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6화 (286/328)

그는 그대로 정원을 걸어 나왔다.

“엘피도 공작 전하.”

정원 밖에는 그의 수하가 비밀스럽게 대기하고 있었다. 예후르의 눈길이 넌지시 닿자, 수하는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이어 갔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교국의 국경을 넘으셨습니다.”

“…이제야.”

한탄처럼 터지는 소리에 놀란 수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예후르는 시름에 잠긴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볼 뿐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수하는 머뭇거리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머나먼 서쪽 하늘.

시커멓게 잠식된 그곳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

쉴 새 없이 달려 도착한 성도는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에 이르러 있었다.

마차를 뒤흔들던 매서운 칼바람은 신기할 정도로 잠잠해졌고,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눈에 띄게 얇아져 있었다. 변해 가는 계절은 도시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떠나기 전에 보았던 삭막하고 앙상한 도시는 온데간데없었다.

“다행이지. 이번 겨울은 유독 혹독했잖아.”

요슈아와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차라는 그렇게 말했다. 듣기로는 성도 오스피나에서도 밤마다 동사하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고 하였으나, 비단 날씨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올라, 퀴테리아, 청백회. 차라는 벌써 자신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진 존재들을 떠올렸다. 이번 겨울의 혹한은 수년간 성도에 뿌리내리고 있던 세력마저 거침없이 뽑아 냈다. 치열한 다툼이었지만, 계절이 지나가듯 그들이 남긴 성도의 흔적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혹독은 무슨. 내 고향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너 여름에 죽어 갈 거 생각하면 굉장히 기대된다.”

“우리 여름에는 좀 북쪽으로 가지 않을래?”

“왜? 내 고향 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덤볐다가 뼈도 못 추리게 된 요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구겼다.

차라는 도도한 고양이처럼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요슈아의 말대로 여름에 어디 있을지는 지금부터 찬찬히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는 곧 성인이 될 것이고,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페란 공작의 작위를 이어받을 테니.

별일이 없다면 이 지긋지긋한 성도를 떠나도 되지 않을까.

차라는 애매한 생각을 이어가며 흘끗 페기를 훔쳐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성도가 갑갑했다. 하지만 어릴 때처럼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기엔 옛 가족들과는 거의 절연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역시 자신을 어려워하는 그들에게 괜한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의 가족은 이제 페기와 예후르 그리고 레오폴트였다.

떠나고는 싶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가족들에게 별일이 없다면의 이야기다. 그리고 차라는 제법 희망적인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비올라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고, 청백회가 사라진 성도에선 그 누구도 예후르와 대적하지 못하리라. 비올라를 잃은 레오폴트는 시름시름 앓고 있겠지만, 도리어 그의 요양을 핑계 댄다면 성도를 떠난다는 차라를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니 문제는 페기다.

차라는 조금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팔라브르 유적지에서 그가 알고 있던 예후르의 진실을 토로한 뒤로 다시는 똑같은 화제가 입에 오르내린 적 없었다. 페기의 고집대로 성도의 국경을 넘어 베론까지 다녀왔지만 마찬가지. 차라는 아직도 페기가 베론의 지하 수로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보긴 하였을까.

베론에 새로 부임한 신임 사제의 이야기를 듣자니, 이미 중앙에서 그들보다 발 빠르게 베론을 다녀간 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페기의 의심대로 법정에서 퀴테리아 추기경이 폭로했던 사실 중 일부가 들어맞는다면, 예후르가 본인의 행적을 지우기 위하여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철두철미한 그가 같은 일로 두 번 꼬리 잡힐 일을 용납할 리 없으므로.

하지만 이런들 저런들 어떻단 말인가.

그는 천사인데.

솔직히 말해 차라는 구태여 베론을 다녀와야겠다던 페기의 의견도, 혼자서 지하 수로에 내려가겠다던 그녀의 고집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가 말 안 하고 혼자 끌어안고 있는 사실이 있다는 것쯤이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으니 어떤 내용인지조차 가늠이 불가했다.

차라는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에 치여 배기는 허리를 문지르곤 자세를 바꾸었다.

베론에 다녀온 이후로 페기는 극도로 말수가 적어졌다. 억지로라도 말을 붙이지 않으면 종일 입을 딱 붙이고 앉아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 작은 머리통 안에는 무슨 생각이 담겨 있을까.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는 페기의 옆얼굴이 유독 희었다.

“페기.”

차라는 참다못해 말문을 열었다. 페기는 한 박자 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고요하게 지친 얼굴은 여전히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괜찮아?”

