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4화 (284/328)

촛대를 쥔 예후르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을 페기는 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말리고 싶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으나,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이 먼저였다.

“너는….”

“나는 꼭 방법을 아는 것처럼 말한다고.”

느긋하게 말을 가로챈 뱀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안다면, 어찌할 텐가.”

“…….”

“그 고귀하신 무릎이라도 꿇으실 텐가.”

예후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마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심지어 그는 스스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처음으로 자각한 사람 같았다.

“표정 한 번 볼 만하구나. 나 혼자 보는 것이 아까울 지경….”

“꿇으면 되는 건가?”

“뭐?”

실실거리던 뱀의 표정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 어느새 차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예후르가 말간 눈으로 그를 응시해 왔다.

“이 다음엔 무얼 해야 하지?”

싸하게 얼어붙은 뱀의 눈가가 경련하듯 한 차례 씰룩였다. 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꽉 틀어쥔 뱀이 돌연 허벅지에 꽂혀 있던 성검을 힘껏 뽑아냈다. 허공으로 분출하는 핏물 사이로 고통에 일그러지는 뱀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크흑!”

남은 힘을 긁어모아 성검을 내던진 뱀이 돌바닥으로 맥없이 엎어졌다. 가쁜 숨을 들이켜느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마른 등에서 척추의 윤곽이 흉하게 드러났다. 이를 갈며 한참이고 고통을 삭이던 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에 안광만이 형형했다.

뱀은 멀쩡한 다리를 축으로 간신히 일어섰다. 두어 차례 넘어지고 겨우 바로 섰으나, 그마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울 뿐이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그는 한 발, 한 발 힘겹게 예후르에게로 다가갔다. 상처 입은 다리가 질질 끌리며 핏자국을 그려 나갔다.

“이 다음엔, 무얼 해야 하느냐고?”

촛불에 가까워질수록 불거진 광대와 푹 꺼진 뺨 그리고 앙상해진 얼굴의 윤곽선이 한층 도드라졌다. 광기가 흐르는 눈 주위로는 잔 핏줄들이 가닥가닥 서고 있었다.

“난 너에게 모든 것을 잃었다! 나의 힘, 나의 벗, 나의 시대! ‘우리’는 네 손에 갈기갈기 찢겨 이토록 형편없는 꼴로 전락하였는데, 너는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것이냐!”

뱀의 발꿈치 뒤로 퍼져 나가는 그림자가 흉흉하게 울기 시작했다. 뱀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예후르의 멱살을 힘껏 부여잡았다.

“그 잘난 머리로 한번 생각을 해 보아라! 네가 어찌해야 나의 이 분노가 가실 것인지! 수많은 벗을 네 손으로 보냈으면 너도 그쯤은 알 것이 아니…!”

돌연 예후르의 손아귀가 뱀의 뒷덜미를 덮쳐 왔다. 순간 뱀은 목 졸리는 소리를 내며 돌바닥으로 처박혔다. 저항할 틈도 없이 예후르가 그의 등을 깔고 앉자, 뱀은 결박당한 사지를 파르르 떨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예후르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무얼 더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은, 무엇을 더 어찌해야 네가 죽은 자를 살려 낼 것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땅을 기는 음울한 목소리.

“지금 내겐 너의 알량한 분노까지 돌보아 줄 여력이 없어.”

“알량…?”

뱀은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틀었다. 겨우 드러나는 옆얼굴에 째진 눈이 이글거리도록 예후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도 이제는 상실의 고통을 알지 않느냐…. 너는 알고도 외면했던 예리엘 같은 냉혈한이 못 돼. 수많은 벗들을 잃으면서 아픈 줄도 모르고 아파했던 너를 기억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어떻게 똑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억!”

“그리고.”

뱀의 뒷덜미를 틀어쥔 손에 굵은 핏줄이 서기 시작했다.

“벗이라 부르지 마라.”

뱀은 숨통이 막히는 고통을 견디며 간신히 눈을 떴다. 차츰 흐릿해지는 시야에 스산한 어둠으로 덮여 가는 예후르의 모습이 얼핏 들어왔다.

“나는 너의 벗이 아니며, 죽어간 나의 벗들은 너의 벗이 아니다. 내가 베어 넘긴 그들 역시 나의 벗이 아니야.”

“…….”

“그 많던 나의 벗들을 죽인 것은 바로 너다.”

악착같던 뱀의 몸부림이 우뚝 멈추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확장된 눈이 느리게 굴러갔다.

“네가 죽였어.”

둘의 시선이 겨우 맞닿았다.

뱀은 암암한 역광을 드리운 예후르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어둠에 가려진 그의 표정은 도저히 읽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뱀은 이 순간 빛이 자신의 가장 여리고 미성숙한 부분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뱀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손아귀가 무심히 떨어져 나갔다. 힘겹게 윗몸을 일으킨 뱀이 조금 얼떨떨한 눈으로 예후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던 성검을 집어 들고 있었다. 말없이 검날을 닦아내는 표정이 못내 서글프고 음울했다.

“다시 한번 무릎 꿇으라면 꿇겠다.”

뱀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나지막하게 울려 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예후르의 것이었다.

“네 발을 핥으라면 핥을 것이고, 지난 세기의 사과를 원한다면, 좋아. 기꺼이 하지.”

