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잡념을 쫓아내며 애써 말문을 열었다.
“덕분에 실마리가 보여요. 고마워요, 라만.”
라만은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자였기에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일이 잘 풀린다면 그대에게도 상을 내리겠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요.”
“…원하는 것은 달리 없고.”
무겁게 운을 뗀 그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페기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만이 불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얼결에 그를 따라 멈추어 선 페기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알틴.”
“…….
“그 하녀 말입니다.”
문득, 하늘에 번개가 스치는지 어둡던 사위가 깜빡 밝아졌다. 페기는 어느새 저를 향해 돌아선 라만의 형체를 보았다. 역광을 삼킨 그의 그림자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것처럼 닥쳐오고 있었다.
“전하께서 청백회로 집어넣으신 겁니까?”
페기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필 알틴의 이름이 거론되기에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대가 말하는 알틴이 혹시….”
“4년 전 전하를 모셨던 그 하녀가 맞습니다.”
라만의 즉답에 페기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알틴을 어떻게 알죠?”
“굳이 말씀드려야 합니까?”
“내 대답을 듣고 싶다면요.”
라만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번쩍거리는 섬광이 그의 어두운 얼굴 위를 연달아 스쳐 지나갔다. 풍겨져 나오는 기세가 자못 음산하였으나, 페기는 그럼에도 눈을 꼿꼿이 치떴다. 찌를 듯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한때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콰르릉!
벼락이 내리쳤다. 산을 쪼개기라도 할 것처럼 거대한 소리의 진동이 밀려왔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날을 세웠다.
“대답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청백회로 밀어 넣으신 것이 맞습니까?”
도로 암암해지는 사위에 라만의 안광만이 형형하게 빛났다. 물끄러미 그 시선을 마주하던 페기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맞아요.”
서로 아우성을 지르는 빗소리, 건물을 무너트릴 듯 몰아닥치는 바람 소리, 이리저리 뒹굴고 부닥치고 깨지는 소리…. 온통 산란한 와중에 눈앞의 라만만은 늪처럼 고요했다. 페기는 손끝을 움찔 떨었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 어린 공기가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아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고 라만은 한참을 침묵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선명했다. 페기는 슬쩍 눈살을 찌푸린다. 알틴은 4년 전 그녀를 배신한 이후로 신분을 조작하여 시골 기사의 후처로 들어갔다. 설마 불장난이 그때까지 이어졌단 말인가.
의심이 깃든 그녀의 표정을 뒤늦게 눈치챈 라만이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알틴과는 4년 전에 끝났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하셨는지만 알려 주십시오.”
“알틴의 아이이지, 그대의 아이는 아닐 텐데요.”
“설마 아이도 죽이신 겁니까?”
성급하게 들리는 질문이었다. 페기는 힘이 꽉 들어간 그의 턱이나 핏줄이 선 그의 주먹 따위를 넌지시 훑어보았다. 여전히 그의 진의를 알 수가 없었다.
“…아이는 자식 없는 부부에게로 보냈습니다. 이후로 올라오는 보고가 없으니 양부모의 품에서 잘 자라고 있겠지요.”
기다렸다는 듯 라만이 참고 있었던 숨을 푹 내쉬었다. 잔뜩 불거져 있던 어깨 근육이나 가슴팍이 잦아드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때마침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가 잠시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암암하던 사위가 조금 밝아졌다.
페기는 그제야 훤히 드러난 라만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대단한 결전을 치르고 온 전사처럼 힘이 쭉 빠진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알틴에 대한 복수심이라도 품었나 싶어 그를 의심하던 페기조차 이제는 그의 심경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눈가를 문지르며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 서 있던 라만이 별안간 허리를 깊게 숙였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불손한 질문이었다는 것을 압니다만, 전하께 직접 확인받고 싶었습니다.”
“…내가 알틴의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요?”
알틴의 아이는 늙은 시골 기사의 아들이다. 4년 전에 헤어진 라만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거니와, 알틴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고 하기에도 태도가 영 어중간했다.
라만이 망설임 끝에 입술을 열었다.
“알틴이 전하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잘 압니다. 어떻게 강제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청백회란 사지로 집어넣으신 것에도 전하 나름의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
“하지만 아이는 다르지 않습니까.”
페기는 언젠가 제 품에서 꿈틀거리던 알틴의 아이를 떠올렸다.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젖먹이. 오물거리던 입술과 살며시 제 손가락을 잡아 오던 통통한 손을 보며 알틴과는 참으로 닮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던 알틴과 아이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존재였다.
“숙부님이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다고 들었습니다.”
라만은 머뭇머뭇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저희 이스파갈족이 매달릴 수 있는 분은 전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전하께서 인정(人情)을 아는 분이시길 바랐습니다. 적어도 제가 평생을 모실 주군이시라면요.”
페기는 소리 없이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주군이란 말이 생소했다. 늘 저에게 불손하던 라만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알틴을 많이 사랑했나요?”
“이미 지나간 감정입니다.”
