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을 부릅뜬 페기가 다급히 그에게로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그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서걱서걱, 목이 잘려 나가는 가혹한 소리와 함께 핏물이 터져 나가며… 데구루루. 무언가 굴러가는 소리.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안 돼,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아니야. 되뇌는 소리들이 모두 비명이 되어 폭풍을 몰고 왔다. 페기는 또다시 휩쓸리는 줄도 모르고 휩쓸렸다. 정신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비참한 육신에서 모든 감각을 도려내고 싶었다.
그러다 한순간에 모든 비명이 그쳤다.
페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발작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흘러나가며 점차 맑아지는 시야에 어슴푸레한 석벽이 들어왔다. 정신없이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빼미.
페기는 멀어지는 올빼미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아득한 정적 속, 남겨진 두어 개의 깃털만이 덧없이 내려앉았다.
***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관리들이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들어와 찻잔들과 다과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예후르는 그쯤에서 책상을 짚으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집무실로 들어서던 막시모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가시겠습니까.”
예후르는 말없이 창가로 다가갔다. 초록 잎사귀가 피어나는 정원 위로 오후의 볕이 눈부시게 바스러지고 있었다. 겨울이 물러나는 이맘때야말로 불쑥불쑥 엄습하는 봄의 기운을 피부로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시기다.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지?”
“저녁에 클레멘스 추기경과 피아제 백작이 동석하는 석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좀처럼 창밖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예후르가 느리게 발걸음을 돌렸다. 서류를 정리하던 막시모는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요 근래 그는 홀로 상념에 잠겨 산책을 즐기곤 했다.
처음에는 호위 기사 없이 불쑥 나타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함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암묵적인 성궁의 규칙이 되었다. 덕분에 예후르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한낮의 성궁을 가로지를 수 있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따사로워지는 온도, 길어지는 낮 시간과 앙상하던 나뭇가지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연한 새순…. 겨우내 피바람이 불었던 성궁은 이제야 겨우 본래의 평화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평년보다 혹독했던 겨울을 견딘 사람들은 머잖아 도래할 봄을 고대하며 지난 상처를 잊어 갔다.
그런 성궁의 분위기가 예후르는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예전의 그였다면 무심히 지나쳤을 면면들은 참으로 다채롭고 활력 있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생기를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새삼스러운 의문은 곧 지난 삶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어질 법도 하건만, 의외로 그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진해지는 봄의 풍요로운 기운이 그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몰랐다.
인적 없는 회랑을 거닐며 오후의 고즈넉한 적막을 즐기던 그는 어느새 성궁 외곽에 자리한 정원에 이르렀다. 정원사들의 세심한 손길이 채 닿지 못하는 곳인지, 정원수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산발한 야만인처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고 있었다.
저런 무질서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구나.
막시모가 듣거든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예후르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정원사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세심하게 다듬어 놓은 정원도 괜찮지만, 인적 없는 어딘가의 숲처럼 무성해진 정원에도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그 멋의 이름은 어쩌면 자유가 아닐는지.
그는 까마득한 언젠가 발을 들였었던 저 다그마르산맥의 깊디깊은 밀림을 떠올렸다.
뱀이 대륙의 중앙으로 세력을 넓히기 전 본거지로 사용되었던 그곳이 딱 이러했다. 한 번 보고는 끔찍하여 다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다시 가서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자 예후르는 문득 오래전에 접어 두었던 날개를 펴, 머나먼 서쪽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다그마르산맥까진 먼 길이나, 쉼 없이 날갯짓을 한다면 페기가 귀환하기 전에 무사히 산맥을 돌아보고 올 수도 있었다. 사실 조금 늦는다 해도 아무도 질책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결심하기 직전, 먼 데서 바람이 불어왔다.
갓 돋아난 나뭇잎들이 우수수 흔들리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풀들이 몸을 뉘였다. 예후르는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스쳐 지나간 바람이 작은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키자, 수면 위로 드리워져 있던 그의 인영도 잘게 흔들렸다.
얼마간 주위를 맴돌던 바람은 오래지 않아 먼 곳으로 떠나갔다. 소란스럽던 사위는 단숨에 잦아들고, 고요한 정적이 다시금 들어찼다. 물결이 멈춘 호수에도 그의 인영이 우두커니 선다. 정말로 돋아날 뻔했던 날개는 온데간데없이.
예후르는 격렬했던 충동을 잠재워 준 존재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초봄에도 푸릇푸릇한 잎을 자랑하는 어느 상록수.
뾰족한 잎사귀 사이로 몸을 감추고 있던 비둘기 한 마리가 비로소 날아오른다. 역광을 이고 빠르게 가까워지자, 예후르는 본능적으로 등을 매만졌다. 하지만 고작해야 산책에 활을 들고 나왔을 리가.
