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조금만 기다려 줘.”
“페기.”
“해답을 찾아 곧 돌아올 테니까….”
페기는 더운 숨을 토해 내며 더듬더듬 뒷걸음질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예후르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온 성도에 마귀가 들끓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거든, 내 말 들어.”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야…?”
페기가 울 듯이 웃었다.
“너는… 네가 그런다고 내가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예후르의 표정이 얼핏 가장자리부터 무너져 내렸다. 페기는 바들바들 떨리는 턱에 애써 힘을 주며 가까스로 발을 돌렸다. 그러고는 고꾸라질 듯한 몸을 가누며 정신없이 발걸음을 놀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빛을 향해. 마치 결정된 비극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는 것처럼.
그리고 교회를 나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를 돌아본다.
“…약속할게.”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영원히 너와 행복하겠다고.”
***
그는 그녀를 속이고 있다.
“페, 페기, 왜 그래! 또 뭔데!”
애당초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퀴테리아와의 법정 싸움에서 하필이면 뱀의 의혹을 뒤집어썼던 것도 생각해 보면 계획의 일부였다. 뱀을 죽인 영웅이 실은 뱀으로 타락한 사도였다고 뒤늦게 밝혀진다 한들 세상 누가 믿겠는가. 사실상 그는 훗날에 밝혀질 진실에 힘을 더해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의혹을 심고 본인의 명성에 흠집을 낸 셈이었다.
그리하여 페기가 진짜 뱀을 죽인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어디서 시작했어.”
“어, 어?”
“예후르의 정체. 어디서부터 찾기 시작했냐고.”
그녀의 닦달에 차라는 더듬더듬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을 말했다. 페기는 그 길로 성궁을 떠나 기록원으로 향했다. 그렇잖아도 인력이 부족해 관리가 엉성하던 기록원은 청백회 사태 이후로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페기는 그새 거미줄이 처진 기록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응? 갑자기 왜 여길….”
황급히 그녀를 뒤따라온 차라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페기는 대답 없이 먼지 쌓인 탁상에 놓여 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휘리릭 책장을 넘겨 보다가, 악필로 메모가 적혀 있는 부분에서 멈추었다.
“이 악필을 따라 추적해 나갔다고 했지.”
“으, 으응.”
“처음에는 내 부활에 대해 캐내려고 한 거라며. 악필을 따라 조사하다 보니 예후르의 정체를 알게 된 거야?”
“그냥… 이것저것 파헤치다 보니 천사와 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어. 그러다가 팔라브르 유적의 비문을 보고 예후르가 천사라는 걸 깨달은 거고.”
페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돌이켜 보면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그들보다 앞서 신성 시대를 파헤쳤던 의문의 악필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차라에게 나타난 것도 그렇거니와, 결국 그들을 지금의 정답으로 이끈 모든 단계에 악필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다. 편의적인 것으로 모자라, 그들의 시야를 오직 일직선으로 협소하게 만들어 놓았다.
“…다시 처음부터 살펴봐야겠어.”
“뭐?”
질색하는 차라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페기는 무작정 가까운 책부터 집어 들었다. 황망하게 입술만 벙긋거리던 차라가 보다 못해 그녀를 만류했다.
“도대체 왜 이래? 무슨 일인지부터 설명을 해 줘야….”
“시간이 없다고!”
발작적으로 내지른 소리에 차라가 바짝 굳었다. 페기는 파르르 떨려 오는 아래턱에 애써 힘을 주며 더듬더듬 얼굴을 감싸 쥐었다. 끔찍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시간이 없다.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당장 오늘이라도 온 성도에 마귀가 들끓을 수 있었다. 그럼 막을 수가 없다. 그가 뱀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이 모든 평화도 끝이었다.
“무언가… 숨기고 있어.”
뱀으로 일부 타락했다 한들, 그의 본질마저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올곧은 질서이며, 이성과 합리로 대표되는 진리. 마땅한 이유가 없다면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술이 벗겨진 그녀의 맨얼굴을 보고도 그녀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을 끝끝내 부정하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본인의 감정을 깨우쳤다 한들, 그토록 마구잡이로 흔들릴 사람이 아니란 소리다.
그런 사람이 어찌하여 본인을 죽이라는 막말을 하였을까.
아무도 그녀를 해할 수 없는 영광된 자리로 인도하겠다던 약속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교황의 자리에 그가 올라 그녀를 보호해 주는 것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선 본인이 사라져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대관절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수집한 정보들로는 절대 그런 결론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만이 알고 있는, 그리하여 그런 비참한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 존재했다.
“…예후르가 또 이상한 말을 했구나.”
그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차라가 딱하다는 얼굴을 했다. 페기는 입술을 깨물며 책을 펼쳐 들었다. 짐짓 고집스럽게까지 보이는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차라가 탁상에 쌓여 있는 책들 중 하나를 집었다.
“정확히 뭘 찾아야 하는 거야?”
“우리가 모르던 거라면 전부 다.”