걱정스럽게 묻는 소리에도 페기는 한참을 허공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는 차라가 슬그머니 미간을 좁힐 즈음이 되어서야 고개를 얕게 끄덕이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쓱해진 차라가 괜스레 관자놀이를 긁었다.

예후르가 천사라는 사실은 그에게 달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예후르가 특별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고대했던 발견을 해낸 학자처럼 희열에 찼을 뿐이다. 어린 마음에 페기도 그러리라 여겼건만, 참으로 아둔하고 미련한 생각이었다.

그에게 예후르는 형제지만, 그녀에게 예후르는 연인이다.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며 여기까지 온 줄 알았던 상대가 사실은 저와 같은 사람이 아닌 천사였다면.

아마도 함께했던 모든 시간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이리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돌연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어지고, 어쩌면 그 긴 세월 기만당했다는 배신감마저 들지도 몰랐다.

생각할수록 한없이 무심했던 저의 지난날이 후회스러웠다. 차라는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레오폴트만 위로하면 될 줄 알았더니, 더한 복병이 있었다.

차라는 딸을 잃은 아비는 위로해 봤지만, 연인에게 부정당한 사람은 위로해 본 적이 없었다. 성애가 깃든 사랑은 그에겐 여전히 멀고 먼 이야기였다.

복잡하게 얽혀 버린 이 실타래를 과연 어른이 되기 전에 풀 수 있을까.

한숨을 푹 내쉰 차라가 고개를 꺾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마차는 시가지의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앙겔리카 성궁의 위용이 다시금 그의 숨통을 꽉 죄어 오기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스무 번째 생일 전에는 끝내고 싶다. 그래야 어른이 되기 무섭게 이 답답한 성도를 떠날 수 있을 테니까.

***

마차에서 내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던 안드레아는 성궁의 문턱을 넘기 직전에 탈주하고 말았다. 예상보다는 오래 버틴 셈이었다.

성도에 입성할 때까지만 해도 마부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라만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으며, 차라는 레오폴트를 보러 가야겠다며 요슈아를 데리고 줄행랑을 쳤다.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페기에게로 막시모가 다가왔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정돈된 태도였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그가 걸어온 방향을 넌지시 가늠해 보았다.

성 나르세스 광장으로 이어지는 샛길.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막시모가 잽싸게 몸을 틀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께 가시죠.”

페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뗐다. 그러나 몇 발짝 걷기 무섭게 눈을 찔러오는 반사광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갓 떠오른 태양이 사방으로 맑은 햇살을 흩뿌리고 있었다. 무차별하게 뻗어 나가는 햇살이 성궁의 지붕, 백색 성벽, 혹은 근위대의 갑옷에 반사되어 연신 번쩍거린다. 페기는 더듬더듬 눈을 가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태양이 내리는 광대한 사랑이라지만, 이만하면 폭력이 아닐는지.

순백색 대리석이 깔린 성 나르세스 광장에서 아침볕은 더욱 빛을 발했다.

페기는 거의 눈을 뜰 수 없는 지경으로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평소처럼 인파로 바글거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막시모에게 듣자니, 오늘 하루 순례자들의 입궁을 금하였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전하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막시모가 지나가듯 흘린 말을 페기는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

페기는 가슴이 불안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베론의 지하 수로에서 진실을 코앞으로 당면했을 때처럼.

예상할 수 없는 문제는 언제나 그녀의 삶을 궤도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겨우 돌아온 정상 궤도에서 또다시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자연스레 초조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지그시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진실은 밝혀졌고 충격은 이미 지나갔는데도, 여전히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펐다.

막시모는 휑한 광장을 가로질러 그녀를 성 미할리나 대성당 앞으로 이끌었다.

혼자 들어가라는 양 그는 반쯤 열린 문 앞에서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의 머리를 심란하게 응시하던 페기가 이내 발걸음을 뗐다. 고요한 성당 내부로 자박거리는 그녀의 발소리가 나지막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할리나.

빛.

시작.

진리.

불에서 태어난 첫 생명이요, 다른 일곱 천사들의 원형이라. 그 자체로 교회와 세계의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는 흔히들 천사들의 우두머리로 여겨졌다. 달리 신을 모시지 않는 이 교회에서 이교의 신에 버금가는 위상을 말하자면 단연 미할리나가 뽑힐 것이었다.

하지만 먼 데 계시는 이교의 신과 달리, 천사는 땅으로 내려오신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들어와 비천하게 살고 굴곡진 생을 견딘다.

페기는 그런 존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땅으로 내려오셨을까. 왜 이 지루한 삶을 견디실까.

왜 나를 사랑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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