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페기는 멍하니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천 년 전,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앙심을 품은 복수인가. 하지만 결국에 그녀는 되살아났고, 예후르 역시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뱀의 복수는 실패한 것인가.
페기는 불안에 떨리는 눈으로 불빛 너머 아득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격리된 것처럼 시간의 흐름조차 무뎌지는 이 땅속.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는 어느 순간, 멀리서부터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페기는 어깨를 움찔했다.
어느샌가 뱀이 들고 온 양초마저 꺼진 사위는 그저 시커멓기만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소리가 유독 시끄럽게 울려오는 가운데, 난데없이 촛대를 든 성직자 하나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그녀의 발치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깜짝 놀란 페기가 뒷걸음질했다.
“으윽….”
넘어지면서 우당탕 돌바닥을 구른 성직자가 부닥친 무릎을 문지르며 얕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페기가 다시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정체를 확인하려는데, 예고도 없이 성직자의 고개가 휙 들렸다.
주름이 가득한 늙은 얼굴에 순간 아연함이 비껴갔다.
“…펠릭스?”
성직자가 후다닥 일어나 쓰러진 뱀에게로 달려갔다.
“페, 펠릭스! 펠릭스!”
정신을 잃은 뱀의 얼굴이 미약한 불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났다. 손을 떨며 어찌할 줄 몰라 하던 성직자는 뱀의 허벅지에 꽂힌 검을 발견하곤 대경실색했다. 검을 만지지도,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도 없어 허둥지둥할 뿐이었다.
“네, 네가 어찌 여기 있는 것이야! 넌 성도에 있었어야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중얼하던 성직자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었다. 실 끊긴 인형처럼 가만히 뱀의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핼쑥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인다.
“성도에… 있었어야….”
피투성이 뱀의 뺨을 감싸고 있던 늙은 손이 움찔하며 오므라들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
갑자기 성직자가 화다닥 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마치 뱀이 역병에 걸린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그러다 반대편 벽에까지 이르러 뒷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말도, 말도 안 돼….”
늙은 성직자가 아래턱을 덜덜 떨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분께서 그러실 리가… 아니야, 이건, 이건 아니야!”
난데없이 고성을 내지른 성직자가 돌연 캄캄한 어둠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자 바닥을 나뒹굴던 양초에서 맥없이 촛불이 사그라들었다. 페기는 경황없이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씁쓸하게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짐작이 맞다면, 저자는 베론의 주임 사제.
예후르의 기묘한 행적을 일일이 기록해 둔 사람이며, 그의 정체를 가장 먼저 깨달았으나 미처 폭로하기 전에 숨을 거둔 인물이다.
법정에서 낭독되었던 그의 일기 내용을 상기해 보건대, 예후르가 성도로 떠난 직후 지하로 내려가지 말라는 그의 경고를 어기고 호기심에 문을 열었다가 저 사달이 난 듯했다. 이미 죽은 사제의 충격이야 그녀의 알 바가 아니었지만, 다른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지금쯤 예후르는 성도에 도착했을까.
아무리 하늘을 나는 용이 빠르다 한들, 성도와 베론의 간극마저 좁혀 주진 못한다. 그가 급보를 듣고 성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녀는 죽어 관으로 들어가 있었다. 페기는 제 죽음을 듣고 느꼈을 그의 충격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제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고 떠나 버린 그의 심경을 차마….
페기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뱀은 언젠가부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불이 꺼진 사위는 한 치 앞도 가리기 힘든 어둠만이 자욱했지만,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적막을 보아 여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그 자리에 누워 있을 터.
“오, 그는 돌아올 수밖에 없어. 달리 방법이 없을 테니까.”
예후르는 말했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다고.
그러나 그녀의 죽음을 손 놓고 목도하기만 했던 그는 뱀의 말대로 돌아오고야 말 것이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미 죽은 사제의 일기를 통해 밝혀진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곳에서 벌어질 일들을 그녀는 차마 상상할 수가 없다.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그녀는 끝내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뱀과의 어떤 거래를 통해 예후르가 성사시킨 일이라면, 그는 어찌하여 살아 돌아온 그녀를 그토록 믿지 못하였던가.
북방에서 만났던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불가능함을 여러 차례 못 박았다. 단순히 아는 사실을 읊는 것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울분에 찬 태도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의아하게도 그녀가 알던 예후르는 무작정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는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좀처럼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예후르가 몹시도 답답했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왜 이리도 벽이 되었을까.
목매어 애달파 했던 그때를 지금에 와서 다시 찬찬히 돌이켜 본다.
만일 그가 그녀를 되살려 내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시도해 본 것이라면.