분명 어딘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다. 앞만 보며 달려오느라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의문점들. 그러나 필요한 정보를 특정할 수 없으므로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훑어야만 했다.
주위에 널린 책들을 질린 눈으로 돌아보던 차라가 한숨을 삼키며 부스스 일어났다.
“…요슈아도 불러올게.”
그래도 둘보단 셋이 낫겠지. 미덥지 않은 손이나마 빌리려 나가는 차라의 뒤에서 페기는 묵묵히 책장을 넘겨 나갔다. 볕 들지 않는 그늘을 비추던 촛불 아래로 뜨거운 촛농이 미끄러져 내렸다.
예쁜 하녀 아가씨와 시시덕거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요슈아는 갑자기 퀴퀴한 문서 기록원으로 끌려와 짜증이란 짜증은 다 부렸다.
눈알 빠지게 살펴본 것을 왜 다시 읽어야 하냐는 둥, 차라리 눈 찌르고 맹인이 되겠다는 둥 격렬하게 반항하던 그는 눈이 벌게지도록 책을 읽고 있는 페기를 목격하곤 얌전히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하기야 지금의 페기는 빈말로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이 흘렀다.
재독한 책들은 시시각각 쌓여 갔으나,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책이 산더미였다. 일전에도 차라와 요슈아 둘이서 거의 열흘 가까이 붙잡고 있던 분량이었다. 이번엔 페기까지 더해 셋이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지만, 고작 하루 이틀로 해결될 양이 아니었다.
문제는 더 있었다.
“여기 있는 책들뿐만이 아니야. 데르모트 수도원에도 있잖아.”
차라가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에 요슈아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이마를 쳤다. 악필로 적힌 책을 찾아 읽으려 하였으나, 이미 금서로 낙인 찍힌 책을 기록원에서 찾을 수 없어 어찌어찌 찾아 들어간 곳이 바로 데르모트 수도원이었다.
데르모트 수도원의 랄프 수도원장은 교회 내부에서도 제법 암암리에 알려진 고서 수집가였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찾아간 곳에서 둘은 간신히 찾아 헤매던 고서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족히 닷새는 걸릴 텐데?”
“닷새를 걸려 가더라도 책들이 남아 있으면 다행이게. 새로운 수도원장, 지금쯤은 아마 문짝을 뜯어서라도 서재로 들어갔을걸?”
그들이 데르모트 수도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랄프 수도원장의 장례식이 한창이었다. 듣기로는 그들이 도착하기 직전 평온히 눈을 감았다고 했다. 차라와 요슈아는 수도사들이 슬픔에 잠긴 틈을 타 죽은 수도원장의 서재를 점거하고 고서를 탐독했었다. 그리고 랄프 수도원장의 뒤를 이은 새로운 수도원장은 그런 그들의 무례에 아주 치를 떨었었다.
십중팔구 서재는 깨끗하게 정리되었으리라. 책이라도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새로운 수도원장은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어 도저히 금서를 수용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짐작하건대 금서들을 발견하자마자 노발대발하며 죄다 불쏘시개로 써 버렸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방법으론 찾기 힘들어. 정확히 무얼 찾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잖아.”
차라의 똑 부러진 말에 비로소 책장을 넘기던 페기의 손길이 멈추었다. 가만히 손바닥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그녀의 손끝을 보며 차라는 한숨을 지었다. 문제는 있는데 해결책은 없는 상황. 그럼에도 속절없이 흘러내리는 촛농을 보며 다급해질 그녀의 마음이 이해는 되었다.
“데르모트 수도원도 그렇고 남은 시간도 그렇고, 시작점부터 다시 훑어보는 건 어차피 불가능해. 게다가 중요한 부분은 이미 이단 심문관들이 다 찢어 가서, 이상한 점을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는걸.”
차라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악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책의 주요 부분이 찢겨 나갔기 때문이다.
“차라리 생각을 모아 보자. 우리가 아는 걸 계속 얘기하다 보면 무언가 이상한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저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요슈아가 발 빠르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펼쳐진 책을 잠시 응시하던 페기가 미련 없이 팔을 휘둘러 탁상에 쌓인 책들을 모두 쓸어내렸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서적들 위로 부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페기는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앉아.”
차라와 요슈아가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페기는 두 사람의 눈을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조사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점 없어?”
“그거야 많죠. 이 메모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왜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지 않았는가, 교회가 정보를 막고 있다면 과연 어느 선에서 내려오는 명령인가.”
요슈아가 손가락으로 짧은 곱슬머리를 빙빙 돌리며 말했다.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방랑을 시작한 진짜 이유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아마도 사도 로살레다의 밀명이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벌써 천 년 전의 일이잖아요. 이 악필은 끽해야 수십 년 됐을 건데 이렇게 철저하게 입막음 당한 게 수상해요. 반백 년 전 발견된 팔라브르 유적이 아직 미공개인 것도 그렇고.”
“…….”
“혹시 성하께서 개입하셨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차라가 슬쩍 페기의 눈치를 보았다.
“넌 예후르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페기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차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