“…마음에도 없는 사과나 받으라 이건가?”

“내게 마음이 없다고 한 건 너였어.”

예후르는 힘없이 자조하며 뱀을 돌아보았다. 뱀이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으나, 예후르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네 말대로 기쁨을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분노할 줄도 모르지. 너는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분노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내겐 한낱 이름 없는 고통일 뿐이다. 이런 나를 네가 불쌍히 여기든, 우둔하게 여기든 상관하지 않아. 덕분에 나는 수치심도 모르니까.”

그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내겐 더 이상 세울 자긍심도, 내 목을 걸어 지켜야 할 존재도 없다.”

“…….”

“그러니 말해.”

우뚝 멈추어 선 그가 위압적인 눈으로 뱀을 굽어보았다.

“죽은 자를 살려 내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엄숙하게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 속에서 뱀은 한결 작고 왜소해 보였다. 엄습하는 기세에 짓눌려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그마저 찰나일 뿐. 뱀은 거대한 존재를 앞에 두고 기어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렸다.

“제왕의 눈으로 복종을 말하는구나.”

“복종을 원하는가.”

“네 눈엔 내가 고작 그런 것으로 만족할 것 같은가.”

뱀이 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낄낄거렸다.

“지금에 와선 이토록 볼품없어졌으나, 나 역시 한때는 하늘 아래 모든 땅을 다스리던 제왕이었다. 비록 날개가 꺾여 더 이상 하늘을 탐하진 못하였으나, 비천할지언정 더욱 풍요로운 이 땅이 내 세상이었지. 너도 기억하고 있지 않느냐. 나의 기세가 하늘 아래를 뒤덮고 온 땅을 진동하던 때를.”

먼 과거를 회상하는 뱀의 눈이 잠시 흐릿해졌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너무나도 오래되어 빛이 바랬고, 부질없는 현실을 일깨우는 육신의 고통은 여전했다.

순식간에 초로의 노인처럼 쇠약해진 뱀이 말라붙은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빛이여, 너의 복종은 나를 즐겁게는 하겠으나 그뿐이다.”

“…….”

“나는 더 큰 것을 원해.”

계속해 보라는 듯 예후르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뱀 역시 쉽사리 뒷말을 잇지 못하니,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긴장감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기만 했다. 페기는 식은땀이 차오르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다 무심코 발견했다.

남몰래 비틀려 올라가는 뱀의 입꼬리를.

“…나는.”

미묘하게 고개를 숙여 입가를 가린 뱀이 탐욕스럽게 눈을 치켜뜬다. 그 순간, 페기는 저도 모르게 달려 나가고 말았다.

“너의 몸을.”

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으나, 간악한 목소리가 먼저였다.

“원해.”

한발 늦은 페기가 황급히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일 뿐이었다.

“내 몸을?”

“보다시피 내 몸은 이 지경이 되었다. 꼴사납게 죽지 않으려면 또 한 번 몸을 옮겨야 하지. 그 악독한 예리엘의 불을 삼켜 다른 몸을 훔쳐 먹을 힘은 아직 남아 있으나, 이 짓을 계속 반복하다간 결국 힘이 다해 인간처럼 죽고 말 것이다.”

“…….”

“하지만 너의 몸은 다르지.”

뱀은 탐욕이 묻어나는 눈으로 예후르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너는 여전히 그 강고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천사. 그 이름도 위대한 빛이며, 또한 모든 존재의 원형인 시작이다. 내가 너를 훔칠 수만 있다면 유한한 수명 따위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영광스러운 과거에 버금가는 힘을 얻게 되겠지.”

“그건 네가 내 몸을 훔칠 수 있다면의 이야기다.”

“물론 너를 온전히 가지려는 것은 내 욕심에 지나지 않아.”

뱀이 눈을 가늘게 접었다.

“하지만 빛이여, 생각해 보아라. 죽은 자가 되살아나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의 질서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서를 대변하는 네가 나 같은 그림자에 오염되어 타락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어찌 되겠느냐.”

질서의 붕괴.

그것은 곧 죽은 자가 되살아나는 세상.

“나도 무조건적으로 확신할 수만은 없다.”

한 차례 일렁이는 예후르의 눈빛을 발견한 뱀이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시도해 볼 만하다고는 생각한다. 네가 죽은 그 아이를 그토록 아낀다면 말이지.”

예후르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가는 그의 눈빛은 차마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것은 뱀 역시 마찬가지인지, 못내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나는 작고 미약하다. 너를 온전히 가지긴커녕, 내 이지를 잃지 않기 위하여 악을 쓰는 것이 전부일지도 몰라. 나는 그저 너를 더럽히기 위한 도구에 불과….”

갑자기 뱀이 말을 멈추었다. 예후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려는….”

“그 상태론 내 몸을 훔치려는 시도만으로 타 죽고 말 것이다. 약해진 너로서는 지금 내 힘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예후르는 차분하게 단검의 날을 확인했다. 예리하게 선 칼날이 섬뜩하도록 불빛을 갈랐다.

“요는 네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가 검을 고쳐 들었다. 가벼운 손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페기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몰라도 그를 막아야 했다. 불안감이 끝을 모르고 폭주하고 있었다.

“너의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내가 가라앉으면 그만이다.”

“…….”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가 자신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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