뱀의 말대로 달리 방법이 없던 그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돌아온 것이라면, 그러면 설명이 된다. 그는 그녀를 살려 내기 위하여 그토록 저주해 마지않던 뱀과 ‘거래’를 했으나, 그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아서.
천사가 실패하고 뱀이 또한 실패했던 일이라면, 이후 살아 돌아온 그녀를 그토록 믿지 못하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뱀이 말하던 ‘복수’.
봉인의 여파로 쇠약해진 뱀은 더 이상 예후르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녀였다. 그러나 뱀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녀를 죽여 예후르에게 심적인 고통을 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뱀에겐 더욱 고차원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른바 그녀의 부활을 건 거래에서 요구할 무언가.
페기는 그것의 정체를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천사와 뱀. 이미 그녀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들이기도 했거니와, 곧 닥쳐올 진실이 이제 막 도래한 그녀의 행복에 종점이 되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
언젠가부터 페기는 모든 것을 알고 불행한 사람이 되느니,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한 바보가 되길 바랐다. 한 번의 죽음과 한 번의 부활. 평범한 사람이 견디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그나마 정치적인 음모에 얽혀 억울하게 죽었다고 알던 때가 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점이었다.
뱀.
천사.
그녀는 감히 이런 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뱀이야.”
대체 그는 왜 고백했는가.
“그는 천사야.”
말은 왜 엇갈리는가.
“내 반드시 우리의 복수를 완수할 것이니.”
제발….
그녀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손바닥에 묻었다. 무서웠다. 촛대 하나에 의지하여 호기롭게 지하로 내려왔던 순간이 멀게만 느껴졌다. 우습게도 곧 닥쳐올 진실과 마주할 순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부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을 내려 달라 빌고 싶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꽉 맞잡은 손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기도는 닿을 곳을 잃고 하염없이 헤매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쿵쿵.
페기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단단한 장화 밑창이 사정없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두꺼운 석벽에 치여 서서히 공명해 왔다. 좀처럼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그의 발소리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기괴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호흡조차 잊은 채 우두커니 어둠 속을 응시했다.
실은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라 해도 좋았다. 시야는 어둠에 가로막혔고, 귀는 공명하는 발소리들로 난잡해져만 갔다. 육신을 지배하는 모든 감각들이 공포에 질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페기는 스스로 울고 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불현듯 싸늘한 기운이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페기는 그제야 잊고 있던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메마른 바람, 써늘한 장대비의 냄새가 이리저리 뒤섞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어느샌가 발소리 멎은 사위는 고요했으나, 예리하게 날이 선 감각은 그의 존재를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왔구나.
페기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 어딘가에 그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진실이 그녀를 공포에 절게 했다.
별안간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느닷없이 눈을 찔러오는 불빛에 놀라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려던 그녀가 멈칫하며 손을 도로 내렸다. 예후르가 허리를 굽혀 바닥을 뒹구는 촛대를 줍고 있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일전에 주임 사제가 두고 간 양초가 들려 있었다.
양초를 촛대에 꽂는 모습을 아연하게 지켜보던 페기는 무심결에 그 너머를 보았다가 기겁할 듯 놀랐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뱀이 어느새 정좌하여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신은 보았는가.”
예후르는 묵묵히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보니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에 푹 절어 있었다.
“곱게 죽진 못하였을 것인데…. 적어도 불에 타 뼛가루만 남은 것보단 낫지 않겠나.”
맥없이 바닥으로 늘어져 있던 예후르의 시선이 그제야 느릿느릿 뱀에게로 올라왔다. 촛불이 일렁이는 금안은 견딜 수 없는 피로에 젖은 듯도 했고, 모든 감정을 파내어 텅 비어 버린 듯도 했다.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하던 뱀이 입꼬리를 미끄럽게 끌어 올렸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지?”
“…….”
“머리가 급속도로 뜨거워지다가도 한순간 차갑게 가라앉겠지. 심장은 계속 엇박자로 뛰는데 고동 소리는 귓전에서 가시질 않고, 뜨거운 불덩이라도 삼킨 것처럼 뱃속이 절절 끓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할 터.”
뱀이 자비롭게 양팔을 뻗었다.
“그것이 바로 분노다.”
다물려 있던 예후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미끄러지는 빗방울이 촛불을 머금어 이상하리만치 붉었다.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당장이라도 발본색원하고 싶을 것이고, 또한 어떻게든 그 일에 얽혀 있을 눈앞의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네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 또한 잘 안다.”
“…….”
“모르니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뱀의 입가에서 흘러나온다.
“죽은 자를 어떻게 되살려 내는지, 너는 전혀 모르니까.”