즉답한 라만이 짤막한 침묵 끝에 다시 말을 이었다.
“알틴은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렀고, 그 죗값을 치른 겁니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을 처참하게 배신해 놓고 과거를 지운 채 깨끗한 척 살아가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설령 전하께서 알틴을 가엾게 여기셨다 한들, 알틴에 의해 훼손된 전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벌하심이 마땅했으니까요.”
그런 알틴은 죽었다.
죽어 가던 알틴의 마지막 유지와는 달리 양부모에게 아이의 친모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아이 역시 자신의 친모가 누군지 평생 모르고 살 것이었다. 오래 고민했으나 그것이 맞는 선택이었다. 그로써 알틴의 죄는 모두에게 잊힐 것이므로.
“…그대의 뜻은 잘 알겠어요. 내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앞으로는 부디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듣기 면구스럽습니다.”
라만이 정중하게 묵례했다. 페기는 조금 놀란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부터 사도로 받들어졌으나, 레오폴트처럼 태생부터 귀족이 아니었던 그녀는 낯선 이들에게 하대하는 것을 영 불편하게 여겨 왔다. 이마에 찍힌 성흔만 아니었으면 내가 저치들과 무엇이 다를까 싶어.
하지만 경비대의 충성을 받는 카타리나 공작은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페기는 영 어색한 기색으로 입술을 뗐다.
“…알겠네. 그러도록 하지.”
***
몬틸로 백작의 말대로 비는 그치지 않았다.
이르게 찾아온 산자락의 밤이 어느덧 요새를 시커멓게 뒤덮는데도 빗줄기는 약해지긴커녕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빗물이 곧장 산 아래로 쓸려 내려가는 통에 홍수가 날 걱정은 없었으나, 얼마 전 산사태로 무너진 목책 부근이 문제였다.
페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산사태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로 안내되었다. 그새 멀미에서 해방된 차라는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굶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양 삶은 감자를 소쿠리째 끼고 먹고 있었다. 요슈아는 또 사막의 예쁜 아가씨들과 노닥거리러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페기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감자를 열심히 입에 쑤셔 넣고 있는 차라의 뻗친 머리를 대강 손봐 주곤 창가로 향했다. 유리 대신 끼워 넣은 엉성한 나무 창문이 영 헐거웠다. 그녀는 조심스레 나무 창문을 열곤 비 내리는 밤중의 산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먼 등불만이 아스라하게 빛을 발하는 어둠 속.
달은 물론이요, 한 줌 별빛도 보이지 않는 하늘은 한없이 암암하기만 하다.
차츰 어두워지는 밤하늘에 달의 흔적은 보이지도 않자 페기는 꽤나 실망하였었는데, 라만의 말로 설령 달이 떴다 하더라도 이 빗줄기를 뚫고 신당에 가기는 무리라 하였다. 신당은 요새를 따라 쭉 올라가야 달할 수 있는 저 산봉우리 정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 즈음에….
페기는 고개를 살짝 틀어 아까 전 라만이 손짓해 보였던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다행히 근방에 등불이 걸려 있어 산봉우리 대강의 형체는 짐작할 수 있었으나, 짙게 깔린 안개가 정상을 가리고 있었다. 페기는 그곳에 있을 신당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려 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사막의 종교는 그녀에게 영 생소한 것이었다.
“사막의 신관들은 어떻지? 우리와는 많이 다른가?”
그녀의 질문에 라만은 한동안 고민을 이어 갔다.
“우선… 저희 이스파갈족이 주신으로 모시는 달의 신 아나키오스는 남성입니다. 사막에서 신관이란 주신과 부부의 연을 맺는 존재이기 때문에, 저 신당에 있는 신관들은 모두 여성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여신을 주신으로 모시는 사막의 다른 부족들은 남성 신관들을 거느렸다고 들었습니다.”
“성별만 맞으면 누구나 신관을 할 수 있는 건가?”
“아닙니다. 잊고 있던 기억을 되찾은 사람만이 신관을 할 수 있습니다.”
“잊고 있던 기억?”
라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날 때의 기억, 죽기 직전에서 살아 돌아왔던 기억… 이런 것들 있지 않습니까. 저희 사막인들은 성인이 되어 의식을 치르는데, 거기서 다른 신관들과 동일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신관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저는 그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만, 신관들만이 공유하는 어떤 기억이 있다더군요.”
알 듯 말 듯 한 소리였다. 라만의 설명을 가만히 곱씹어 나가던 페기는 구멍 난 자신의 기억에 자연스레 설명을 대입해 보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불분명한 그녀의 기억은 심지어 중간에 거대한 공동이 뚫려 버리고 말았다.
아마도 최초의 기억은 썩은 내.
환락의 도시 뒷골목의 쓰레기 더미를 전전하던 한낱 쥐새끼였던 당시의 기억은 모든 것이 흐릿했다. 다만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나 내리쬐는 볕의 뜨거운 열기, 혹은 참을 수 없는 갈증만이 조각조각 남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시작한 것은 예후르를 만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