비둘기는 고개를 꺾어 봐야 하는 높은 곳에서 멈추었다. 태양을 등진 새의 윤곽을 타고 눈부신 빛이 후광처럼 번져 나왔다. 예후르는 눈살을 찡그리는 일 없이 고요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금빛 안광을 형형하게 내뿜던 비둘기가 이윽고 부리를 열었다.
“미할리나.”
노인 같기도, 어린아이 같기도.
“야누비타.”
혹은 사내 같기도, 여인 같기도.
“수사의 예후르.”
그토록 기이한 음성.
“…뱀.”
새의 눈이 가늘어진다.
“지금의 널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구나.”
새의 시선은 갓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으나, 정작 그 시선이 꽂히는 예후르는 평온할 뿐이었다. 그는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읊조렸다.
“나의 벗, 예리엘.”
퍼드덕거리던 새의 날갯짓이 우뚝 멈추었다. 그저 매섭기만 하던 눈빛에 차츰 노여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벗이라….”
“…….
“뱀의 사특한 수작에 넘어가더니, 그 치욕스러운 뻔뻔함마저 닮은 것인가. 도대체 언제부터 그토록 죽이려고 혈안이 된 자를 벗이라 부르게 된 건가.”
예후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던 새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구차하구나, 빛이여. 한낱 비천한 인간 따위에 얽매여 드높은 고귀함을 버리고 타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도리어 이 나를 죽이려 들다니. 과거의 올곧았던 네가 알거든 무어라 말할 것 같은가. 너는 지금 네 모습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새가 한층 고개를 낮게 기울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를 얽어맨 버러지를 처단하고, 진정한 나의 딸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라. 고귀했던 예전의 너로 돌아오란 말이다.”
“…버러지라니. 말이 너무 심한데.”
예후르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페기 역시 네가 선택했던 너의 딸이다. 뱀에게 억울하게 성화를 뺏겨 심한 고초를 겪은 것을 다 알면서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 것이냐.”
“그래 봤자 한낱 인간. 거사를 논함에 있어 그깟 하찮은 목숨 따위가 대수겠느냐.”
싸늘한 비수처럼 떨어지는 말이었다. 예후르는 하릴없이 시선을 떨구었다. 반듯하게 걸려 있던 미소는 어느새 씁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너라면 그리 말할 줄 알았어.”
“더 지체하다간 후회할 것이다.”
한없이 엄숙하던 새의 음성이 일순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잦아들었다.
“너와 발맞추어 오랜 잠에서 깨어났던 천사가 어디 나뿐이더냐. 우둔한 마그누스는 고의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여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아직 발레론과 이슬라가 남아 있다. 그들이 너의 참상을 알게 되는 날에는 오늘의 이 평화도 끝이다. 다시 세상은 천사와 뱀의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말 것이야. 진정 전란의 시대를 바라느냐.”
툭하면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메마르던 시절.
예후르는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무사한 내일을 장담할 수 없었으나, 벗들은 참으로 많았던 때.
“평화가 그리 중한가.”
“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씩 곱씹을 뿐이었다.
“바보처럼 굴지 마라.”
보다 못한 예리엘이 질책했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끝내 승리했다. 우리에겐 이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어. 또한 승자로서 이 세상을 옳은 길로 이끌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너는 고작 땅을 기는 버러지 따위에 발목이 잡혀 이리도 볼품없는 꼴을 보이는 것이냐.”
“…….
“당장에 네 손으로 그 버러지를 죽여라.”
서슬 퍼런 분노가 끓어올랐다.
“네가 망가트린 질서를 네 손으로 다시 되돌려라. 원래 그러했던 모습으로, 또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명예롭게 죽어.”
예리엘의 눈이 순간 살기로 번뜩였다. 예후르는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직도 내게 명예란 것이 남아 있던가.”
“명예를 버렸다면 지금껏 네 손으로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려라. 타락한 벗들을 네 어찌하였던지. 똑같이 타락하고도 살아 이 평화를 누리려 하는 것을 그들이 안다면 무어라 하겠느냐.”
“비열하기 짝이 없노라 손가락질하겠지.”
“…….
“하지만 예리엘, 내가 죽는다면 너 또한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후르의 눈이 살짝 휘어졌다. 어딘지 빈정거리는 투였으나, 예리엘은 추호도 개의치 않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마치 바위처럼 단단했다.
“정의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타락한 너를 단죄하는 것만이 우리의 정의다.”
예후르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가셨다.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물끄러미 새를 올려다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언제부터 너의 정의가 우리의 정의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만은 너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르지 않구나.”
“…….
“물러가라, 예리엘.”
예후르는 매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퍼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