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0화 (290/328)

“대체 왜 이러는지는 알려 줄 수 없는 거야? 무슨 일인지 알아야 우리도 감을 잡지.”

“…….”

“페기. 내 말 듣고 있어?”

“팔라브르 유적.”

불현듯이 페기가 입술을 뗐다.

“해석본, 지금 가지고 있어?”

멍하니 눈을 껌벅이던 차라가 허둥지둥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쓰레기처럼 구겨진 종이 여럿을 하나하나 펼쳐 본 끝에 겨우 해석본을 찾아 건네었다.

페기는 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죽은 전우에게 전하는 추모시로, 신성 시대 말기의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강대한 뱀의 세력,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사도의 진영, 속절없이 기울어져 가는 군의 사기와 홀로 고귀하여 낮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빛.

…우리에겐 이제 선택의 여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는 전멸하여 패배할 뿐이다. 빛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가 그간 오래도록 지켜 왔던 우리의 신념을 꺾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이 터 온다. 머지않아 빛이 우리를 부르리란 예감이 든다. 나의 형제, 나의 벗. 우리는 결국 선택하게 될 것이다. 나는 네가 훗날의 전장에서 결단코 너를 용서하지 않을 빛과 마주하는 일만큼은 피하길 바란다. 나는 너를 두 번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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