 두엇이 오른 간소한 제단에는 팔이 여섯 달린 기이한 형상의 남신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들어오시지요.”

신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재촉하자, 페기는 황급히 방으로 들어왔다. 차라와 요슈아, 라만까지 들어오자 이제는 방이 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신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제단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어렴풋한 불빛이 닿는 모습을 보아하니 라만이 가져갔던 팔라브르 유적 말미의 본인 것 같았다.

“해석을 부탁하셨지요?”

“예.”

페기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다.

“확실히 사막에서 사용하는 신어와 굉장히 유사한 문자입니다. 사견으로는 신어의 옛 형태가 아닐지.”

신관은 그리 말하면서 종이를 펼쳤다.

사어와 유사하나 해석은 전혀 되지 않던 문자. 한마디로, 신성 시대 대륙에서 사용되었던 사어와 사막의 신어는 언어 체계만이 다를 뿐 같은 문자를 이용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현시대에도 대륙과 사막은 교류가 극히 드문데 수천 년 전에는 어찌 그리 긴밀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의문은 신관의 목소리와 함께 맥이 끊겼다.

“이 부분, 제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이와 같습니다.”

“…….”

“심연을 들여다보라.”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심연이요?”

“예.”

신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그러자 때아닌 침묵 속에서 신관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의 시선이 차라에게로 꽂혔다. 그는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현신이었으므로.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팔라브르 비석을 만든 장본인 역시 천사 이슬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가 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야누비타 1세고, 그녀를 도왔던 사도 로살레다가 소명의 천사 예리엘로 추측되는 것처럼.

천 년 전의 사도들이 죄다 지상으로 강림한 천사라면,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 역시 심연의 천사 이슬라가 된다. 수천 년에 걸친 신성 시대의 유적들이 모두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는 내용이었던 것처럼, 샤를로망 프리울리 역시 추모의 목적으로 방랑길에 올랐다.

차라는 이를 근거로 현존하는 신성 시대의 비석을 세운 사람이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이며, 또한 심연의 천사 이슬라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세웠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일이나, 비석 말미의 해석을 들은 이상 완전히 배제할 수만도 없다.

“심연….”

페기는 조용히 중얼거리며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일상적으로, 문학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쓰이는 의미는 각기 다르겠으나, 종교적인 관점에서 심연이란 곧 심연의 천사 이슬라를 뜻한다.

빛에서 탄생한 천사 미할리나와 달리 나머지 일곱 천사들은 미할리나의 그림자에서 비롯되었는데, 그중 맨 마지막으로 태어난 천사 이슬라는 탄생 순서로 가리는 서열에서 가장 뒷자리인 여덟 번째를 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사 미할리나가 시작을 상징한다면, 천사 이슬라가 상징하는 것은 끝. 미할리나가 순수한 빛이라면, 이슬라는 빛과 어둠의 경계.

미할리나를 제한 나머지 일곱 천사들이 그림자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일곱 천사들의 근원을 의심하는 자들은 대개 이슬라의 성질을 경계에 둔다. 빛에서 가장 먼 자리기도 하거니와, 천사 이슬라의 지난 사도들이 보여 온 모습들 역시 다소 모호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느 왕국에 가니,

황금을 쌓아 올린 왕과 고혈을 빨리는 백성들.

어린 추수꾼의 손을 잡고 도망을 나오자

등 뒤에서 장송곡이 들려와 신명 나게 춤을 추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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